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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최우선적 선택을 요구 받는 신앙인
조회수 | 1,646
작성일 | 08.06.26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신앙인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절대 가치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점을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시면서까지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자기로부터 탈출해서 다른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공간으로부터 과감하게 이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랑의 깊이와 의미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라는 이기적인 틀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절대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혈연관계까지도 포함해서 그 어떤 인간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 우리를 사랑할 수는 없기에,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라는 작은 인격 안에 그리고 얄팍한 우리의 논리나 사고 속에 매몰되어 있는 한, 폐쇄적인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당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과감하게 열어젖히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그분의 모습 앞에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개방해야만 참으로 기쁨을 만끽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음을 밝혀 주십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땅을 뚫고 나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이 우리의 이기심이나 욕심의 두터운 벽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 씨앗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고 심오하게 해 줍니다. 우리 모두가 한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고 산다는 공통의 인식을 갖게 될 때, 형제적 사랑을 나누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의 이름으로 파견되거나 그분을 증거하는 형제들을, 바로 주님을 맞아들이듯 맞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시고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그가 누구이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바로 주님을 향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우리 안에 녹아 내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을 표현해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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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안병철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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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두 교황’과 교황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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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 교황’은 은퇴를 결심하고 후임을 물색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교구장 은퇴 승인을 받기 위해 교황을 방문한 베르골리오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함께 지낸 이틀 동안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교회의 전통과 규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보수파 교황과 이제는 교회가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고 신자들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는 개혁파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만남을 다루면서, 우리 교회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또 동시에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교회가 매 순간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황의 말에, “오늘날 교회는 자비로 담을 부수고, 그 대신 다리를 지어야 한다”고 응수하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대화를 통해, 제도 안에서의 전통적 교회론과 신자들 삶의 현장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새로운 교회론이 충돌하지만 결국은 이 둘이 함께 공존해야 함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복음은 ‘시원한 물 한 잔’(마태 10,42)이라는 말로 교회의 원론적인 역할을 제시한다. 뜨거운 중동에서 ‘시원한 물 한 잔’은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물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나 우물 보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뚜껑을 닫고 열지 않아 더는 물을 마실 수 없다면 그 우물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 너무 방어적인 모습으로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므로 해서 삶의 현장과 유리된 면을 바로 잡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교회가 일상의 현장에서 세상 속의 작은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제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물 뚜껑을 열 때 정체성을 회복하고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라는 표현으로 삶의 현장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받기 쉬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중요한 것을 적극 나누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이는 ‘작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벼운 존재일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그들이 신앙적 실천 대상의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교회가 제도권에만 공고히 머무르기 위해 정작 삶의 현장에서 관심이 필요한 작은 이들을 놓치고 있지 않았는지에 대해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냥 ‘물 한 잔’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잔’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눔은 주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욱 필요한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나 신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부분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좀 더 신중하게 받는 사람의 입장까지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시원한 물 한 잔’을 기다리며 목말라 애타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방황하는 이들은 무시한 채, 화려한 종교적 행사 위주로 단지 양적 팽창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과감히 그 달음질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잃는 것 보다는 작은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헤아릴 수 있어야 “우리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우리는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활동하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좀 더 윤리적인 비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CAPP 연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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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2020년 6월 28일 평화신문에서
  | 06.25
459 15.6%
[서울] 제자 됨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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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도 절반 이상이 지났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빼앗긴 우리의 일상, 그리고 정상적인 미사 참례와 본당 활동이 아련하고 그리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저는 연중 제13주일 복음(마태 10,37-42)에서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특히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 복음서는 독자들이 스승 예수님의 제자됨의 길을 걷도록 초대합니다. 복음서 끝부분에 따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라는 스승 예수님의 사명이 제자들에게 부여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주일 복음 말씀을 읽어봅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길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더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37절에서 ‘사랑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동사와는 다릅니다.

37절의 표현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좋아하다’라는 의미로 부정적인 것을 가리키거나 멸시적인 어조(마태 6,5; 23,6)로 사용되기까지 합니다. 이는 가족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 사랑도 물론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하느님 사랑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됨의 길을 걸으며, 가족 사랑을 핑계로 하느님 사랑을 소홀히 하면서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여기서 ‘목숨’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는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영적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전인적 생명, 존엄한 인격체로서의 생명을 뜻합니다.

게다가 ‘목숨을 얻다’라는 표현에서 ‘얻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발견하다’라는 일차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 인격체로서의 전인적 생명을 스승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고 잃을 각오마저 아끼지 않는 제자들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절망과 피로감, 실망과 무기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많은 것들이 상대화되고 부질없이 느껴지는 이 시기에, 스승 예수님의 제자됨의 길을 여러분은 어떻게 걷고 계십니까?

이 시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신앙인에게 변하지 않는 가치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곰곰이 돌아보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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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6월 28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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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유튜브는 다양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저는 주로 강의를 듣거나, 미국 뉴스를 듣기도 하고, 음악을 듣습니다. 동영상을 다 보면 유튜버들이 ‘좋아요와 구독’을 눌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눌러주신 좋아요와 구독은 더 좋은 영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저도 마음에 드는 영상물이 있으면 좋아요를 누르곤 합니다.
잠깐의 관심이 모이면 몇 백만, 몇 천만이 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으면 부정과 부패가 자라지 못합니다. 깨어있는 시민이 깨어있는 지도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그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방역 수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지키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의심증상이 있으면 즉시 검사를 받고, 자가 격리를 하는 것입니다. 정부의 방역 대책과 국민들의 참여가 함께하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고,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지난 예수 승천 대축일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날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로나19로 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신문 홍보를 하였고, 구독을 부탁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보내는 것이 귀찮을 수 있습니다. 구독료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신문구독을 신청해 주셨고, 후원금도 보내 주셨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신문사는 신협과 거래를 합니다.
가깝기도 하고, 광고주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협이기에 가능한 범위에서 편의를 봐주기도 합니다. 신협의 정신은 ‘일인은 만인을 위해서, 만인은 일인을 위해서’입니다.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신협의 정신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과 비슷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으로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인 성녀들의 전구와 우리들의 기도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참된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는
나이가 많은 부부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사는 부부가 원하는 것이 자녀의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내년에는 부부에게 자녀가 생길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고 합니다.
좋은 일을 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노부부의 선행은 그렇게 바라던 자녀의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와이에서 사는 젊은이가
사제관으로 먹을 것을 보내왔습니다. 이곳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은 하와이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을 위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를 보지 못했지만 좋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문 앞에 마스크를 놓고 가셨습니다. 어떤 분은 과일과 음식을 놓고 가셨습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우주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두운 우주를 비추는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나눔의 빛을, 희망의 빛을, 사랑의 빛을 비추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넘어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 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딸을 교통사고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십자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찾는 것도 아니고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삶 안에 받아들여 주님처럼 등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삶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록 시작은 작을지라도 가정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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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459 15.6%
오늘은 연중 제 13주일이자 교황주일입니다.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가장 가까운 주일을 교황주일로 보냄으로써 교황님이 세계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많은 분들이 직접 광화문에 가서 혹은 대중매체를 통해 교황님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연일 나오는 기사와 교황님에 대한 정보 속에서 우리는 모두 종교에 상관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그분의 행로를 지켜보았습니다. 사실 그 때 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중이었으므로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황님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역사 안에서도 손꼽힐 만한 드문 사례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그리하여 이태리의 시골 수녀원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어떤 일정을 소화하셨는지 인터넷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태리 신자분들과 수녀님들께 소개하며 함께 즐거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긴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멀고 먼 존재입니다. 전 세계 약 13억 가톨릭 인구의 수장이고 베드로의 후계자이니 한 없이 거룩해 보이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그런데 가끔, 아주 어린 아이들이 저에게 물어봅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언제 교황님이 되요?”

그러면 저는 당연히 “신부로나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렴”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꼭 덧붙이는 말이 있는데, “악담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일이 있지도 않겠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교황>이라는 역할은 인간이 할 법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로 지구 반대편에서 돌아온 지 하루도 안 되어

시차 적응할 새 없이 공무를 수행하시는 모습, 수많은 각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수백 명이 아닌 수천 명 수만 명 앞에서 긴 미사를 집전 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이 뿐만이 아닙니다. 교황님은 그야말로 개인의 일정을 소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 한 복판에 있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있는 모든 국가의 원수들에게 화해를 청해야 하며, 정치적인 사안을 건드려야 합니다. 난민 문제를 비롯해 소외된 이들을 위해 간절한 목소리를 내야하고 환경문제, 가정문제와 같은 갖가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사소한 행동, 사소한 발언 하나도 뉴스거리가 되고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지역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보다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매일매일 보고 받아야 하고 이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교황이 되는 순간 특정 국가의 이익을 방지하기 위해 출신 국적을 포기하므로 고향에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방문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계명과 상충되는 말씀인 듯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정성을 포기하라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견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보다 가족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안에 욕심과 집착이 자리하게 되고 하느님은 내 가족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하느님이 의지의 대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입니다.이러한 결과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발견합니다. 내 뜻대로 가정사가 이뤄지지 않을 때 종종 우리는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등을 돌리거나 하느님이 정말로 계실까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의지하며 예수님의 희생에 깊이 동참할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겸손되이 주님께 의지할 때 그만큼 더욱 더 큰 은총이 주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국적을 포기하고 늙은 몸을 이끌고 세계를 짊어지고 있는 교황님의 삶을 상기해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황님의 역할은 비단 한 사람에 맡겨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저마다의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 애쓸 때 우리는 비로소 교회의 참다운 구성원이 되고 함께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강론을 마무리 하며 이태리에서 교황님을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 봅니다.저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내내 멀찍이 교황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커다란 존경심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하던 어느 날 학교에서 한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저는 윤리신학을 유일하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황청립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교황님께서 학교 기념일을 맞이해 저희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교황님을 멀리서가 아닌 단독으로 뵙고 인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한참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지만 사실 이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교황님께 한 마디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저는, “아직까지 우리 한국인들은 교황님이 보내주신 애정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교황님이 다른 손으로 저의 손을 감싸시며 “정말 고맙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보여주신 교황님의 따뜻한 온기와 미소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뒤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에게 이러한 힘이 되어 주시는 교황님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께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길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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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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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   [청주] “예수님, 배고파 죽겠어요”  65
771   [서울] 매일 빵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7] 2222
770   [군종] 감사와 청원  [1] 1597
769   [의정부]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1998
768   [춘천] 나눔,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길  [1] 1745
767   [전주] ‘가엾은 마음’  1943
766   [인천] 예수 그리스도의 나비효과  [4] 1869
765   [광주] 비워지는 만큼 풍성하게 채워지는 것  [1] 1649
764   [수원] 하늘나라의 잔치  [4] 1968
763   [대전] 그대들이 먹을 것을 주시오  [1] 1496
762   [대구] ‘나눔과 하나됨’  [2] 1833
761   [안동]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2] 1905
760   (녹) 연중 제18주일 독서와 복음 (오병이어-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 1531
759   [수도회] 하늘나라 문을 열어본 사람  [5] 2329
758   [광주] 밭에 숨겨진 보물이란  [2] 2298
757   [대전] 신앙의 보물을 사셨습니까?  [2] 1950
756   [부산] 복 있는 그리스도인  [4] 2961
755   [인천] 하고 싶은 것들  [6] 2284
754   [군종] 진정한 보물은 무엇일까요?  [4] 2250
753   [안동]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  [3] 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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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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