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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8주일 독서와 복음 (오병이어-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조회수 | 1,547
작성일 | 08.07.31
람베르트 롬바르트의 <오병이어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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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 와서 먹어라.
▥ 이사야서 55,1-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2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해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다.
그분께서는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다.
그러니 늘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목마른 자도 양식이 없는 자도 그분께 나아가면 채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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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바오로의 로마서 8,35.37-39

형제 여러분,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7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해설]
주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두려워할 일이 어디 있는가?
환난도 역경도 박해까지도 주님의 도움이 있으면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분의 사랑에서 멀어지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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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 복음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해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이 먹고도 남았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놀란 가슴으로 먹었을 것이다.
‘이 음식이 어떤 음식인가!’
그들은 감사하며 먹었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먹었을 것이다.
감사와 찬미의 생활은 어디서나 기적을 모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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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오 13장 51절)

예수님께서 갖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신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마음이 열려 있는 몇 사람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귀가 꽉 막힌 불의한 적대자들은 더 불신에 차 군중을 선동하였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군중은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오 13장 54ㄴ절) 하고 경탄만 할 뿐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불의한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파견하신 예언자들과 같은 운명을 체험하심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이 명확해졌습니다. 헤로데의 변덕으로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 역시 목이 잘려 쟁반에 올려집니다. 요한은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희생 제물이 되고 맙니다(마태오 14장 3절-12절).

세례자 요한의 최후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피신하십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오 14장 13ㄱ절) 적의를 품고 있는 헤로데 앞에서 잠시 물러나 그 장소를 떠나시지만 백성을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궁핍한 사정에 지극한 관심을 쏟으십니다. 그래서인지 군중이 외딴곳까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마태오 14장 13ㄴ절)

외딴곳이란 삭막한 곳이기도 합니다.
여러 고을에서 몰려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파를, 나중에 마태오 복음사가는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고 증언합니다(마태오 14장 21절).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마태오 14장 14절)

이런 위험천만한 시기에 군중을 몰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신변이 더 위태로워질 텐데도 여전히 병든 양들을 치료해 주시는 착한 목자의 역할을 다하십니다. 이는 목자 없는 양들에 대한 연민 때문입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은 많고 게다가 한적한 곳이라 저녁 끼니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자들 딴에는 걱정이 되어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오 14장 15ㄷ절)라고 해결 방안을 내놓습니다.

제자들은 이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으니 돌려보내자고 하지만 예수님은 배불리 먹이지 못했으니 돌려보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오 14장 16절)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진 것이라곤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군중을 배불리는 일이 제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요구하시지만 그들이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오 14장 18절)

두어 사람 한 끼 식사밖에 안 되는 양이 예수님 손을 거치자 많아집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권능의 생생한 본보기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일을 행할 수 있다는 예증이기도 합니다. 소명을 내리시는 예수님은 소명을 이행할 힘도 함께 주십니다.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마태오 14장 19ㄱ절) 이런 외딸고 삭막한 곳에 풀밭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날이 저물어 빛이 소멸해 가는 찰나에 풀밭은 양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목자 없이 떠돌던 양 떼는 참 목자를 만나 푸른 풀밭에 이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오 14장 19ㄴ절)

군중을 돌려보내거나 빵을 사서 먹이지 않고 가진 것만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적은 양의 양식이 예수님의 손에서 불어났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하시고
빵을 떼시는 모습은 최후만찬을 앞당겨 보여줍니다. 또한 빵의 기적은 장차 있을 성체성사의 풍요로움을 예고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오 14장 20ㄱ절)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빵의 기적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 여정 사십 년 내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살리셨습니다(탈출기 16장1절-36절).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때도 빵의 기적이 있었습니다(열왕기 상권 17장 절-16절, 열왕기 하권 4장 42절-44절).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오 14장 20ㄴ절)

대충 요기만 한 정도가 아니라 먹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골고루 나누기만 한다면 모두가 넉넉해지고 만족하고도 남습니다. 열두 광주리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 새로운 백성들은 새로운 역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회의 주춧돌이 될 사람들입니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마태오 14장 21절) 여자와 아이까지 묘사하는 이 장면은 가족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헤로데의 생일에 벌어진
죽음의 잔치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잔치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풍성한 나눔의 잔치였습니다. 병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를 받았고, 모든 사람이 이웃과 한 가족이 되어 배불리 먹었습니다. 삭막하고 외딴곳에서 새로운 백성이 탄생합니다.

이 일로 제자들은
죽임의 잔치를 극복하고 살림의 잔치를 벌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근시안적인 시각을 크게 넓히게 되었습니다. 늘 겸허한 자세로 군중 곁에서 군중의 입장에서 봉사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예수님의 극진하고 넉넉한 대접이 제자들과 군중을 변화시켰습니다. 늘 오늘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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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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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아 봅니다.
내가 먼저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
내가 할 줄 아는 것을 다른 이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내가 먼저 얻은 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 것……
나는 나눌 것이 없는 것만 같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눌 것이 넘치도록 많았습니다.

<중략>

나누면서 제가 더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제 것을 나누어 주었는데도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나눌 것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이가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사제로 기억하는 이태석 신부님이 남기신 글입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톤즈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우시면서, 가진 것을 나눌수록 오히려 풍요로워지는 것을 깊이 체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배고픈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도 없는데 남 줄 것이 어디 있느냐.’는 볼멘 대답처럼 들립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나 있습니다.’는 크게 다릅니다.

이것은 마치 사막을 건너는 사람이 ‘물이 반병밖에 없네.’ 하고 걱정하는 것과 ‘아직도 반병이나 남았네.’ 하고 여유를 갖는 것에서 느끼는 차이입니다.

지금 가진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가 삶을 풍요롭게도 하고 빈곤하게도 합니다. 어떤 삶을 살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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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7월 31일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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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복음을 오늘 다시 듣습니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구절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길을 보여 주신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남은 조각’이라는 말과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말은 퍽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가득 차다’에서 파생된 명사 ‘충만’(pleroma)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신학생 시절 은사 신부님이 자주 강조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은총의 충만,
곧 차고 넘치는 은총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대개 ‘남은 조각’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조각은 우리의 고통과 분열된 자아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조각이나 파편에서 시작하는 것, 이는 지상에서 지속되는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서간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나는 이는
거울에 비친 세상에서, 조각과 파편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을 예감합니다.

보잘것없는 남은 빵 조각이
주님께서 성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담아 친히 축복하신 구원의 양식을 반영하듯이, 조각나고 상처 받은 우리 각자의 삶은 주님께서 선사하신 충만한 구원을 비추어 줍니다. 남은 빵 조각이 광주리에 모였을 때, 그 빵 조각은 충만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공동체 안에서도
부서진 각자의 삶이 만나고 모일 때 우리의 삶은 주님의 생명을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구원 은총의 작지만 빛나는 표징임을 기억하고 확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성체성사를 닮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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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8월 3일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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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 음식 문화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상차림입니다.

밥과 반찬을 주로 하여 격식을 갖추어 내는 상차림은 상을 받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그 이름이 달랐습니다.

아랫사람에게는 밥상,
어른에게는 진지상,
임금에게는 수라상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먹는 사람 수에 따라서 혼자 먹는 밥상을 외상 또는 독상,
두 사람이 먹는 밥상은 겸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외상으로 차려진 반상에는 삼 첩, 오 첩, 칠 첩, 구 첩, 십이 첩이 있는데, 당연히 임금의 수라상에는 십이 첩이 올려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세상을 구원하실 임금이시니 십이 첩은 기본이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음식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가장 간결한 차림으로 평민이 먹었다는 삼 첩 반상보다 빈약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아낌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기적의 결과와 제자들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모두를 배불리 먹이실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풍성히 남았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 먹었고, 남은 것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가지고 있던 것을 기꺼이 내놓음은 물론 분배자로서도 봉사합니다.

임금의 생일로
십이 첩 수라상에 궁중 연회까지 더해진 헤로데의 잔치에서 세례자 요한이 죽으면서 그의 잘린 목이 쟁반에 담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한 밥상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배고픈 백성을 향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생명이 넘치는 풍성함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빵의 기적은
단순히 식사를 나누는 인간적 체험을 넘어 사랑을 실천하려는 하느님 백성의 희망과 연결됩니다. 제 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당신의 사랑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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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0년 8월 2일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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