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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비워지는 만큼 풍성하게 채워지는 것
조회수 | 1,662
작성일 | 08.08.0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말씀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오늘과 같은 내용이 요한복음 6장 1~14절에 실려 있는데, 요한복음 6장 전체는 예수님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표징에 관한 말씀이 6장 서두에 보도되고 있는 이유는 성체성사의 큰 의미로 일치와 나눔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나눔을 통해 성체성사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마음에 새겨보시길 바랍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맺고 있는 관계들을 통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결국 남의 도움 없이는 홀로 살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러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갖고 있는 재능이나 시간, 혹은 자신의 생활도 어려우면서 도움을 베푸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이기적인 세상에 따뜻하고 행복한 소식들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곳곳에서 실천되고 있기에 세상은 그리 삭막하거나, 어두운 곳이 아니라 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나눔의 실천 안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당신의 몸인 성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가 받아온 사랑을 세상에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나눔의 정신에서 비롯됨을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은 곧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나눔의 실천이 이기적이고, 부조리한 세상에 이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비워지는 만큼 풍성하게 채워지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래서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해 왔습니다. 이렇게 나눔을 통한 풍성한 마음과 기쁨은 우리를 지금보다 더 큰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5천명 이상을 먹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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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윤홍근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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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느님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은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는 하나의 커다란 꿈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배가 고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계속적인 불신과 그리고 역대 왕들의 썩은 정치 탓으로 나라는 피폐할 대로 피폐되었고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 차례로 멸망당하면서 나라와 백성은 허탈과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빌론에게 망한 뒤의 처참한 현실 앞에 백성들이 망연자실할 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때는 나라만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거의 모두도 바빌론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죽느니만도 못한 참혹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련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다 높으신 분의 뜻이 담겨져 있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멀리했을 때 과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던가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예언자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잔칫상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는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결코 인색하거나 째째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값싼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아주 귀한 것이면서도 돈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주시는데 그것도 후하게 넘치도록 주십니다. 옛날 광야에서의 만나도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자라지 않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남자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도록 그렇게 후하게 베푸셨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아주 계획적으로 오늘 사건을 만드셨습니다. 백성들을 이끄시고 일부러 먼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식사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도록 안배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뭣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그저 감탄스럽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조건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황송스럽 게도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상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극적으로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께서 누구시라는 것을 알리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이적이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배부른 것을 느낄 때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그들 앞에 등장하셨는지를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굶주린 배가 가득 채워진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셨지만 백성들의 현실적인 배를 채워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복음 에 보면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하자 예수님이 슬그머니 피하신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시는 그런 식의 메시아는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을 하실 때도 사탄으로부터 받은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또 썩어 없어질 양식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위대한 포부가 계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초대하신 잔칫상이 나 또는 광야에서 모자라지 않게 40년 동안 후하게 내려 주셨던 만나,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은 다 성체성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양식은 다 어떤 징표요 상징에 불과합니다. 오직 생명의 양식이 그 핵심이요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체의 그 진정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서가 지향하고 가르치는 빵과 잔치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성사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썩는 양식에만 치사하게 묶여 살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에 보다 관심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음식을 모셔야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음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잔칫상에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자격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돈 없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도록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모시면 세상을 다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내주지 못하고 베풀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나누고 베풀도록 합시다.

강길웅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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