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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수 그리스도의 나비효과
조회수 | 1,877
작성일 | 08.08.02
나비 효과.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우리의 아주 작은 행동 하나로 우리의 삶 전체가 뒤집어질 수 있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이 완전히 뒤집힌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선포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5. 3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단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제 이 작은 것들로부터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러자 그 수많은 사람들이 빵과 고기를 나누어 먹고도 열 두 광주리 가득히 음식이 남습니다.

오늘 복음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드리는 미사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봉헌예절이 끝나고 사제는 그 예물을 모아 예물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저희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밀떡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모든 신자와 함께 성체를 나누어 모십니다. 우리가 바친 밀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고, 주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주님과 하나되는 엄청난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비효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듯이, 밀떡과 포도주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주님을 만나서 정말 엄청난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을
우리 삶의 사소한 일로 지나쳐 버릴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실로 엄청난 은총이 숨어 있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변화시켜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 어떠한 것도 주님에게서 우리를 떨어뜨릴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 앞에
부족한 우리 자신을 느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가 주님을 만남으로써 주님 안에서 새롭게 달라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보잘 것 없는 우리 자신이라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날개짓을 통해 주님께서는 더 큰 바람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주님은 내 생명을 받쳐 주시는 분, 제가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오리다. 당신의 좋으신 이름을 찬송하오리다.” (시편 54,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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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남상범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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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못할 짓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도둑질 한 사람은 법정에서 정상참작을 받을 것이다. 3일 굶고 나면 도둑질 안 할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다. 눈이 뒤집힌다는 것이다. 아무리 금강산이 좋다해도 배가 쪼르륵 소리를 내면 구경도 시시해지고 귀찮아질 것이다.

그 옛날 훈련소에서 나와 훈련을 받던 사람 하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소위 짬밥통에 손을 넣고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서 입에 털어 넣고 씹다가 조교에게 걸렸다. 조교는 무자비하게 그의 ‘아구창’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는 피와 콩나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고 있었다. 지금도 콩나물만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먹을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나 배고팠으면 돼지나 먹는 음식찌꺼기 통에 손을 넣었겠는가! 지금은 군대가 자유배식이라니, 격세지감이다. 설움 중의 설움

설움 중의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다. 남들은 배불리 먹고 있는데 나의 배만 쪼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면, 더구나 내 자식들이 배고파서 울고 있다면 그 설움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수님은 배고픈 자의 설움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예수님은 매일 그 일을 위해서 여기저기 나다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쉬고 싶으셨다.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곳까지 찾아와서 애원하였다.

예수님은 팔을 걷은 채 하루종일 병자들을 낫게 하셨다. 해가 서산에 걸려서 이젠 집으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제자들은 걱정하면서 어서 돌려보내자고 예수님께 재촉하였다. 그들은 지쳐있었다.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지치는가 보다. 그래서 관공서나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종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지쳐있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어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좀 쉬면서 맛있는 음식과 대포 한잔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소망같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내다보고 계셨다.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계셨다. 그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품고 계셨다.

인간의 배고픔을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들려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을 것이다. 이분이 하루 종일 시달리시더니 맛이 좀 가셨나 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장정만도 5000명이라면 적어도 어린이와 부녀자를 합할 땐 만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외딴 곳에서 어떻게 빵을 구하여 먹일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다.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오라 하셨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수천명, 아니 만여명의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구세주로서 본때를 보여주셨다. 다시는 의심치 못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복음의 메시지

구약성서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빵이 많아진 기적이 나온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였다.(Ⅱ 열왕 4. 42―44 참조)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Ⅰ 열왕 17, 8―16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만 5000명을 먹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범상치 않음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배고픈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분은 우리 교회더러, 우리 각자에게, 먹을 것을 배고픈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것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작은 것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여주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북한의 동포들이 배고파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도 한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도 굶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나에게 주라.” 우리는 가난할 수도 있다. 우리가 동전 한 닢, 1000원 짜리 지폐를 들고 이것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정성을 가지고 큰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셨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배고픈 자를 가엾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귀찮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은 이 성서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영혼의 빵인 성체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로써 수많은 영혼들이 배부르게 되고 생기 넘치게 된다고 말한다.

최기산 주교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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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과 나눔의 존재

으앙…….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포근한 모태에서 바깥 세계로 나온 다음 이 차갑고 낯선 세상에 대하여 처음으로 나타내는 갓난아기의 반응이 울음이다.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는 이렇게 외치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절 좀 도와주세요.” 당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연약한 저에게 좀 나눠주세요. 그래야만 저는 살 수 있어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진실을 향해 부르짖는 외침인 것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처음부터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 아니 남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닌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도움을 받고 살기에 당연히 남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 남과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는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써 외면하고자 통밥 굴리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저절로 성장한 듯이 부모를 구박하는 사람, 자기 노력 하나만으로 부자가 된 듯이 가난한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국회의원이 된 듯이 떠벌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삭막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들에 의해서 동물적인 행태가 자주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타인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당연히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에게 얻어먹었으니 이제 내가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삭막한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하리라.

안규태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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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저는 오랜만에 방송 출연을 했습니다. 그것도 라디오가 아닌 TV 출연을 했답니다. 얼굴이 직접 나오기에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사람들이 실망할까봐), 그래도 가문의 영광이지요. 물론 제가 잘 나서 출연 제의가 들어온 것은 아니고요, 얼마 전에 출판된 책 덕분에 이렇게 출연을 하게 되었답니다.

사실 라디오도 그렇지만 텔레비전 출연을 할 때에도 예상 질문지를 미리 나눠줍니다. 이러 저러한 질문을 던질 테니 준비를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질문을 잘 보고서 어떻게 답변을 할지를 미리 생각합니다. 저 역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서 방송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방송 녹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MC가 질문지에 있는 질문만이 아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당황스러웠지요. 하지만 뻔한 질문이 아닌 새로운 질문으로 인해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더 재미있게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공개 수업이 있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전에 우리가 두 개의 화분 중에서 하나는 볕이 잘 드는 창문 옆에 두고, 또 하나는 검은 상자에 넣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 살펴봤죠?” 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큰 소리로 “네”라고 답변을 했지요.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그 두 개의 화분 중에서 어느 곳에 있는 식물이 더 잘 자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이제까지 본데로 ‘창문 옆’에 놓아둔 화분이 잘 자라난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식물이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글쎄 아이들은 아주 자신 있게 ‘창문이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이들이 ‘해’라고 말한다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지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으로 인해서 이렇게 강론의 예로도 쓰게 됩니다.

어쩌면 이 세상이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즉,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로 인해서 새로움과 재미를 느끼는 법이지요. 만약 모든 것이 다 뻔하다면 어떨까요? 재미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늘 당연한 결과만을 예측하고, 또 그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제자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제자들은 곧바로 반기를 들지요.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정을 하고 포기하는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찬미의 기도를 드린 뒤에 나누어 주니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지요.

불가능하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이 순간을 단정하고 절망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주님만 믿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우리들이 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큰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작은 정성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의 정성과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최선을 다하는 과정 안에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의탁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빠져서 포기, 절망, 죽음 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선택하기보다는, 주님과 함께하는 희망 안에서 참된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들도 일상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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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참으로 인간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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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참으로 신비스런 존재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상에 살면서 자기 생존의 본능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산다. 먹고 마셔야 살고 숨을 쉬어야 한다. 피는 의도하지 않아도 심장을 중심으로 몸속에서 순환하고, 우리가 자는 순간에도 폐를 통해서 산소가 공급된다. 인간은 이처럼 동물로서의 완벽한 기능을 하고 산다. 인간은 동물인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인간은 이러한 동물이면서도 한편으로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모든 동물이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배가 고프면 일단 먹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자기 보존의 법칙이건만 배가 고파도 굶주리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양식을 양보하는 이상한 동물이다.

오직 인간만은 이상하게도 배부른 돼지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을 깎는다. 삶의 의미를 찾고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 허무하게 여겨지는 윤리적 삶을 추구하고, 예술의 세계에 빠지기도 한다. 이 세상 너머의 것을 희망하기에 ‘장례식’이라는 동물계에 유례없는 세레머니를 한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이면서도 아주아주 특이한 동물임을, 동물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먹는 것을 찾아 나서고 배부르게 먹는 행위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먹는 것 앞에서 처음 보는 이웃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는 행위는 다른 동물들이 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것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말하자면 먹는 행위가 아니라 먹을 것을 포기하는 행위인 것이다.

오늘 1독서 말씀.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이사 55,2)

우리가 온통 작은 것에 집중하고 다른 동물들처럼 이 세상의 자기 생존에 집중할 때 주님께서는 참으로 인간적인 것에 시선을 돌리라 하신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미사 때 받아 모시는 성체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허기를 전혀 채울 수 없는 빵부스러기이지만, 인간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된다. 이러한 믿음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오 4,4)”.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동물과 다른, 참으로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하신다. 인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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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웅래 요셉 신부
2020년 8월 2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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