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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매일 빵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조회수 | 2,236
작성일 | 08.08.02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우리 시대에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 세계의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하는 생각과 함께 '정말 굶주리는 모든 사람이 사라질 수 있다!'에는 일말의 의문이 듭니다. 왜냐면 먹을 것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구조적 가난이 생겨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두고 여러 가지를 연구하다가 장소적인 측면으로 이러한 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킨 장소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거리로 왕복 백 리 되는 거리임이 밝혀졌는데 그 당시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은 한 끼 정도의 식사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사 시간이 됐는데도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혼자 먹을 수도 없고 나눠 먹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먹을 것을 내놓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마태 14,19) 나누기 시작하자 조그만 조각을 받아든 사람들이 하나 둘 슬그머니 자신의 것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나눠 먹기 시작했고, 내놓은 음식은 그 많은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즉, 나누고 함께할 줄 아는 공동체는 결코 모자라지 않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시대에 오셔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다시 한 번 일으키신다 해도 세계 각국에서 만연되고 있는 빈곤과 기아는 해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내일을 위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또 탐욕스러운 자들이 끝없이 움켜쥐고 이웃이야 굶든 말든 쌓아두기 경쟁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산더미 같은 빵이나 엄청난 재물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나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었지만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오천 명이 먹는 빵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우리 시대에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우선일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1998년 IMF가 시작 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한 신부님이 어느 조그만 본당에 새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신부님이 매주 목요일 저녁에 지역의 홀몸노인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딱 한 주를 하고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 떠난 것을 알게 됐지요. 새로 부임한 신부님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요일이 되자 150여 명이 넘는 노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알아보니 성당 마당 한쪽을 유료 주차장으로 내놓고 그 수익금으로 운영을 한다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습니다. 새로 온 신부는 성당을 어떻게 유료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고민하다가 유료 주차장을 다 없애고 과감하게 '사랑의 쌀통'과 '사랑의 헌금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한 끼 밥을 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 숟가락씩 쌀을 모으고 한 주일이 지나면 '사랑의 쌀통'에 넣으십시오.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만 덜 쓰고 1000원씩만이라도 모아서 '사랑의 헌금함'에 넣어주십시오."
 
이렇게 신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지요. 매 주 목요일마다 150명에서 200명까지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넉넉하지도 않은 작은 성당에서 그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 다 먹일 수 있겠느냐고 신자들의 걱정은 이만저만 커져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랑의 식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있었던 임기 내내 수많은 노인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드릴 수 있었지요.
 
여러분, 모두가 놀란 그 큰 은총을 체험한 신부가 바로 저입니다.
그 본당에 있을 때 저는 이렇게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사방 어디에서든 계속되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빵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 자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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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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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불리신 기적

오늘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5천 명이 훨씬 넘는 많은 백성들을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아름답고 흐뭇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몇 개의 빵으로 이를 불리시어 피곤하고 허기진 수많은 사람들을 곤경에서 완전히 구출하여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같은 두드러진 기적을 행하시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기적을 행하실 적마다 예수님은 우선 둘레의 사람들의 신앙을 전제조건으로 하셨습미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실 때에도 백부장의 신앙을 보셨고(루가 7,10) 12년동안 하혈하던 부인의 경우에도 <안심하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였소>라고 말씀하셨고(마태 9,20-22), 맹인 두 사람을 보게 하실 적에도 <예, 믿습니다. 선생님>하는 대답을 들으신 후에 <당신들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마태 9,27-31)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기적의 경우, 백성들의 믿음과 열성이 얼마나 지극하였던가를 살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전교하고 막 돌아온 제자들을 위로하고 휴식시키기 위하여 배를 같이 타시고 벳사이다라는 한적한 곳으로 향하여, 가시어 배에서 내리시자 이미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 20리나 되는 길을 뛰다시피하여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길이 멀건, 힘들 건 더구나 식사에 관해서도 조금도 관계치 않고 오직 예수님을 만나보려는 마음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두터운 믿음과 참된 신뢰를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렇게도 열성적으로 쫓아 온 것을 보시고 불쾌한 생각을 가지기는커녕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시어 그들을 측은히 여기자 예수님은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시고 용기를 잃은 사람들을 격려하시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시고 그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이 저물자 그들에게 줄 먹을 것까지 걱정하신 나머지 저 유명한 오천 명을 먹이신 대 기적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이 빵을 많게 하시어 또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신 것은, 앞으로 당신이 세우실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빵의 기적에 관해서는 복음사가 네 분이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서 특히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불리신 기적을 통하여 장차 세우실 성체성사 제정의 기반을 튼튼히 하시며 백성들이 성체성사의 현의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없었다면 성체성사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5,56-59)하고 성체성사를 세우실 적에 많은 제자들 중에는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불평을 털어놓았는데, 너구나 빵을 불리신 기적을 행하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성체성사의 도리를 알아들은 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적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일용할 양식이란 영원한 천상의 빵, 생명의 빵, 천상의 만나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상의 빵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기도문을 외울 적에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빵을 청하는 동시에 현세의 빵도 아울러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리들 및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며 나누어주신 빵도, 최후 만찬 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빵도 이 지상의 평범한 빵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음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음에 붙여진 예수님의 몸이었으며 천상의 빵이었습니다.

결론을 말씀 드린다면, 예수님께서 피로하고 허기진 5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이상으로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천상 양식인 성체 성사로 우리를 먹여 주시고 살찌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항로는 고해라고도 하는 힘들고 험준한 비탈길과도 같습니다. 자칫하면 힘없고 기운 빠지고 허기져서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의 길이 사막의 길과도 같아서 메마르고 굶주리고 고독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중도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천상의 생명의 빵을 주십니다. 또한 오아시스와 같은 생명의 물도 함께 주십니다.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천상의 음식인 성체를 자주 영하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튼튼히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김정진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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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가 배불리 먹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심을 굳혀주시기 위해 빵을 증가시키는 기적을 보여주신다. 사도들의 사명이 무엇이며, 수난의 의미와 그 무한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의 신비 안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의 복음은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는 군중들에 대한 염려로부터 제자들이 스승에게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이르신다.

사도들의 사명은 이기심을 떠나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임을 깨우쳐 주신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돌봐 주어야 한다고 시야를 넓히도록 일러주신다. 모든 사도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명의 일익을 담당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사도들을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어느 시대고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제자들은 자기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호소한다. “우리에게는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진정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또 인간이 가진 것은 너무나도 빈약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인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궁핍한 처지 하나를 완화시키지 못하는 한계성, 장정만 해도 5천명이 넘는 군중을 외딴 곳에서 어떻게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까지도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면, 하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랴. 아무리 다른 이들을 돕겠다는 의지가 있고, 또 책임을 느낀다 해도, 힘에 넘치는 일이며, 전혀 방안도 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힘(성령)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적을 행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기적의 행위를 위탁하신다. 빵을 나누어 준 사람들은 사도들이며, 남은 것을 거두어들인 것도 사도들이다. 주님은 이렇게 사람의 손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계속 기적을 행하신다. 사제의 손을 통한 성체의 빵은 전세계 어디서나 나뉘어지고 있으며, 각 강단에서는 말씀의 빵이 나뉘어지고 있다. 그리고 신도들의 손을 통해서 자선의 빵이 도처에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풍요로우신 분이시다. 따지거나 계산하시지 않고 풍요로히 주신다. 그 많은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그 생명을 풍성이 얻게코자 함이다”(요한 10,10).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분으로부터 풍요로이 받아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을 거절하면 인간은 항상 가난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고, 인간 세계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것은 무한하고 한계가 없으므로 아무리 가져도 끝이 없고, 누구나가 원하는 대로 풍요로히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만이 인간을 채울 수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그러나 하느님나라를 나눈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 또는 인간적인 물질로써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신앙의 신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럴지라도 인간은 자기가 가진 바, 최대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김몽은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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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빵, 그것은 곧 나

오늘의 복음 말씀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부르게 한 기적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무슨 마술사나 요술사의 괴상한 힘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이 미사 성제의 중심인 성체 성사의 신비를 위해 전표로 주신 한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전능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중요한 날들을 기념하고 더욱 뜻깊게 기억합니다. 생일이나 축일이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이 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기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날에 우리는 내복 한 벌이라든지, 또는 용돈 얼마라든지 또는 혼배시에는 결혼 반지 같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이러한 선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접촉하며 그들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접촉 또는 현존에는 물리적인 접촉과 정신적인 접촉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향과 집을 떠나 공부하거나 일하는 자녀들이 부모님들의 사진을 귀중히 간직하며 기억하는 현존은 바로 우리가 손으로 접촉할 수 있는 물리적 접촉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고 깊은 것임을 우리는 모두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접촉보다 더 강하고 고귀한 것은 하느님과의 접촉인 신앙적인 접촉입니다.

미사 중의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중동 지방에서의 식생활의 기본 요소입니다. 그것은 삶의 상징뿐 아니라 삶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취하면 그것이 완전히 소화되어 바로 우리 생명 자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바로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무슨 기념을 위해서 기억하는 기념물로서가 아니고 완전히 ‘너와 나’가 하나가 되는 표지로 성체 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예수님의 그 기적, 그 기적을 우리는 호기심으로 지금 바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그것이 기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나, 이웃과 나, 나와 교회 이러한 삼각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계기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보리빵의 기적은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2000년의 시간 차이를, 공간의 간격을 우리 모두 우리의 정신력 또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모두 보리빵의 기적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며 우리 모두 기적의 보리빵, 기적의 물고기가 되어야 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가족, 나와 이웃 그리고 우리와 하느님, 모두와 미사 중에 사랑으로 맺어지는 일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함세웅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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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 마태오 복음(14,13-21)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異蹟史話)이다. 네 복음서의 이적사화를 크게 둘로 나누면 사람을 구제하신 치유․구마 이적사화와 자연을 상대로 한 이적사화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자연 이적사화에 속한다. 특히 자연 이적사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전례(前例)가 구약성서에도 있다.

1. 구약성서의 빵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가장 비슷한 이야기는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이야기(1열왕 17,8-16)와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2열왕 4,42-44)이다. 엘리사의 이적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떡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그것을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어떻게 이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야훼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과연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2. 신약성서에서의 빵 기적

따라서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인즉, 엘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예수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빵 스무 개로 고작 백 명을 먹였지만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무려 오천 명을 먹이셨다. 아무리 엘리사가 능력있고 위대한 예언자라 해도 어찌 주님이신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시고 구원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이다.

3. 기적에 담긴 의미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는 성만찬례(聖晩餐禮), 곧 미사의 풍요함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 14,19)는 말씀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 마르 14,22; 루가 22,19; 1고린 11,23)과 흡사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되새기며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에 성만찬례를 지내던 초대교회 교우들은 틀림없이 성만찬례 때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을 밝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 성만찬의 의미와 아름다움은 ‘나눔’에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을 것을 배고픈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을 것이다. 양식이 적어 부족할 것 같지만 나누어 주니까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아름다운 뜻이 오늘 이적사화에 담겨있다.

서울대교구 주보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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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만남’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다소 내용이 애매하지만 어쨌든 너와 나의 만남이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랑을 노래하기에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채울 정도로 남았다는 이야기는 ‘나눔’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기적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 교 교우들이 자기가 가진 재물을 주님처럼 나눌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잘살 수 있다는 예화로 이 이야기가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물론 주님은 이 기적을 통해 ‘나눔’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께서 ‘나눔’의 기적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만남’의 소중함을 더욱더 강조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많은 군중이 모이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시는데 제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변명합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나눌 수 없는 이유’의 보편적인 세 가지 변명입니다.

그것은 ‘외딴 곳’이라는 공간적 변명과
‘시간이 늦었다’는 시간적 변명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는 소유적 변명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변명은
오늘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것이 불가능함을 변명하는 우리들의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옵니다.
“난 시간이 없어”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구”
“나누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

주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시간적․공간적․소유적 변명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주님은 ‘나눔’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남’의 절대성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오천 명의 군중을
하나의 군중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셨으며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을 절대적인 만남으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그러나 그 나눔이 참사랑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나눔’의 행위보다 먼저 ‘만남’의 행위에
더 운명적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또한 나와 주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주님과 나는 함께 영원을 태우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해 너를 사랑해’라는 노래말은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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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작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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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이를 먹이시는 사랑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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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호레라는
아일랜드 태생의 여인은, <고아들의 어머니>라 불린다.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열병으로 부모를 여의고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다행히 나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작은 호텔에서 빨래를 하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결심을 했다.

“고아원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
돈은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도울 일이 있을거야,
이것이 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인 것 같아‥‥”

그녀는 작은 고아원을 찾아갔는데,
어려운 사정을 보고,
불쌍한 고아들을 도울 궁리를 하게된다.

드디어 그녀는 젖소 두 마리를 사서
우유를 짜서 팔아 고아원을 도왔다.
우유가 잘 팔려 젖소 한 마리를 더 사고,
빵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장사가 굉장히 잘되어 큰 이윤을 남겼다.
마가헷은 돈을 많이 벌어도,
항상 자신은 누더기 옷을 입고 열심히 일을 했다.
자신이 번 돈을 항상 고아들을 위해 사용했다.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를「고아들의 어머니」로 존경받게 했던 것이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의 사랑스런 마음을 기리며 “뉴 올린즈”에 초라한 옷차림을 한 그녀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그녀가 엄청난 사랑의 기적을 이룰 수 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고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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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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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다.
오늘 군중을 배불리 먹여주시는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인간의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도 해결해 주신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성체성사와 말씀의 신비 안에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의 근처로 큰 군중이 몰려든다. 예수님은 배고파하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시고자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우리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은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우리는 늘 이런 실수를 한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만 무언가를 하려는 습관에 빠져있을 때가 많다.

주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태도이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요!”라고 겸손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빵의 기적은
어떤 아이가 갖고 있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즉, 기적을 하찮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손에 얹어졌을 때, 주님을 통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비록 내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나의 능력과 시간과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이 쓰시도록 했을 때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능력과 결과로 바꾸어 주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먹고 난 후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모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스러기를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낭비를 해서는 안된다.

또한 작은 정성과 힘을 모아도 큰 결과가 나온다.
그 남은 열 두 광주리의 빵은 또 다른 배고픈 사람들의 몫이 된다. 우리는 쪼들리지 않고 돈이 넉넉하다고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큰 죄악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낭비하는 시간과 돈이 다른 이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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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기적은 사랑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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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빵의 기적을 이루는 계기는,
배고픈 군중들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물론 측은한 마음은 동정심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진정한 삶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시려고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다. 빵의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을 보여주셨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과 영혼이 배고픈 이들이 많다.
정신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영혼의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그들과 사랑과 관심을 나눌 때,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처럼 사랑의 빵의 기적을 이루게된다. 우리 공동체,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이 항상 배고픔이 없는 공동체와 가족이 되도록 서로 나누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랑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사랑의 신비를 몸소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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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 07.27
459 92.4%
[서울] 빵의 기적, 영원한 생명에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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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굶주리고 가엾은 군중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는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리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체험을 떠올리게도 하며, 또한 종말에 있을 영원한 천상 잔치의 예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찬례’의 예표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동작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제자들에게 주시니’.

이 표현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만찬에서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 사용하시는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빵의 기적 이야기가 성찬례의 예표로 드러나게 해 줍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복음을
1독서, 2독서와 연결해서 읽어보면, 특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초대(1독서)에로 초점이 맞추어지며, 그 영원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2독서 ;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오늘 1독서(이사야 55장)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이사야 55장은 소위 ‘제2 이사야서’의 끝부분으로서
바빌론 유배 말기에 쓰여진 부분입니다. 유배라는 쓰디쓴 역경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계약’에로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너희가 살리라.’) 에로 초대하십니다. 어찌 보면, 세상살이의 고단한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결국은 다 지나가고 말,
썩고 마는 세상 것들, “양식도 못 되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세상 것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좋은 것”, “기름진 음식” 곧 ‘영원한 구원’을 구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지나가고 말 세상적인 가치들에 어리석게도 연연하고 있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의 2독서는
우리가 현재 통과하고 있는여러 난관들과 역경들이 쓰리고 힘들지라도,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수 없”을 만큼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이 늘 우리와 함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이 오늘도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오늘도 당신의 성체로 우리를 배불리시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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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
2020년 8월 2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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