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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9주일 독서와 복음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조회수 | 1,931
작성일 | 08.08.07
열왕기 상권 19,9ㄱ.11-13ㄱ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그 무렵
9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11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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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난다.
그분께서는 폭풍 속에 계시지 않았다.
지진과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고요 속에서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두려운 분이 아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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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9,1-5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형제 여러분,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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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바오로 사도는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
그들의 회개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어서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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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14,22-33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2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말하였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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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아무나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주님의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다.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다.
예수님께서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두려워 떨었다.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였던 것이다.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불가능한 일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한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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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산 호렙 동굴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그는 강한 바람과 지진, 불길이 지난 다음에야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들어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는 엘리야는 부드러운 미풍과 같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찬 바람에 맞서 배를 몰고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신적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동포인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몰라보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영광을 받았음에도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을 믿게 할 요란한 표징과 기적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역경 중에 헤맬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존재 자체이신 그분께서는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침묵 중에 믿고 기다릴 때,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잔잔한 미풍처럼 그분께서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실존을 감싸 안고 위로해 주십니다.

▦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미사 2017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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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어린이 빼고 남자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그 자리에 모여든 모든 사람을 흥분시키고도 남았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기적을 보고 그분이 특별한 분이심을 직감했을 것이고, 자칫 분위기에 휩쓸려 들뜬 군중과 무슨 일을 저질러도 저질렀을 법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예수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떠나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22절) 예수님은 배불리 잘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무모하게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 군중의 가벼운 심리를 잘 파악하셨습니다. 위험한 유혹입니다. 백성들한테는 먹고 즐기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의 유혹이, 예수님께는 양식만 대주는 메시아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두르고 재촉하십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23절) 군중을 다 보내시고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홀로 기도하십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워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방금 떠나간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제자들을 위해,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일이 예수님께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기에 권력을 잡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셨을 겁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극복하고 온 인류가 자유와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앞으로 남은 여정을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제자들은 바다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으로 예수님 없이 그들만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먼저 가 있게 하신 곳은 겐네사렛 호수 ‘건너편’으로(22절) 이방인의 땅입니다.

늦은 시간에 보호자도 없이 가게 된 곳이 하필 낯선 곳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배불리 먹었던 풍성한 잔치를 다른 민족과도 공평하게 나누어야 함을, 그들 역시 당신 공동체에 속함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24절) 다른 고장에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이 순탄치 않을 듯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25절) 물 위를 걷는 일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9,8)이라고. 죽음을 상징하는 물 위를 걷는 것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가리키며, 죽음을 극복하는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 고유의 것입니다.

파도에 시달리던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혼비백산합니다. 하느님 체험이 늘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두려울 정도로 놀랍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제자들의 운명은 바뀝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ㄴ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가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시고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분이십니다. 신뢰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자 가장 먼저 용기를 냅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ㄴ절)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29절) 배를 타야만 물을 건널 수 있다는 자신이 만든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볼 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30ㄱ절) 거센 바람을 본 베드로는 곧바로 물에 빠져듭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집중하는 것만이 불안한 현실과 위기에서 우리를 구하는 길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30ㄴ절) 베드로의 기도는 신심 깊은 유다인들의 기도와 닮았습니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목까지 물이 들어찼습니다.”(시편 69,2)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십니다(31절).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 그분을 믿기는 하지만 믿음의 정도가 약합니다.

약한 믿음으로는 역풍에 견딜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에 대한 전적인 신뢰,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즉시 그쳤습니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32절)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실 때 주변의 소용돌이는 잠잠해지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바람은 멎고 불안은 사라지며 마음은 평온해집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삶의 한밤중, 폭풍우의 한복판에 서더라도, 불안정한 상황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체험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목격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3절) 제자들은 이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요동치는 세상이라는 파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물러간 뒤엔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고 고백하는 참용기가 생깁니다.

소란스럽고 복잡다단한 삶에서 중심을 잡고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한 번씩 몰아치는 폭풍우 앞에서는 더더욱 속수무책입니다. 두렵고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두터운 신뢰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거센 바람에 맞설 용기를 줍니다.

바다도 믿음 강한 이를 떠받칠 정도이니 물속에 빠질 리가 없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몰두합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우리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배에 타셨습니다.

▦ 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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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힘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는 가톨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입니다. 단순하고 천진한 신앙,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겸손 등으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불렸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흔을 손에 받았던 이 성인이 노래하라고 하면 새들도 노래했다고 합니다. 클라라(1194-1254)는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동하여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녀가 되었던 성인입니다. 두 사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영적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여 말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클라라를 멀리 보내기로 했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데 클라라를 배웅 나간 프란치스코는 말없이 눈에 덮여가는 길만 바라보았습니다. 클라라는 작별인사를 하고 눈길을 가다 갑자기 돌아서서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 산의 눈이 녹고 꽃이 필 때쯤이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라고 프란치스코가 대답하자마자 갑자기 눈이 녹고 산마다 꽃이 피었습니다.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가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물 위로 걸어서 오신 예수님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많은 환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지만 자신이 직접 기적의 주체가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밤중에 역풍을 만나 파도가 치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이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물 위를 걸어오셨을까요. 제자들에게 초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려 하신 것뿐입니다. 새벽 4시였으므로 배도 없었고 제자들에게 건너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 위를 걷는 기적뿐이었습니다.

클라라를 사랑하는 프란치스코의 마음이 한순간에 눈을 녹게 하고 꽃을 피우는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제자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흉내내다 물에 빠진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제자를 사랑하여 물 위를 달려오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눈덮인 산봉우리에서 갑자기 눈이 녹고 단숨에 꽃들은 피어나 그대와 나는 헤어지는 일 없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최인호 베드로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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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우주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매일매일의 작은 일에도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특별히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나의 충실성과 나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작은 일을 통해서이다. 나의 일상적 노동, 가정,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우정의 행위, 기쁨뿐 아니라 고통, 병, 괴로움, 걱정, 심지어는 죄에 있어서까지도 나의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느님은 매일매일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 계시는 하느님이지 어떤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렇게 드물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은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벌이나 요구나 원의 또는 우리의 불만족과는 무관한 방관자가 되시기가 더 쉽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들어오시는 일은 오직 우리가 그분 안에 들어가고 마치 엘리야가 그랬듯이 그분을 간절히 청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분과의 사랑과 우정의 교차가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께서 놀랍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주시는 가까운 친구인 하느님은 우주적 사건들과 크나큰 역사적 사실들의 지배자로서의 권세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배제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역풍을 만나 배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하고 있다.

첫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 후 즉시 예수는 또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그동안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 주심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여기서는 교회론적 강조점이 맹백히 드러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혼자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시는 모범적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 그리고 특히 교회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말해줌과 함께 “용기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이 메시지는 오늘날의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메시지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미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질서상의 갖가지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고 있다. 사회는 비탄에 차서 교회에 문제 해결을 요청하고 있다. 교회는 문제 자체의 거대함과 지체할 수 없는 다급함 때문에 마치 그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휘말려 쓸려 가버릴 듯한 느낌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 누구일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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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교회론과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풍랑은 현실의 시련이며, 배는 교회를 뜻하고 베드로는 길잡이입니다. 교회는 현실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함께 계시고 보호사시며 기도를 바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론 많은 경우에 의심과 회의를 품게 됩니다.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는 베드로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믿음 약한 우리의 필연적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으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 우리 삶의 전체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청과 기도 속에서 실제로 우리의 소원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단계 진전한 우리의 기도는 감사한 마음을 지닌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며 우리는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의 기적은 바로 그의 신적 능력과 초월성, 그리고 하느님의 현현을 드러내는 표지인 것입니다. 불은 구원의 표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서움의 상징으로 죽음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홍수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셨다는 것은 온갖 죽음, 무서움, 공포를 제거시키시고 이기셨다는 그 초월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 자연을 순응케 하시는 예수의 능력은 바로 하느님을 보여주는 구체적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모진 풍랑과 시련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십사 간청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예수님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케 하소서. 동족애, 형제애를 통하여 당신의 성실한 제자 되게 하소서, 모든 여러움을 극복케 하소서. 아멘.

▦ 도대체 이 분은 누구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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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믿음이 약해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산더러 저기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되고, 바다더러 땅이 되라고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믿음보다도 불신이 앞을 맏아 자칫 믿음이 흐트러지고 사도 베드로처럼 되는 수가 허다합니다.

어떤 마음에 소위 전문가라 하는 등산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 몇명과 함께 쌀쌀한 날씨에 등산을 갔었다고 합니다. 날이 저물자 다른 친구들은 모두 산에서 내려왔지만 산을 잘 타는 이 친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어두워진 다음에 혼자서 산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깜깜한 가운데 밧줄을 타고 절벽을 내려오던 이 친구가 그만 발을 헛딛어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밤이 어두워 밑고 보이지 않고 구조를 청할 사람도 보이지 않기에 이 친구는 그만 눈앞이 깜깜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 하나 오는 사람 없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이 친구는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절망적인 순간에서는 진정한 기도가 나오게 마련이지요. 얼마나 지났을까 이 친구는 문득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로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하느님께선 내리시는 말씀이었지요.

“형제야 너는 나를 믿느냐?”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 친구는 있는 힘을 다하여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물론이지요, 저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이 대답에 또다시 같은 질문이 하늘에서 들려 왔고 이 친구는 역시 큰 소리로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번 물음과 답이 있은 다음에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형제여 네가 나를 그토록 믿으니 이제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그 줄에서 손을 놓아라” 이 소리를 들은 그 친구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밑이 얼마인지 보이지 않는데 나의 생명과도 같은 이 줄을 놓으라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였지만 마지막 말에서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 친구는 줄을 꼭 붙들고 매달려 있다가 그만 추위에 얼어죽고 말았답니다.

다음날 궁금하여 산에와 본 친구들은 불과 일미터도 되지 않는 높이의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은 친구를 보고는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친구는 그 절벽을 거의 내려와서 발을 헛딛었으며 주님의 말을 믿고 졸을 놓았으면 살 수 있었건만 줄을 놓치면 죽는다는 관념에 그만 졸을 놓지 못하고 절벽에 매달려 얼어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믿는다는 것과 그것을 행한다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도 바로 이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순종의 표양이신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크게 작게 내게 닥칠 양이면 우리는 의혹을 갖거나 시련 등으로 저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불찰로 그분께 의혹을 갖고 그분을 배반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고 탓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주님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다시금 고백하고 그분께 의심을 버리고 따르도록 합시다. 바로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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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도 그리스도께서 놀랍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능과 자비의 두 관점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주시는 가까운 친구인 하느님은 우주적 사건들과 크나큰 역사적 사실들의 지배자로서의 권세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사도들이 ‘역풍’을 만나 배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거기에다 자기 자신의 고유 사료 즉 스승을 따라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하는 베드로의 요청을 덧붙입니다.

첫 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 후 즉시 예수는 또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그동안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는 마태오의 이야기와 마르코의 이야기가 일치한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마태오에 있어서는 배가 “풍랑에 흔들리고 있었고” 마르코에 있어서는 제자들이 “배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유별난 점이 바로 그 사건의 “교회론적” 차원을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두 가지 극단적 대립의 현실을 드러내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 보는 것입니다. 한편에서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러 혼자 산에 오르시고 다른 한편에서는 폭풍우에 압도된 제자들이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후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야 멈추게 됩니다. 인간들의 행위는 만일 하느님의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현존은 특히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혼자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시는 모범적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 드리고 특히 교회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마태오는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베드로의 엉뚱한 요구를 이 이야기에 덕붙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를 걸어 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특별한 내용으로써 마태오가 전체 이야기에 부여하고자 했던 ‘교회론적’ 강조점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우기, 마태오 복음사가가 무엇보다도 이 대목에서 자기의 교회론적 관심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그 누구보다도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 보고자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덜어오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그의 신앙은 처음에 열정에 찼던 만큼 강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그러시다면’ 이라는 조건이 깊은 믿음의 감정보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가정을 더 생각케 합니다. 어쨌든 사실상 믿음이 있었다 하더라고 그 믿음은 거센 바람이 불자 곧 사라져버렸습니다. 신뢰감과 두려움이 혼합되어 있는 미묘한 상태가 그가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그를 대해주셨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보다 철저한 믿음을 가졌더라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났을 것입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베드로는 불과 수초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극도의 의심으로 인한 두려움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심리학적으로도 이해 될 수는 있겠지만 분명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모습을 이루어주지는 못한 것입니다.

▦ 언제나 이웃에 도움을 받고 삽니다.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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