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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진정한 믿음의 기도
조회수 | 1,997
작성일 | 08.08.08
어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할지, 잘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어느 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몇 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강물은 다 말라버렸고, 농작물은 다 말라 죽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가뭄해소를 위한 특별 기도회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도시 사람들이 한 광장에 모여서 기도회를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주일간 기도회를 열었는데, 마지막 일곱째 날 기도회 도중에 드디어 구름이 모이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했고, 흠뻑 비를 맞으며 좋아했습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지자,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집으로 바삐 비를 피해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할머니 한 분만이 광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를 흠뻑 맞다가, 조용히 손가방을 열었습니다. 작은 우산 하나를 꺼내서 펼치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거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비가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우산도 준비하지 않았단 말인가?” 할머니만이 하느님이 비를 내려 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요즘 우리 사회를 ‘믿음이 필요한 시대’라고 얘기합니다. 작은 먹거리에서부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어떤 물건도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말 공화국, 뇌물과 비리 공화국, 대충 대충, 빨리 빨리 문화. 참으로 아쉬운 현실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온전히 믿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없다면 도대체 사는 맛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믿음이 실종된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을 상실한 신앙인이 아닌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믿음이 없다면 지금 주님 앞에 앉아 있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성질 급한 베드로는 자기도 물 위를 걸어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 위를 조금 걸어갔는데, 그만 거센 바람을 보고는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서, 물 속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 살려 주십시오’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의 믿음도 이 모양이었습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인간적인 모습이기에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조금 부족했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지고 어렵지만 살고 있고, 또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물론 가끔 세상의 유혹과 고통 속에서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의 두 번째 모습은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외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시리라는 믿음이지요. 우리 믿음이 뭐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어려움도 또 신앙의 위기, 세상의 위기가 닥쳤올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베드로처럼,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손을 놓지 않는 한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춘수 이냐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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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에서 구하시는 나의 주님!!!

미국의 어느 부둣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정기 여객선이 도착해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도중 한 여자가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고함을 치면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선원들은 이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무책임한 선원들이 어디 있느냐며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여자가 두 번이나 물속에 떠올랐다 잠겼는데도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것을 알고서야 한 선원이 비호같이 다이빙을 해서 축 늘어진 그 여자를 구해서 올라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왜 처음부터 빨리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그 선원을 나무랬다. 이에 그 선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모르시는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물에 빠져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쓸 때는 어느 장사가 구하러 들어간다고 해도 빠진 사람의 힘에 눌려 같이 빠져 죽게 됩니다. 그래서 기다린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원리도 이와 비슷합니다. 역경 가운데 사는 비결은 나를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이 심한 파도에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살리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물은 언제나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얼마 전 TV에서 생생하게 보도되었던 일본 동부의 해안가를 초토화 시킨 쓰나미의 위력을 어제 일처럼 기억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마철인 지금 강마다 홍수로 인한 피해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케 합니다. 더구나 등 뒤에 안동댐, 임하댐을 두고 도시 한가운데 낙동강이 흐르는 안동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비만 오면 쪽배에서 불안과 초조 가운데 있었던 제자처럼 좌불안석입니다. 4대강 개발아래 중장비들이 6.25때 이북에서 내려온 소련제 전차처럼 온 강둑과 도로를 대형트럭들이 먼지를 뿜어대며 달리는 모습에 연막탄을 내뿜으며 달려드는 탱크를 느낀다면 안동 촌사람인 우리의 겁먹은 소시민의 외마디만은 아닐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인류의 범죄를 물로 심판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노아의 홍수’라는 하느님의 심판은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가게 합니다. 인간의 죄가 인간을 멸망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허지만 성서말씀을 깊이 묵상하노라면 정말 물이 하느님께서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심판이시라면 왜 노아와 가족, 그리고 각 쌍의 피조물을 살리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으로 육화하신 예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으로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물로 인류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멸망하는 인간을 노아라는 의인을 살리시고 그를 통해 새 세상을 마련해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때때로 엄한 심판처럼 느껴지는 우리 자신의 고통과 불행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랑의 매입니다. 더 큰 잘못과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고통과 고난을 허락하심으로써 인간이 누리는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인생의 끝자락이 보일 때 진실의 눈을 뜨게 하시고 하느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인간을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폭풍우속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시는 장면은 홍수에서 노아와 가족들을 구하시는 하느님, 자연을 지배하시고 인간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물로 인간을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아니시고 역경과 고난에 지친 인류를 자비와 용서로 구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삶에 지친 우리를 언제나 우리 가까이 계시며 가장 필요로 할 때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잡아 주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에로 초대하십니다. ‘주님, 폭풍우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듯 우리도 주님을 뵙는 은혜를 허락하소서.’아멘!

이상복 비오 신부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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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느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은 군에서 저와 함께 하였던 동기생이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순간 30년이라는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었지요. 대화중에 가정 먼저 떠오른 기억은 고통의 순간들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인격 모독은 우리 모두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 못된 고참병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고 저 역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그 때 마다 저의 삶을 지탱하게 한 것은 바로 부모 형제와 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들이 슬퍼할 상상으로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기억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경험과 생각이 제 삶의 근본이었습니다. 지금도 가장 황당한 꿈은 군에 입대하는 것이며, 가장 기쁜 꿈은 휴가 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고통과 기쁨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죽음의 공포에 삶을 포기하기로 작정합니다. 공포와 위험 속에서 천사를 만나고 난 후, 살기 위하여 40일 동안 척박한 사막을 걸어 호렙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조용하고 부드러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서 생명의 약속을 받습니다. 다시금 삶의 희망을 이어갑니다.

제가 페루에서 선교사로 살았던 2003~2005년은 너무나 힘들어 정말 도중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페루의 서해 바다를 보면서 쭉 가면 한국인데, ‘내일 비행기 표를 구입해서 한국으로 돌아갈까?’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첫 휴가 때 까지 기다려 보자, 군 생활도 견디었는데 참아보자, 이런 곳에 가족들과 이민 와서 전쟁을 치르듯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을 보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 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흔들리는 마음에서 가장 크게 와 닿았던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 32)라는 구절입니다. 아니 이는 하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의심을 버리고 다시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인성도 부족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 멋진 성직자라는 착각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어린이가 되어야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배워야한다는 상황을 직시한 것입니다. 욕심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함께 살아가기를 배웠습니다. 그 배움의 근본은 바로 겸손이었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랭클린 킹이라는 농업학자는 〈4,000년을 이겨낸 농부들 –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영구적 농법〉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농토는 매우 협소한데, 4,000년 동안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는 비밀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답은 영양분을 재활용하는 순환이었습니다. 킹의 영향을 받았고 ‘유기농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버트 하워드 박사는 ‘만약에 당신이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숲을 공부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연을 통하여 삶과 성장, 그리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인위적인 가식을 첨가하거나 외적인 현상에 집중한다면 진실의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며 허상에서 진리를 찾게 된다는 것 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게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디서 무슨 이상 현상이 나타났거나 누군가의 병이 치유되었다고 하면 만사를 제켜놓고 달려가는 우리들의 행동을 반성하게 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고 맹세를 하였지만 교만 때문에 주어진 상황을 곡해하고 대화를 거르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그릇된 신앙인이 되기도 합니다. 고요함과 깊은 하느님과의 대화로 새로운 삶을 활기차게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일 미사가 끝나면 주변의 원로 신부님을 찾아뵙고 저녁을 함께 해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조화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어떻게 욕심과 갈등을 극복하고 살아오셨는지 삶의 지혜를 배워야겠습니다. 아멘.

▦ 안동교구 박재식 토마스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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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용기를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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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체험’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느님 체험이라 할 때, 평범한 사람들은 겪지못할 어떤 기이한 체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지난 주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등장했던 구약시대 최고의 예언자 엘리야 이야기가 오늘 독서에등장합니다. 바알 예언자를 사백 오십명과 대결하여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증언했던 엘리야도 바위를 핥퀴는 거센 바람이나, 세상을 뒤흔드는 지진이나, 불타오르는 불 속이 아니라 고요한 중에 들려오는 ‘말씀’에서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 역시 밤새 불어오는 거센 맞바람과 배가 뒤집힐 듯 일렁이는 거센 파도가 아니라, 물위를 걸어오시어 조용히 건네시는 그 말씀으로 주님을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밤새 고요히기도하시다가, 밤새 바람과 파도에 짓눌려 두려움에떨던 제자들에게 고요히 먼저 다가가십니다. 마치 새벽에 떠오르는 햇살과 같은 따스함으로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세파에 시달리며 주님마저도 잊어버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그 순간에도 나오지 않았던 고백이, 절망적인 순간에서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시며 하신 이말씀을 통해 나옵니다. 그 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먼저 찾아오셔서 고요하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우리를 억압하고 두렵게 하는 어려움 때문에 주님을잊고 있는 순간이라도, 예수님께서는 사나운 물 위를걸어오시듯,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말씀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체험하고 또 용기를 길러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대단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 친히 먼저 다가와 말씀을 건네신다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 중에, 새벽 어스름의따스한 빛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밤새 폭풍과 파도 속에서 고생하고 새벽에 떠오르는태양 빛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온갖 어두움과 어려움을 물 위를 걸어오시듯 말씀을 건네십니다.

매순간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왜 나를 버려두시냐고 느껴질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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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박철현 가브리엘 신부
2020년 8월 9일 ‘안동교구 주보’에서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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