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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믿음과 의심과 회심
조회수 | 2,014
작성일 | 08.08.08
어렸을 때 부모님은 내 존재의 모두였습니다. 그리고 사춘기를 지내며 부모님께 반항을 하며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뵈며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죄송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신앙을 물려주신 부모님이 감사하고 부모님께 대한 부족한 믿음이 죄송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갚을 길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어렸을 때는 그저 부모님께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춘기 때에는 부모님께서 가르쳐 준 하느님을 부모님께 거역하듯이 하느님을 외면했고 반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감사하는 마음, 죄송스러운 마음 그리고 부족한 저의 모습 등이 교차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에서도 짧은 시간이지만 같은 모습을 봅니다. 파도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순박한 믿음을 가지고 물 위로 뛰어 드는 베드로 사도의 믿음은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일 것이고 곧 이어 의심을 하며 물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시 예수님의 손을 잡고 배 위로 올라 온 후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도 긴 인생 안에서부터 짧은 사건들 속에까지 이런 ‘믿음과 의심과 회심’의 삶이 반복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의 간절한 고백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 33)라는 고백의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12개의 고개를 넘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탄한 길만을 걷고 싶은 것은 사람의 욕심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삶의 많은 고개를 넘으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갑니다.
정상에 올라섰을 때에 교만하지 말고 깊은 계곡에 빠졌을 때 절망하지 말고 앞으로도 수많은 고개를 넘어야함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있을 때 더욱 겸손하고 의심과 회의에 빠져 신앙 생활이 어려울 때 새로운 희망을 생각하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바로 오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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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홍승권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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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어느 모임에서 지난 세월 많은 어려움을 인내로써 극복한 자매님의 삶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용기를 잃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신앙고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금방 덮칠 것 같은 폭풍우나 불길처럼 위협적인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실낱같이 가냘픈 우리 교우 자매의 삶 가운데에 드러내십니다.(1열왕11-13참조) 힘겹게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의 우리 교우들의 삶이 대부분 그러하겠지요.

인생길을 배의 항해로 비유하곤 합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에는 숱한 시련과 역경이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의 호수를 건너는 짧은 여정에서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역경도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마태14,27) 인생여정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용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용기는 삶을 지탱시켜 줍니다. 용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에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어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먼저 역경 중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당황하거나 미리 겁을 집어 먹으면 우리 곁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도 놀라 자빠집니다.(마태14,26) 그분의 말씀에 힘입어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물위에 올라섰고 걷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한순간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만간에 연거푸 밀려오는 세파(풍랑)에 그저 속수무책이 되곤 합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사람이 되어 화살기도보다 더 빠른 SOS기도를 날리게 되겠지요. 상황이 진정이 된 다음 우리는 머쓱해져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지 않을까요. “주님! 저는 약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당신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내겠으니 도와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14,27) 당신 외에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사도가 바로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그리스도를 두려워했고 세상 어떤 권세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동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 저주를 받아도 개의치 않겠다고 고백합니다.(로마9,3) 일순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에는 동족 모두를 자신이 체험한 활달한 자유의 경지에 초대하고 싶은 염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구원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에게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만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모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합시다. 그럼 그 밖의,여타의 것에서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서춘배 아오스딩 신부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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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용기를 내라. 나다.

한 갓난아이가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버려졌습니다. 배고픔과 외로움에 울부짖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그 마을에 퍼졌고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버려진 아기를 보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이쿠, 누가 저런 갓난아기를 이런 길가에 버렸어?”, “불쌍해라.”, “어떡하죠?”, “아이 부모를 찾을 수 없는 건가요?”.

아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냅니다. 고아원 시설이 있는 중심지까지도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이 갓난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그렇다고 마을에서 젖동냥을 하며 이 갓난아이를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군가는 키워야하는 상황인데 선뜻 나서서 자신이 이 아기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로 눈치만을 바라 보고 있었죠. 마을에서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무언의 눈치를 줘봤지만 다들 딴청 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 무렵 한 구석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키울께요.” 일제히 사람들이 눈을 돌렸습니다. 말을 꺼낸 사람은 그 마을의 미혼모였습니다. 그녀는 홀로 이미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마을에서 삯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던 가난한 미혼모였습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갓난아기가 가난한 미혼모의 보살핌으로 나중에 커서 위대한 위인이나 사업가가 되었다’는 등의 드라마와 같은 감동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볼 수 있는 볼리비아에 있으면서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처럼 소외받고 힘없는 이들에게 공감하고 다가가는 사람들은 그 역시 사회에서 소외받고 힘없는 약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죠.

최근 작고하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께서도 평생 외면당하고 모멸 받으신 삶을 마감하시면서 당신이 가지셨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미담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지요. 동시에 저 위쪽에서는 자기 밥그릇 싸움 이야기들만이 들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인간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까지 합니다. 그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기적의 한가운데로 초대하십니다. 그 기적 은 주님이신 예수님만의 권한이 아닌 우리의 역할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오너라.”(마태 14,29)

이것저것 계산하고 생각하고 따져보지 말고 주님 자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닌 제 자로서 기적의 주체자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오너라”.

기적이란 로또에 당첨이 되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짝사랑만 하던 이가 용기를 내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기적이고, 부모가 사춘기 자녀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기적이고, 가족이 함께 모여 화내 지 않고 밥한끼 먹는 것이 기적이고, 소외받은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함께 공감해주는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기적의 시작은 공감과 용기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어마어마한 기적에 우리들을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하지마라.”(마태 14,27), “오너라.”(마태 14,29)

▦ 의정부교구 전형석 루카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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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두려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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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 새천년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은 사람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시며 강조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Non avete paura!). 이 말씀은 2천 년 전이나 세기말이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복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현시점에 당면한 많은 복잡한 문제를 힘들어하며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움을 크든 작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에서부터 지역 사회를 비롯하여 국가와 민족의 운명까지 염려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려움을 갖지 말라고 환기해 주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우선 첫째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그분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오직 하느님만 계셨습니다.

둘째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사라져가며 지나가는 것으로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허락하시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진정 깨닫고 인식해야 할 바를 제대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어리석음)를 범하게 됩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에 두려워하여 관심과 에너지를 낭비하면, 정작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은 잊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배제하는 가운데 결정하게 되는 모든 분별과 판단은 사실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선입견과 오류에 빠져 있으면,
그릇되게 판단하고 실수하게 되어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셈하고(참조, 마태오 10,30) 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먼저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필요시 당신이 어떻게든 직접 혹은 간접으로 개입하여 곤경을 벗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자들의 상황을 먼저 아시고, 산 위에서 기도하고 계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뭍이 아니라 호수 한가운데서 풍랑에 시달리며 위험에 처해 있고, 때는 새벽녘이라 타고 갈 배도 없으며 부탁할 사람도 없으니 위급한 상황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 당신께서 몸소 물 위를 직접 걸어가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낙원을 잃어버리고 구원될 방법이 없으니,
결국 당신께서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던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의 한계에서는
당신이 직접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북돋우는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니, 주어진 여건 안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여도 더욱 용기를 내어 주님을 굳게 믿으며 보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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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배경민 베드로 신부
2020년 8월 9일 ‘의정부교구 주보’에서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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