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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수님의 자리
조회수 | 2,173
작성일 | 08.08.08
오늘복음에서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다가 바람이 불어 호수의 물결이 사나워지는 어려움에 빠져듭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배 있는 쪽으로 다가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어두워진 밤, 물결이 높이 이는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셨으니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것이지요.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안심시키시고 친히 그들의 목적지까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건너 오셨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돌아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닌 그 두려움과 고통의 공간을 걸어 건너오신 모습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 위에 올라타시자, 즉 제자들과 함께 하시자 어느새 바람이 그치고 그들은 가려던 곳에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자신의 두려움과 어려움들을 모두 이겨서 원하던 바를 얻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론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것들을 통해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려 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등이 그러한 것들이겠지요. 물론 이러한 것들을 통해 오는 위로와 힘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지속적이며 깊이 있는 위로를 주지 못하고 어느 정도에 이르러서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이고도 무한한 위로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또 그분에게서 위로와 평화를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자리를 만들지 않음으로 인해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좌절에 빠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내 안에 그 자리가 바로 나를 살리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멀리하고 내 안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두려움을 떨쳐 버릴 때 “오너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김정수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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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 오후, 방에 늘어져서 누워있던 아들은 시원한 물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더워서 꼼짝도 하기 싫은 것이에요. 그래서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시던 아빠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물 좀 갖다 주세요!”

“냉장고에 있으니까 네가 갖다 먹으렴.”

처음에 아빠는 이렇게 부드럽게 말했지요. 그러나 5분 뒤 다시 아들은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물 좀 갖다 주세요!”

“네가 직접 가서 마시라니까!”

아빠의 목소리는 짜증 섞인 투로 톤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아들은 또다시 5분 후에 “아빠, 물 좀 갖다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갖다 먹어! 한 번만 더 부르면 혼내 주러 간다!”

아빠는 이제 정말로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지칠 줄 모르고, 다시 5분 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빠, 저 혼내 주러 오실 때 물 좀 갖다 주세요.”

덥고 모든 것이 다 귀찮다고 혼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들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덥다고 성당에 나가지 않고, 또 덥다고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했던 우리들은 아니었는지요? 또한 그밖에 각종 이유를 들어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사랑의 실천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밖에도 우리들은 여러 가지 모습을 통해서 배은망덕한 사람의 길을 계속해서 선택합니다. 주님이 아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한 또한 주님과 대화하지 않아서 점점 멀어진다면 배은망덕한 사람의 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12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얼마나 가깝게 지냈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면 그들조차도 예수님을 향해서 “유령이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물론 당시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에 흰 옷을 입은 누군가가 물 위를 걸어온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외치는 것은 그들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고 또한 미성숙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이러하니 우리들의 부족함과 나약함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제자들을 향해 꾸중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시지요. 또한 예수님께 졸라 물 위를 걷다가 두려운 마음에 물속에 빠진 베드로도 당신의 사랑으로 구해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힘이 납니다. 세상이라는 물 위를 걷다가 자주 빠지는 우리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끄집어내신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또한 주님을 보고도 “유령이다.”라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할 때에도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용기를 끊임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이 사랑을 보고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부족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완전히 변화된 것처럼, 우리 역시 지금의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에서 철저히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배은망덕한 사람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에 들어설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도 효도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합시다.

조명연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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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용기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한 구절입니다. ‘산’은 성서 안에서 어떠한 존재일까요? 저는 ‘산’이 곧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 혹은 ‘기(氣)’를 받는 장소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셨을까요? 아마도 산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갖기 위해, 또 ‘피정’의 뜻으로 산으로 가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인간이신지라 ‘충전의 시간’ 곧 쉼터가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당신의 제자들은 어떠하였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향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도중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립니다. 밤새 산에서 기도하시고, 새벽 때가 되어 유유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 그것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여기서 간단히 복음의 내용을 비유로 생각해 보자면, ‘예수님’은 허구가 아닌 ‘실재, 초월적 존재’로, ‘유령’은 ‘신기루, 허상, 허영’으로, ‘배’는 ‘공동체’로, ‘맞바람’은 ‘시련’으로, ‘파도’는 ‘외부의 압력 혹은 고통’으로, ‘호수’는 ‘현세의 세상’으로, “베드로가 물에 빠짐”은 “(마치 따뜻한 물속에서 죽어가는 개구리) 한 순간 신앙의 잃어버림을 통해 세속으로 빠져 묻혀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으로 생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허우적 대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 큰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믿음이 약한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이는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속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신앙에 대한 본질을 쉽게 잊고 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물질 만능주의에 젖어든 우리들의 모습으로! 필요하면 찾고 필요 없으면 일회용 휴지처럼 신앙을 쉽게 생각하는 우리 모든이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약하기 때문에, 여러번 배신을 당하시고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의 말씀!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기적과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꾸짖음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예수님의 이 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힘을 얻고 일어서서 당신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희망을 안겨주는 말씀입니다. 당장은 하늘이 먹구름이 끼어서 해가 보이진 않지만, 구름 뒤에 해가 밝게 빛나고 있음을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힘과 용기를 얻고서 다시한번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새롭게 하루를 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성욱 스테파노 신부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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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찬미예수님
누구든지 크나큰 어려움에 처해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어려움의 정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때때로 작은 어려움조차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도 분명 있습니다. 그보다 더한 어려움이 찾아온 순간에도 잘 이겨냈던 기억과는 달리 가끔씩은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둘러 제자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정적인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이 맞이한 상황은 매우 역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벽이라는 그 어두운 밤 파도뿐만 아니라 맞바람이 부는 그 기상조건은 예수님의 부재를 더욱 더 크게 느끼도록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많은 걱정과 두려움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습니까? 온갖 혼란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 많은 유혹 앞에서 갈둥하는 모습, 그리고 스스로 맞바람과 파도를 일으켜서 처음부터는 없었지만 마치 나에게 찾아온 시련처럼 어렵고 괴롭게 여기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외쳤던 제자들의 모숨처럼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해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원망하는 우리들의 모습까지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우리에게 밝혀주시며 말씀해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믿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비록 베드로 사도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 두려워 물에 빠져 들었지만 그것을 통해 지금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대담한 베드로의 모습은 신앙 안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려는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는 말을 예수님께 들었지만 베드로는 그 순간 많은 생각에 잠기기보다는 예수님을 믿고 도전해봅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더 슬픈 일이 아닐까요? 내 믿음이 부족하다는 걸 들 키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내 믿음의 부족함을 감추고 이에 관심조차 없는 상태가 더 두려운게 아닐는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믿음을 책망하시는듯하지만 손을 내밀어 다시 붙잡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책망 안에 담겨 있는 사량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결국엔 하느님께선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하느님 앞에서 포기하지 말 아야 합니다.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오늘날입니다. 걱정해서 달라진다면 마음껏 걱정하세요. 그러나 아무리 걱정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걱정을 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도전해 보십시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멘.

▦ 인천교구 한규진 바오로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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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0년에 운전면허를 획득한 후 거의 20년 가까이 운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의 운전 실력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운전을 잘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입니다. 주차하기 힘든 곳에서도 손쉽게 주차를 하기 때문에 이제는 베테랑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에는 어떠했을까요?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제 동창신부 차를 빌려 타고 연습을 했는데 앞으로 도저히 운전을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인천에서 김포까지 가는데 거의 2시간이 걸렸고, 도중에 자동차 시동을 자그마치 15번 이상 꺼뜨렸습니다. 진땀이 계속 났고 시속 60Km로만 달려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러한 제가 답답했는지 뒤 따라 오는 차들은 계속해서 경적을 울리면서 제발 빨리 좀 가라고 합니다.

이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운전하는 것 자체가 무서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이 운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17년을 살고 있는 제가 그때처럼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스트레스도 없고, 운전을 통해서 어떤 어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운전을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 시련들도 이렇지 않을까요? 힘들다고 피한다면, 또 불평불만만으로는 고통과 시련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과 시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조만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호수에서 파도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호수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지요. 오랫동안 함께 했던 예수님이기에 어떠한 불가능도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바로 파도에 시달리는 고통에만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야가 주님을 어디서 만났는지를 보십시오. 거센 바람, 지진, 불 속에서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 주님을 만났던 곳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일상의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이 아닌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예수님의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주님께 조용히 기도함으로써 용기를 낼 수 있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어떤 고통과 시련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셨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고통과 시련에 마주 할 수 있는 용기를 늘 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이는 곧 주님과 함께 라면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주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주님과 늘 함께 할 수 있도록 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이 외쳤던 고백을 우리도 자주 바쳐야 할 것입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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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우리도 물 위를 한 번 걸어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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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물 위를 걸어 밤새 풍랑에 시달린 제자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맞바람이 불어 제자들이 탄 배는 파도에 밤새 시달렸습니다.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풍랑이 멈추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밤새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모습과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2020년, 중국에서 시작된
원인 모를 폐렴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증(코로나19)’라는 이름을 얻고, 한국에도 넘어와 폭발적인 전염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상 유래 없이 개학이 미루어지고, 미사가 중단되며, 정부를 비롯한 모든 사회가 초비상사태를 맞이하였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바이러스가 사멸되겠지’, ‘곧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오겠지’,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시겠지’라던 기대들은 속절없이 무너져갔습니다.

코로나19의 풍랑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고, 불안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뒤흔드는 이 풍랑이 잦아들기를 바랐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풍랑은 여느 때와 다르게 쉽사리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계속해서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세상에 적응해야 할 것 같다고.

호수를 건너는 데 배를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 풍랑을 만날 때는 침몰의 위험이 있습니다. 침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풍랑이 잦아들기를 기다릴 수 있지만, 그 풍랑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호수를 건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풍랑 앞에서 그대로 발이 묶여버리는 것이 싫다면 배가 아닌 다른 수단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저에게는 특별히 좋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려운 문제 앞에서 발상의 전환으로 문제를 타개하시는 모습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지만, 여자를 ‘죽여야 한다’, ‘죽이지 말아야 한다’라는 일반적인 선택지 앞에서는 예수님의 어떤 답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또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 ‘내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라는 답으로 사람들을 감탄시키십니다.

이전에 예수님의 기적 사화(私話)로만 이해했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오늘의 묵상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뚫고 제자들에게 다가가시는 방법은 더 크고 좋은 배를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센 풍랑을 즈려 밟고 물 위를 걸어간다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당신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며 우리와 선을 긋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특권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우리 역시 부활하리라는 예표를 보였던 것이듯, 그분은 당신의 모든 말씀과 행동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물 위를 걷는 그 기적이 그분을 믿고 시도한 베드로에게도 잠깐이나마 가능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복음 속의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다르게 생각할 것을 주문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번제물을 바치는 규정들에 대한 틀을 깨고, 고정화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깨트립니다. 심지어 죽음에 대한 이해까지 부활로 전환시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처럼 새로운 생각을 해봅시다.
미증유의 시대에서 미증유의 도전으로 길을 내려는 우리를 주님은 기특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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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원영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8월 9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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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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