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1 42.8%
[광주] 시련은 하느님의 발자국 소리
조회수 | 2,049
작성일 | 08.08.08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올라가는 때와 내려가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평탄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역풍을 만나서 사나운 풍랑과 힘겹게 싸우는 고달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올라갈 때보다도 오히려 내려갈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공할 때보다도 실패할 때가 실은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숭배자들과 싸워서 그들의 예언자 450명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아주 통쾌하고도 멋진 승리의 장면이었으며 이때 엘리야의 놀라운 기세는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광신자였던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복수를 다짐하자 그는 이제 거꾸로 무서움에 떨며 죽어라고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믿음의 기운이 한 순간에 꺾여서 이제는 모두 끝장이 났다고 하느님께 죽여 달라는 온전치 못한 애원도 했습니다.

어제의 당당한 승리자가 오늘은 완전한 패배자가 되어 자기 몸 하나 숨길 수가 없었고 놀라운 신앙을 증거하였던 그도 하느님은 자기를 버렸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종의 신앙의 위기를 만난 것이며 이제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막다른 코너에 몰렸으니 희망이 절벽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엘리야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하느님은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으며 새로운 차원에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치 어제의 승리로 오만해질 수도 있는 엘리야를 역시 하느님이 아니시고는 스스로는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면서 '조용하고 여린 소리'에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옵니다.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배에 먼저 태워 보내십니다. 풍랑이 그들을 괴롭힐 줄을 뻔히 아시면서도 당신은 한적한 곳에 가시어 기도를 하시는데 새벽 4시까지 기다리십니다. 마치 당신이 없는 세상을 어디 좀 살아 보거라 하는 식으로 버려두셨다가 나중에 물 위를 걸어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이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여 더 큰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나다, 안심하여라."하시며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치고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인생이라는 배를 저어 가는 호수에는 언제나 사나운 바람과 성난 물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갈릴리 호수의 변덕 많은 바람처럼 갑자기 불어왔다가는 갑자기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나다, 안심하여라."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마치 유령처럼 두렵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손길을 바라보며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우리가 내려갔을 때 그 밑바닥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래 전의 얘기입니다. 어떤 형제가 몇천만 원을 가지고 사업을 하다가 폭삭 망해서 다 날리고는 수중에 꼭 7만원이 남더랍니다. 집까지 다 팔아서 빚을 갚았으니 오갈 데도 없었고 남은 것은 처자식과 오직 그 돈뿐이었습니다. 너무도 허망하고 답답했던 그는 문득 성당을 찾아가 신부님의 조언을 청했더니 신부님은 의외로 껄껄 웃으시며 "그 7만원은 뭐하러 가지고 있노. 내 3만원을 더 줄 테니까 10만원을 채워서 하느님께 봉헌하고 진짜 빈주먹으로 다시 시작해 보거라." 하시더랍니다.

형제가 처음엔 그 말씀을 듣고 참으로 기막힌 생각이 들더랍니다. 없는 사람 도와줄 생각은 않고 겨우 몇푼 남은 '벼룩의 간'마저도 뺏으려 하는구나 하는 착각도 들었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망한 것, 7만원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판단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자기가 거꾸로 살았던 사실을 깨닫고는 신부님 말씀대로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했는데 지금은 크게 성공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짓궂은 분 같아서 인간이 시련을 통해 '여린 소리'처럼 순수해질 때 바로 그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물 속에 빠졌던 베드로의 주책(?)도 가히 일품입니다. 소위 첫째가는 제자라는 그가 그 모양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마는 물 속에 빠지는 인간의 그 허망한 현실에서 주님께 온전히 매달렸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기를 잡아 일으키시는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역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려가는 때가 바로 그분을 만나는 때요 새롭게 크게 일어서는 때입니다. 엘리야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마음에 풍랑이 심하고 분노의 불길이 크게 솟구칠 때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마음이 지진처럼 갈라지고 어둠에 휩싸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허망함밖에는 아무 것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인내로이 참고 견디면 하느님의 '여린 소리'를 진실로 체험하게 됩니다. 실패해서 고생할 때나 시련으로 몸부림칠 때는 하느님이 우릴 찾아오시는 발자국 소리입니다.

----------------------------------------------

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461 42.8%
[광주] 믿음

미국에 ‘베르나르딘’이라는 추기경이 계셨는데 38세에 주교가 되셨고 15년간 미국주교회의 의장을 지내셨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승승장구하던 삶이 65세 때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어떤 남자가 20년 전에 추기경으로 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소를 하게 됩니다. 여러 매스컴에서는 진실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선정적인 제목과 일방적인 보도로 진실을 왜곡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추기경은 자신을 모함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4 개월 만에 진실이 밝혀지는데 자신에게 불만을 가졌던 사람의 음모로 고소한 사람이 이용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 시간 동안 추가경은 너무나 많은 억울한 일들과 모욕을 당했으며 그로인해 여러 가지 걱정과 두려움을 겪어가 면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평생 가져왔던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게 뒤돌아보고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추기경님이 말씀하시기를 “밤마다 찾아오는 여러 가지 두려움과 고독들, 불안과 상실감에 시달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 나날도 많았지만 수많은 억울함과 무력감과 분노와 상처들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과연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려는 젓인 가?’ 그 뜻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정적인 것들에 몰입되어서 내 자신을 망쳐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없음을 깨닫고 내 자신을 점점 비워가면서 그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다.

주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힘든 시기에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온몸으로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은 삶의 고통과 혼란 속에서도 내가 바로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짐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짐을 바 로 지고 갈 수 있도록 함께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고소인을 진심으로 용서 하게 됩니다.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져서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이지만 늘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는 구원자 예수님이 계시기에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부족한 믿음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며 매달려 봅니다. 아멘.

▦ 광주대교구 오요한 세례자 요한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461 42.8%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

예수님은 빵의 기적 후 호수에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어두운 밤, 거센 바람이 부는 호수에 배 한 척이 떠오릅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제자들을 목적지에 데려가는 배는 역사의 사건에 흔들리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에는 ‘배’로 상징되는 교회가 겪는 역경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더 큰 믿음의 필요성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곧’이라는 표현(마태 14,22; 27; 31)과 함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행동과 말씀,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

예수님은 빵의 기적 후에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마태오는 이 구절에서만 ‘재촉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직역하면 ‘강요하다’를 뜻합니다. 제자들 홀로 배 안으로 들어가라고 강요한 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한 것입니다.

흔들리는 파도 한 가운데에서 지내야 하는 긴 시간에
제자들은 자신의 소명의 순간, 예수님에 대한 기억, 특히 죽음의 위협, 어둠, 역경, 당혹, 곤혹, 동요 속에 ‘스승이 우리를 버리셨을까?’하는 의심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시련 안에 놓이게 하신 분도 예수님이고 그들을 돕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제자들만 배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은 홀로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에게도 하느님 앞에서 식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처럼(마르 26,36-46) 물러나시어 혼자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찬양하고(요한 6,14-15)
그분을 정치 지도자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망각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소명을 망각할 위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제자들은 강요로 과감하게 군중을 떠나 홀로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갖습니다.

제1독서 엘리야의 체험에 비춰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영광의 순간에 ‘사도직에 좌절한 사도’로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서 다시 힘을 회복하고 다시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 용기를 내어라, 나다

호수에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고
제자들이 곤경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 시간(새벽 3~6시경)은 아직 어둡지만 기다리면 날이 밝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동틀 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이 시간은 자주 하느님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보여 주던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창조물에 대해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십니다.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욥 38,16)

제자들은
그분이 바다 위를 걷는 것을 보시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리고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7)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줄곧 “나다”라고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한 이야기, 요르단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다”는 하느님이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이름(탈출 3,14)입니다.

이 신비로운 이름에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자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하느님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자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시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심을 품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다”라는 말로 당신 정체성을 알려 준 이유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용기를 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믿음을 시험 받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도 주님 현존에 대해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표징을 청합니다. “오너라”라는 말씀을 듣고 모험을 감행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베드로를 구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한 마디 기도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이어 예수님이 베드로를 “믿음이 약한 자”라고 부르는데 ‘믿음이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는 앞에서 ‘작은 믿음’을 일상의 필요에 관한 걱정, 두려움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작은 믿음’은 베드로의 ‘의심’ 또는 흔들림에 적용합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다른 제자들과 우리처럼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믿음 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 배 안에 있는 다른 제자들도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정한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이 기도의 외침 덕분에 그는 바로 도움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신앙과 의심 사이의 인간적인 드라마를 이 기도로 해결함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되어가는 사람, 성장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목숨을 바쳐 양들을 사랑하고 지킬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는 이렇게 신자들에게 권고합니다. “고통 중에 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 성찰

인생의 기적은 자신의 어둠,
세상과 시대의 어둠 한 가운데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안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힘, 싸울 수 있는 힘, 인내입니다. 인내는 기도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시대에 참된 기적은 우리를 둘러싼 거센 바람이 잔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새벽을 기다리며 그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아멘.

-------------------------------------------------

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2020년 8월 9일 ‘가톨릭신문’에서
  | 08.0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97   [수도회] 용서만이 우리가 살 길  [1] 1960
796   [원주] 용서의 체험을 통해서 서로 용서할 수 있다  [1] 2267
795   [안동] 용서하는 삶  [1] 2233
794   [청주] ‘용서’는 어렵습니다.  102
793   [의정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1] 1623
792   [대전] 주님의 자비 살기  63
791   [대구]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1] 1989
790   [마산] 용서가 바로 축복임을 깨닫자.  [2] 2200
789   [전주] 용서만이 참된 치유의 길  [1] 1909
788   [수원] 시련과 용서  [3] 2292
787   [춘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2] 2576
786   [서울] 용서의 이유  [3] 2226
785   [부산]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  [3] 2216
784   [군종] 내가 얼마나 용서를 받아야 만족할지  [1] 2049
783   [인천] 부족한 저를 용서 하실래요?  [3] 2327
782   (녹) 연중 제24주일 독서와 복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2] 1879
781   [수도회]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6] 2147
780   [청주] 듣기 좋은 소리보다 사랑이 먼저다.  [1] 37
779   [마산]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3] 2322
778   [수원] 잘못은 사랑의 실습시간  [11] 2322
777   [인천] 사랑의 말  [6] 2167
776   [서울] 잘못한 형제 구하기  [10] 2740
775   [대전] 형제적 충고  [2] 2368
774   [군종] 사랑의 실천은 나눔에서 시작  [3] 2295
773   [대구] 충고는 사랑의 모험  [3] 2390
772   [전주]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3] 2239
771   [의정부] 내가 받고 있는 넉넉한 사랑, 용서... 이젠 좀 나눕시다  [5] 2486
770   [안동] "4+1"의 의무  [4] 2347
769   [춘천] 파수꾼  [6] 2435
768   [원주] 용서와 사랑  [3] 2248
767   [부산] 사랑의 실천인 잘못 타이르기  [6] 2437
766   [광주] 지금 여기!  [3] 2095
765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충고, 풀고 맺고, 청하면 이뤄주심)  [7] 1978
764   [수도회] 십자가가 은총임을 깨닫는 순간  [6] 2481
763   [대구] 주님께서 가신 길  [3] 2497
762   [광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3] 2156
761   [원주] 버들 피리  [4] 2566
760   [의정부] 반석과 걸림돌의 차이? 십자가로 구별하세요.  [3] 2332
759   [부산]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  [5] 2532
758   [청주] 새 사람과 완덕  [1] 62
1 [2][3][4][5][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