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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주시는 주님
조회수 | 2,146
작성일 | 08.08.08
아버지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한번만 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를 추운 다락방으로 보내겠다.”
그러나 아들은 또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추운 다락방에서 자게 했다.
아들을 다락방으로 보내고 잠자리에 든 부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괴롭더라도 참읍시다. 아이를 데려오면, 오히려 그 아이를 망치는 것입니다."
한참을 괴로워하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당신말이 옳아요.
그러나 지금 혼자 추운 방에 떨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오,
내가 그 아이에게 가야겠오?"
아버지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추운 다락방에서 베개도 없이 구부린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 옆에 누워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은 한참 후에 가만히 아버지의 볼을 비벼댔다.
아들의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들은, 잠깐 동안이지만 춥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부모님 곁을 떠났다는 것,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추운 방에서 자신과 함께 누운 아버지가 그렇게 고맙고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워도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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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를 걷다 빠져버린 베드로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장면을 묵상할 수 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위를 걷다가 의심이 생겨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물에 빠져 허덕이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행동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믿음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동안 제자들이 탄 배는 역풍에 시달려 위험에 처해진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배는 자주 교회를 상징한다. 어떻게 보면 곤경과 수난에 처한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

교회가 위험과 고통을 당할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은 무엇일까?

믿음이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풍랑에 허덕이는 제자들의 배에 예수님은 다가오셨다. 그리고 겁에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라고 간청한다. 예수님께서"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에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기에 물위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께 구조 요청을 한다."주님, 살려주십시오" 그가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고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셨다."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질책이라기보다 격려의 말씀으로 들린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비로소 풍랑은 그친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도 결국 지켜주신다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흔들리는 신앙, 손 잡아주시는 주님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물위를 걷는 것은 시도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늘 흔들리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것이 우리의 약한 모습이다. 사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우리의 주위에는 믿음을 해치는 요소가 너무 많다.
또한 내 자신 안에도 늘 부족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주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하고 주님께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오히려 우리는 물에 빠졌을 때,
비로소 주님께 손을 내밀게 된다. 역경과 고통 중에 주님을 더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도움을 절실하게 찾는다. 어려움이나 고통이 와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쳐서도 안 된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아주시는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주님, 믿음이 약해 세속과 유혹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저희를 버리지 말고 건져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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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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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힘도 다스리시는 주님

오늘 마태오 복음(14,22-33)에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표현되어 있다. 그 기적의 배경과 의미, 믿음의 삶에 대해 살펴보자.

1. 복음의 배경

구약성서와 초창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부활신앙이 배경이다.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힘의 표상인 바다, 재앙을 제어하는 유일한 주님이신 야훼께 대한 신앙고백, 인간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인 지나가심, 이 세 가지 내용이 오늘 복음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그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했다”(마르 6,48)는 표현이 나온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심이 ‘지나가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호렙산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있거라”하고 말씀하신 다음 지나가셨다는 것이다(1열왕 19,1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고 말씀하신다. ‘나다’라는 말씀과 ‘두려워하지 말라’고 고무하는 말씀도 구약성서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야훼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나는 곧 나다”라고 계시하셨고(출애 3,14),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의 고난기에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나, 내가 곧 야훼다. 나 아닌 다른 구세주는 없다”(이사 43,11).

2.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의미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야기는 야훼의 나타나심에 대한 구약성서의 내용에 기초하여 엮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야훼나 그분의 계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신앙고백을 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 고백을 예수께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난 뒤부터였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하느님과 함께 살아계시다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사람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세력을 제어하고 죽음의 힘도 다스리는 주님이심이 분명해진 것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들만이 오늘 복음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분과 함께 실행할 수 있었다. 베드로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있는 동안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의심을 품자 그만 물 속에 가라앉고 만다. 이로써 시련의 때일수록 주님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배우게 되었다. 불안과 걱정 속에서 항상 동요하는 우리들이 신뢰하고 귀의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이러한 믿음을 간직하며 사는 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용감할 수 있으며 어떤 난관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은 다른 모든 상대적인 두려움과 걱정을 몰아낸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구주보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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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14장 22-33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술함

심리학자인 에릭슨은 사람들은 너무 완벽한 사람보다 약간 빈틈이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완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 결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왠지 위선적이고 인간미가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친근감을 갖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틈을 보여주는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호감을 줍니다.

이는 누구나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싶은 인간의 근본 욕구의 역반응이기에 그런 사람에게 진솔한 느낌이 듭니다. 또 결점을 드러내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이 실수할수록 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 자신과 자기 집안을 미화시키려는 분위기가 매우 강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인정해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런 콤플렉스를 악용해서 오히려 정신적인 해를 끼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의 나약함마저도 늘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내는 베드로 사도를 예수님께서 후계자로 삼으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홍성남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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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갈릴래아 호수에 맞바람이 불어 제자들이 탄 배가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그때입니다. 제자들은 배를 향해 물 위를 걸어오는 한 형상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이르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 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두려워진 베드로는 물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조금 전 파도에 휘둘리는 배에서 내려 몇 발짝 걸어가던 베드로가 갑자기 물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을 보자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물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물에 빠져든 근본적인 이유는 두려움에 앞서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시선을 놓친 베드로에게 거센 바람은 두려움 자체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기 위해 배에서 내려 몇 발짝 옮기는 동안에도 거센 바람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자, 베드로는 두려움에 휩싸여 물에 빠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순간에 베드로를 추락시킨 이 두려움의 실체가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나’를 향해, 시시때때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피할 수 없는 늙음, 병듦, 죽음이 그렇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겨야만 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외에도 우리를 추락시킬 두려움은 안팎으로 널려 있습니다.

약 1년 6개월 전, 암 수술을 받았어야 했던 저에게 작은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받는 수술이기에 겁이 났습니다. 오전 9시 예정이었으므로,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드리며 주님께 의지하고자 마음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안심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나’ 자신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깨어보니 저의 속옷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저는 잠 속에서도, 수술이라는 상황을 놓고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려고 애를 쓰다가는 이내 수술이라는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빠져들기를 반복한 ‘저’가 아니었든가 합니다.

말씀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이제 제자들에게 거센 바람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우리들! 그 어떠한 처지에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얼마나 마음 깊이 인식하고 있느냐는 나의 몫입니다. 요사이 나의 시선을 주님께로부터 놓치게 만드는 거센 바람은 무엇인가요?! 나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순간, 거센 바람은 잦아듭니다. 평화가 나를 감싸기 시작합니다.

▦ 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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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목소리는 인간 영혼의 불꽃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진리의 광채」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scintilla animae)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으로 양심(良心)에 대하여 밝혀주셨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지혜를 듣고 따를 수 있을 때에 온전한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열왕 19,12)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는 「가르멜의 산길」에서 “영혼, 곧 인간은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악들로 가득 차 있음을 마치 한낮의 빛보다 더 밝게 볼 수 있게 된다”라고 설명하시면서, 사실 “안타깝게도 고생은 실컷 하면서 대단히 지쳐 있고 뒷걸음질치는 영혼이 있는 반면에 고요함과 쉼 속에 머물면서 앞으로 많이 나아간 영혼들이 있다”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가 단호하게 반대한 아합왕의 부인 이제벨의 위협을(1열왕 19,1-2 참조) 피해 호렙 산에서 지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바람, 지진, 불”(1열왕 19,11-12 참조)을 통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써 엘리야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적 고요함 안에서 그분을 뵐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양심이 증언(로마 9,1 참조)

지금부터 약 4년 반 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추기경님들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나의 양심을 거듭 성찰한 결과 내 기력으로는 더는 교황의 직무를 적절히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확실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라는 담대한 고백을 하시면서, 이런 이유로 “완전한 자의(自意)에 의해 교황직의 포기”를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지니셨던 주님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도께서는 이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로마 9,1) 이뤄진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肉)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갈라 5,17)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인간이 고통받을 때 하느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신앙의 근본적 질문을 다룬 명작입니다. 작가는 이에 대한 해답을 죽어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화(聖畵)를 밟게 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서 헤아리려 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의 아픔을 나누어 가지려고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그분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령이다!”(마태 14,26)라며 당신을 향해 두려움의 비명을 지른 제자들에게 큰 당혹감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몇 시간 전에 제자들은 “배불리 먹은 기적”(마태 14,15-21 참조)을 체험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주님께서는 “나다”(마태 14,27)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기쁨과 희망과 슬픔과 고뇌”에 함께 하신다고 알려 주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느냐?(마태 14,31)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평일 미사 강론에서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멈추지 않는다면, 그분으로부터 멀어져서 도리어 다른 소리를 듣게 됩니다. 결국,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이들은 자기 자신만으로 가득 차게 되어, 무신론자가 되거나 냉담자로 떨어집니다”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바라고,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는”(시편 130,5 참조) 믿음에 불렸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바오로 사도처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보다 더 큰 자유는 없다”(「복음의 기쁨」 280항)는 확신에 이르게 합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욱더 충만해지시길 빕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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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드럽고 조용한 하느님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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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예언자 하면 어떤 이미지부터 떠오르시나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서 카르멜산에 가보신 분들은 불 칼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450명의 바알 사제를 물리친 예언자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 말씀에는 하느님을 만난 엘리야 예언자의 체험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산에 홀로 있으면서
강풍, 지진, 산불 등을 맞이한 엘리야의 모습에서 온갖 고난과 위험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증언한 엘리야의 삶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특히 절대 권력자 ‘아합과 이제벨’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목숨이 아찔한 만큼의 격정적인 사건들이 무수히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격정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오늘 이야기는 전해줍니다. 그보다는 고요히 홀로 있는 시간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저는 항상 고요한 가운데에 머물러야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홀로 호수에 빠져 좌절과 낙담,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간절하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고 있는 베드로의 처지를 보고 있자니,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빵과 고기로 연명하며 요르단강 동쪽의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던 엘리야의 비참한 모습이 저도 모르게 연상되었습니다. 그리고 혹은 가난 때문에, 혹은 탄압 때문에, 혹은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을 많은 이들의 모습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문득 서정윤 시인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흔들리는 인간은
흔들리는 나무보다도 약하다.”(홀로 서기 2中)

공포와 절망에 놓여 있는 사람처럼
흔들리면서 나약한 존재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나약한 존재인 우리에게 하느님은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 손을 붙잡을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절망과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마태 14,32)

시인은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절망이 다정하게 느껴질 즈음
그대는 내 속에 별이 되었다.
멀리 지켜보며
혼자 즐거운 나는
사랑의 신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마다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와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바로 성체의 모습으로 하느님은 우리 ‘배’에 오르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새삼스럽지만 오늘 미사가 있고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하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도 같이 기뻐하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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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희준 루도비코 신부
2020년 8월 9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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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다. 안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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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신앙생활을 접은 신자들에게 “왜 갑자기 냉담하게 되었냐?”고 물으면 “예수님 믿어도 되는 일이 별로 없고, 너무 힘든 일들이 많이 생겨서…”라는 푸념 섞인 대답을 듣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을 믿어도
원하는 일이 즉각 이루어지지도 않고 힘든 일들이 생기다 보니 예수님이 정말 계시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업을 하거나 가정생활을 꾸려가는데 예상하지 못한 고통과 시련이 닥쳐오는 때가 많이 있다. 더욱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고 특히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럴 때마다 자신들에게 왜 이런 고통이 닥쳐오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아우성을 치다가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에 가시기 전에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대상으로 저녁 늦게까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교를 하셨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자 허기로 인해 힘들어하는 군중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이르셨다.(14.22)

당신의 사명은
군중이 바라는 ‘배부름의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이르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밤이 늦었기에 배 타기가 내키지 않았지만, 방금 전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께서 재촉하시니 그분을 믿고 배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풍랑을 만나 죽을 만큼 큰 고생을 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을 이미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매우 힘든 상황에 내버려두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듣고 배워서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 삶 깊숙이 예수님을 만나고 직접 체험해서 깨달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워서 믿고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3인칭 믿음’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니기에 오래가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하여 그 믿음을 증거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허락하시되, 그들이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멀리서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고난의 상황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들판에서도 그리고 풍랑이 이는 호수 한복판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을 어두운 밤에 떠나보내시고 그들이 풍랑으로 시련을 당함에도 당신 홀로 기도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물 위를 걸어서라도 직접 찾아오시어 “나다. 안심하여라”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준다.”(이사야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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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2020년 8월 9일 ‘평화신문’에서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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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   [수도회] 용서만이 우리가 살 길  [1] 1960
796   [원주] 용서의 체험을 통해서 서로 용서할 수 있다  [1] 2267
795   [안동] 용서하는 삶  [1] 2233
794   [청주] ‘용서’는 어렵습니다.  102
793   [의정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1] 1623
792   [대전] 주님의 자비 살기  63
791   [대구]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1] 1989
790   [마산] 용서가 바로 축복임을 깨닫자.  [2] 2200
789   [전주] 용서만이 참된 치유의 길  [1] 1909
788   [수원] 시련과 용서  [3] 2292
787   [춘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2] 2576
786   [서울] 용서의 이유  [3] 2226
785   [부산]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  [3] 2216
784   [군종] 내가 얼마나 용서를 받아야 만족할지  [1] 2049
783   [인천] 부족한 저를 용서 하실래요?  [3] 2327
782   (녹) 연중 제24주일 독서와 복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2] 1879
781   [수도회]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6] 2147
780   [청주] 듣기 좋은 소리보다 사랑이 먼저다.  [1] 37
779   [마산]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3] 2322
778   [수원] 잘못은 사랑의 실습시간  [11] 2322
777   [인천] 사랑의 말  [6] 2167
776   [서울] 잘못한 형제 구하기  [10] 2740
775   [대전] 형제적 충고  [2] 2368
774   [군종] 사랑의 실천은 나눔에서 시작  [3] 2295
773   [대구] 충고는 사랑의 모험  [3] 2390
772   [전주]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3] 2239
771   [의정부] 내가 받고 있는 넉넉한 사랑, 용서... 이젠 좀 나눕시다  [5] 2486
770   [안동] "4+1"의 의무  [4] 2347
769   [춘천] 파수꾼  [6] 2435
768   [원주] 용서와 사랑  [3] 2248
767   [부산] 사랑의 실천인 잘못 타이르기  [6] 2437
766   [광주] 지금 여기!  [3] 2095
765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충고, 풀고 맺고, 청하면 이뤄주심)  [7] 1978
764   [수도회] 십자가가 은총임을 깨닫는 순간  [6] 2481
763   [대구] 주님께서 가신 길  [3] 2497
762   [광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3] 2156
761   [원주] 버들 피리  [4] 2566
760   [의정부] 반석과 걸림돌의 차이? 십자가로 구별하세요.  [3] 2332
759   [부산]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  [5] 2532
758   [청주] 새 사람과 완덕  [1] 62
1 [2][3][4][5][6][7][8][9][10]..[20]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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