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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주님 구해주십시오
조회수 | 2,099
작성일 | 08.08.09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당신 홀로 군중을 헤쳐보내시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주님은 분주한 중에도 산에서 고요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십니다.

우리도 하루의 삶에서 하느님 안에 휴식을 취하는 기도시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녁이 되어 호수에 있는 배는 마주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에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새벽이 돼서야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제자들은 바람, 파도에 시달리면서 또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당황하여 "유령이다!"하며 무서워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보고 무서워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내시오, 나요. 무서워하지 마시오."하는 주님의 음성과 위로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뜬 금 없이 베드로는 자기도 물위를 걸어가도록 주님께 청합니다. 오라는 주님 말씀으로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분 말씀이라면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도 거센 유혹의 바람을 보고 겁을 먹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구해주십시오!"하자. 손을 내미시며 "믿음이 약한 사람! 왜 의심했습니까?"하며, 주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는 가정이고 교회 공동체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주님과 함께 가정과 교회는 온갖 풍랑을 헤쳐나가는 믿음의 공동체호가 됩시다.

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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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갈릴래아 배삯’이란 제목의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을 여행하던 한 관광객과 안내원이 갈릴래아 호수에 당도했습니다. 안내원이 "작은 목선으로 여기를 건너는 데 20달러를 받습니다."하자 그 관광객은 "도대체 뱃삯이 왜 이렇게 비싼 거요?" 하고 불평했습니다. "손님, 여긴 역사적으로 유명한 호수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줄은 알고 있소만 그래도 너무 비싸지 않소?" "손님! 여기가 바로 그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바로 그곳이잖아요. 그래서 비싼 겁니다!" 그러자 관광객 왈, "거 보슈! 얼마나 뱃삯이 비쌌으면 그 양반이 물 위를 다 걸어 갔겠수!" 했답니다. 이상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습니다. 1스타디온'(stadion)은 185미터입니다. 육지에서 약 5km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길이가 약 21km, 너비는 최대 13km로 거의 바다 수준입니다. 그들은 호수 한 복판에서 거세게 불어오는 역풍과 몰아치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역풍과 파도'는 바로 시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함을 아시고는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곤 용기를 북돋아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도움의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와 가까운 곳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13,6) 말씀처럼 "주님은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를 봅시다. 다른 제자들과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이것은 일종의 신앙의 도전이었습니다. 배 안에 있기보다 물 위를 걸어서라도 주님께 가려했던 순수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물 위로 발을 내디뎌 걷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습니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물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주님을 바라보고 걸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거센 바람에 눈을 돌리는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들어 그리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질책을 듣게 됩니다. 손을 내밀어 구해주시면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처음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유지함이 필요하구나."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배 안에서 안전함만을 추구했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물 위로 한 발을 내딛은 베드로의 도전을 예수님께서는 높이 사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비록 이 도전에서 실패를 맛보았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주님께 대한 신앙을 더 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께 다가가려는 베드로처럼 도전하는 사람만이 더 성숙된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이상 차동엽신부의 주일복음묵상 참고).

신앙인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라도 은총과 함께 있으면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물속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은총에서 멀어짐을 걱정해야 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에서 지켜 주시길 청해야 합니다.[매일미사]

방윤석 신부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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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달콩’이라 불리는 강아지가 있습니다. 식사시간이 되면 앞다리를 들어 의자 위에 올려 놓거나 사람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애절한 눈빛으로 밥 먹고 있는 사람을 쳐다봅니다. 과일 한쪽이라도 얻어먹는 보상이 있기에 같은 짓을 반복하곤 합니다. 루터는 개처럼 기도하라고 했답니다. 어느날 루터의 강아지가 그의 발밑에 앉아서 한 점의 고기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침을 흘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며 루터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개가 고기를 보고 있는 것처럼 나도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개는 지금 한 점의 고기에만 몰두해서 다른 아무 잡념도 없으며 다른 어떤 바람도 없지 않은가!”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애절하게 주님께 간청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애원합니다. 여인과 딸은 한 몸입니다. 여인은 딸을 위해서라면 어떤 멸시나 모욕을 다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재치있게 대답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런 응답은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여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도움을 청하려는 생각이 있었겠지만 나중에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제재를 당하고 예수님으로부터도 거부당하는 듯 했지만 이 여인은 좀 더 강해지고 지혜롭게 됩니다. 원망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희랍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없고 비도덕적인 여인을 가리켜 ‘개’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도 거만하고 무례한 이방인을 ‘개’ 취급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큰 모욕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습니다. 저의 집 강아지나 루터의 강아지처럼 기도합니다. 어떤 잡념도 없이 주님의 자비만을 바라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애절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나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이상은 오늘자 대전주보 김종기 신부님의 강론글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주님께 겸손하게 믿음을 고백하여 주님의 자비를 얻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믿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믿음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낮추는 행위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우리도 가나안 여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저 여인처럼, “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합시다. 아멘.

방윤석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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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억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부제품을 받고 새 학기에 서울신학교에서 대전신학교(대전가톨릭대학교)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후배신학생들과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전 학년이 축제준비를 하였습니다. 축제프로그램 중의 하이라이트는 ‘거리극’이었는데 일곱 개 학년이 학년별로 주제를 가지고 신학교 주위에 거리무대를 마련하고 거리극(성극)을 연출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해 주제는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징(기적)을 각각 학년별로 표현하는 것이었죠. 저희 부제반은 오늘 복음(마태 14,22-33요한 6,16-21)에서 들은 ‘물 위를 결으시다’가 주제였습니다.

벌써 20년이 지난 거리극의 간략한 내용을 더듬어보면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이유는 군중을 선동하고 사회를 혼란시킨 죄였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터무니없는 소분을 퍼트렸기 때문입니다. 재판에서 변호사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검사는 물 위를 걸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면 그 자체로 유죄가 되고 정말로 물 위를 걸었다 면 그것이 물의를 일으켜 사회를 혼란시켰기 때문에 유죄라는 억지 주장이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표징(기적)을 제멋대로 해석해 사회에 해를 끼친 유죄로 판결을 내립니다.

이 시대에도 세상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외치면서 사랑의 실천적 삶을 산다고 해도 그래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해도 곧 유명 연예인들의 열애설에 묻혀 실시간 검색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세상을 지배하려는 적대자들은 또 다시 그들을 재판에 넘겨 심판하려고 할 것입니다. ‘악’이 악을 비판하면서 세상의 고통과 상처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떠넘기면서 그리고 침묵하시는 주님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고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장에 머리를 갸우뚱하거나 시선을 그들이 주장하는 쪽으로 돌리게 되면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이 두려워 물에 빠지는 베드로 사도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물의 현상들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재를 하느님 빛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이 고통과 상처들을 겪고 사회의 부조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부재나 거짓된 믿음을 선동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부정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로 인해서 신앙인은 ‘거센 바람’을 맞게 됩니다. 박해받았던 예언자들이나 순교자들도 믿음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거센 바람’을 맞게 되었지만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외치면서 오직 주님만을 찾고 바라보며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센 바람으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신 것처럼 세상의 폭풍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주님의 손길이 머물러 있음을 믿으며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우리도 거센 바람을 이겨나가는 신앙인이 되어야하겠습니다.

▦ 대전교구 이덕길 알바노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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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용기를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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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늦은 밤,
배를 타고 나간 호수에서 강한 맞바람으로 인한 험한 파도를 만나게 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베푸신 빵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벅찬 마음과 더불어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했었는데, 한순간 상황이 180도 바뀌어 이제는 세상의 풍파를 만나게 됨으로써 두려운 마음, 불안한 마음으로 호수 한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오늘 제자들이 겪고 있는 이 상황은
어쩌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늘 그랬듯이 벅찬 마음으로 교회에 모여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들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다양한 신앙 활동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올 초에 시작된 엄청난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불가피하게 제한되고 또 사회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길을 맞이하게 될 것 같은 예측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표현된 강한 맞바람,
또 그로 인해 생긴 거친 파도가 제자들을 송두리채 흔들고 있는 상황을 우리도 똑같이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동안 공동체 미사를 드리지 못했고,
지금도 서로가 모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더 조심하게 되며 때로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직장에 따라 신앙 활동에 제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신앙의 모습이 위축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불안과 두려움,
고난의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도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하시며 다가오십니다.

그리하여 베드로 사도는
그 누구보다도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섭니다. 비록 중간에 거친 바람과 파도를 보고 의심이 들어 물속에 가라앉게 되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도움을 외치며 그분을 향한 마음을 보여 줍니다.

상황에 따라 조금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베드로 사도의 이 모습이 ‘팬데믹’으로 인해 위축된 신앙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 노력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두운 밤과 같은 상황이어도 먼저 주님을 바라봅시다.
바람과 파도가 거세도 주님께 다가서려는 용기를 잃지 맙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잠시 물에 빠지는 현실의 어려움이 찾아온다 하여도 다른 그 어떤 대상이 아닌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주님을 향해 부르짖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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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노호영 미카엘 신부
2020년 8월 9일 ‘대전교구 주보’에서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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