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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조회수 | 2,171
작성일 | 08.08.30
2008년 4월 11일 군종신부로 부름 받아 육군 3사관학교에 입소했습니다. 군종신부로서 살아가고자 3개월의 군사훈련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27명의 목사님, 11명의 법사님, 그리고 20명의 신부님이 모여 3개월의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신앙으로 무형 전력을 극대화 시킨다.’라는 같은 목적으로. 그러나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다양한 이유로 각각의 종교인들이 함께 일치를 이루지 못했고, 또한 각 종교 안에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본전 생각이었습니다. 10년 전에 했던 군사훈련! 다시 받으려니 암담한데. 군에 군자도 모르고 온 목사님, 법사님들이 대충 묻어가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피해의식이었습니다. 원하지 않은 곳에 원하지 않았는데, 줄 잘못 서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항상 불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화합, 일치는 저리 가라고 불목과 불화만 커졌지요.

이제 임관한 지도 한 달이 지났습니다. 모두 각자의 사목지로 파견되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3개월 전의 불평불만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나름 열심히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목자였다면 본전 생각, 피해의식 속에서 불평불만 하며 살아갔을까요?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갈 사목자들인데, 불평불만 안에서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할 줄 알았다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느님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성당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입니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 신부님, 수녀님, 친구들을 만나 잠시 잠깐의 기쁨을 느끼고자 입니까? 여러분이 미사에 참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풍요로운 식탁의 은총 안에서 주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힘을 얻기고자 입니까? 아니면 내 마음의 평화, 행복,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약간의 양심의 가책, 용서받기 위함입니까? 여러분이 여러 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열심히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보란 듯이 세상에 드러내고자 입니까?

이건승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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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아 물러가라"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 길이 고생스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사랑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울어보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그 길이 편안하고 즐거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셨던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던 대단히 불우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자기는 하느님의 꾐에 빠져 신세만 망쳤다고 했습니다.

신앙 안에 위대한 인생은 이처럼 세상에서는 모순처럼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결코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특히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그 걸어가는 길이 대단히 험난합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성모님도 그랬으며 모든 성인 성녀들이 한결같이 그 피눈물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전생에 죄가 많은 탓이라고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 걷는 위대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고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하늘같이 믿었던 예수님이 바보같이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도 받은 가장 신임받은 제자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약간은 우쭐거렸던 그였기에 주님께서 고난을 받는다고 하시자 마치 자기가 예수님을 구해 드리거나 할 것처럼 나서서 큰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아주 의외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두번째 충격을 받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반대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가게 하려는 세력, 하느님을 등에 업는 인간의 빗나간 야망 등이 바로 사탄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의외로 주님의 가까운 측근에서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옛날 루치펠도 하느님의 가장 가까운 천사였지만 결국 하느님께 반기를 드는 사탄의 두목이 되었고 베드로도 주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지만 결국 사탄으로 전락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열심하게 사는 자들은 그래서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본당에 사목회장까지 지낸 열심한 형제가 있었는데 후임 사목회장이 일을 적극적으로 열심히 추진하자 본당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게 됩니다.

마침 성당에 교육관이 필요해서 교육관 건립을 추진 중이었는데 사방으로 신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건립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장 시켰습니다. 그러나 교육관은 결국 훌륭하게 건립되었고 또한 모든 신자들이 보람을 느끼고 기뻐하자 이에 처신이 어렵게 된 그 사람은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반대자는 가까운 곳에서 쉽게 나옵니다.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것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자들이 결국 배신을 합니다. 6.25때도 구호물자로 재미를 본 자들은 많이 냉담했으며 그때 혜택도 못받은 자들이 결국 본당을 지키고 성장시켰던 일은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일입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고통'이라는 진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피해야 하고 고난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주 악에서 선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시며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께 다가오기를 기대하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은 모르고 편안함 안에 담겨진 인간의 뜻만 고집하는 어리석은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눈물이 많고 시련이 많으며 억울한 사연이 많은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청신호가 됩니다. 받을 사랑이 크기 때문에 골고타로 올라가길 원하시며 얻을 은총이 크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이며 팔자가 사납다고 한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아픈 현실이 하느님의 사랑의 크신 증거입니다.

강길웅 신부
  |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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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삶으로 알아가는 길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고통이 당장 두려워 서 회피하고 싶지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감수하면 결국 감사하게 되는 감미로운 고통이 있습니다. 예컨대 외국어를 배우는 것, 이방인으로 받는 차별과 외로움은 선교의 걸림돌 이지만 동시에 축복의 십자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conocer) 입니다(요한 17,3).”라는 말씀에서 어떻게 “아는 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글로 “알다”라는 뜻의 동사가 스페인어에는 두 개 있습니다. “교리를 알다"라고 할 때는 사베르(saber) 라는 동사를 쓰지만, “예수님을 알 다"라고 표현할 때는 꼬노세르(conocer) 라는 동사를 써서 구별합니다.

복음을 살려 하지 않고, 머리로만 알려 했던 제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은 지식의 앎(saber)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체험하고 실천하는 앎(conocer)임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선교의 십자가들입니다. 부족한 외국어 능력 때문에 어린이 취급당하기도 하고 틀린 문법으로 강론하다 지적받으면 자괴감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문법 없이 누구나 알아듣는 사랑이란 삶의 언어를 통해 어린이의 마음으로 신자들에게 다가가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겸손을 알아갑니다.

언어와 문화가 너무 다른 나라에서 겪는 아픔을 호소하고 싶은데 아무도 없는 외로움에 짓눌릴 때 술이 아니라 성체 앞에서 기도로 달래다 보면 원인 없는 위안 속에서 놀라운 현존을 영靈으로 알아 갑니다. 동양 사람이라 받게 되는 멸시도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여전히 불쾌하고 힘들지만 그런 경멸로 인해 무시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서러움과 비참함을 혼(塊)으로 알아갑니다.

사제가 너무도 부족한 볼리비아에서 본당과 33개의 공소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를 전하는 양 냄새 나는 목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그분들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제가 알아갑니다. 교황청전교기구의 후원금으로 외로운 노인 분들에게는 무료 급식소를,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기숙사를 운영하면서 그들처럼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도록 재촉 받지만 그렇게 살지 않기에 위선의 부끄러움을 알아갑니다.

십자가를 통한 앎만이 예수님을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알아가게 하며, 영혼에 사랑이 새겨지게 하는 영원한 생명의 앎이기에 죽을 때까지 계속될 제 인생의 십자가를 꼭 껴안으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은총을 간절히 청합니다.

▥ 광주대교구 강기남 요셉 신부 - 2017년 9월 3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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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떨어지는 나뭇잎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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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아휴, 이게 십자가죠”,
“그게 제 십자갑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말들 안에서 십자가라는 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죠. 맞습니다.
우리 흔히 십자가를 진다는 건 버거운 일, 힘겨운 일,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겨울이 가까이 오면 나뭇잎이 떨어지는데,
문득 어떻게 때를 알고 나뭇잎이 저렇게 떨어질까 신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알아보니 나무와 나뭇잎 사이에 있는 세포들이 죽음으로써 자연스레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포토시스 현상이라는 어려운 말이었지만, 어쨌든 모든 세포는 살아있기 위해, 생명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세포 스스로 죽음으로써 나무를 살린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만약 겨울이 가까워 오는데 나뭇잎이 그대로 붙어있다면, 추운 겨울에 많은 에너지를 쓰게 돼서 나무는 죽게 될 겁니다.

‘죽어야, 살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십자가는 무겁고, 힘겹고, 아픈 것인데 누가 지려고 할까 싶어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한 베드로의 말이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특히나 요즘 사회처럼 편하고, 좋은 것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세상에서 ‘십자가’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셨다라는 사실이죠. ‘죽어야 살릴 수 있었던 것’ 이죠.

그래요.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그저 치워야 하는 것,
없었으면 하는 것이 아닌 '구원의 표지'고, 우리를 진정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십자가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이끌어 낸 결과지요.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겠죠. 겨울에 앞서 수많은 나뭇잎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나무가 생명을 얻듯이, 오늘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찌 보면 나뭇잎을 놓으라는, 나뭇잎의 죽음을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좋습니다! 하느님께 필요한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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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윤가훈 미카엘 신부
2020년 8월 30일 ‘원주교구 주보’에서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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