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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반석과 걸림돌의 차이? 십자가로 구별하세요.
조회수 | 2,348
작성일 | 08.08.30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대목입니다. 이 이야기 안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유일하고 은밀한 인류구원의 방식이며, 그분을 추종하는 제자들도 같은 십자가의 길로 불렸고, 이는 절대적이고 예외 없는 요구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수난과 부활을 통한 구원 사업에 대하여 전체 복음 안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시지 싶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강조하실 때, 우리는 수난과 부활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리라고 짐작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죄인들로서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또한 마지막 심판 때에 사람이 행 한대로 갚으신다는 주님의 경고가 두렵고 마음이 어지러워집니다.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께서 시몬 바르요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그를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이름 지으시고, 당신 교회를 그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는데, 그와 달리 오늘은,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 사도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절대로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님을 붙들고 반박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걸림돌”이라고 힐책하시며 사탄이 그를 조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시고 준엄하게 꾸짖고 한탄하십니다.

마음의 눈이 어둡고 현세와 타협을 잘하는 우리들은 이 반석과 걸림돌의 차이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와 달리 극명하게 구별되는 예수님의 분별력과 처신은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을 독려하는 편지내용들의 근거였음을 이해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비록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 험난하여 두렵기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적나라한 한탄과 같을지 모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의 절규처럼,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는” 구원을 향한 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열망을 하느님께서 불 질러 놓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구원의 길로 불린 목마름만으로도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두려워 말고 용기를 내어 각자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십시오. 십자가는 우리 눈을 맑게 하고 귀를 밝게 하여 하느님의 것과 현세의 것을 냉철하게 구별하게 해줍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장차 다가올 큰 기쁨에 놀랄 준비를 하는 거룩한 표지입니다. 세례 때 결심한 성화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으니, 주님의 초대에 응하기를 새삼 두려워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한상만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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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말씀의 주제는 순명과 봉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믿는 이의 모습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서 하고 내가 바치고 싶은 것을 봉헌하는 것은 순명도 봉헌도 아닙니다.

첫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언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가를 고백합니다. 그만두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언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어느새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면 그가 바로 예언자입니다.

주님의 수난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말에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까지 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작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이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며 봉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도 피하고 싶은 고통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봉헌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십자가는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십자가가 주어질 때 하느님의 영광에 초대되는 것으로 믿으며 감사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온전한 봉헌을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산 제물로 봉헌했듯이 우리도 주님께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봉헌하라고 하십니다.

순명과 봉헌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어떤 수도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수도회에서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느 곳에 가서 소임을 맡기면 그 곳이 어떤 곳이던 수도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그 소임은 제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입니다.’ 서울에 있을 때에 주교님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게 바로 복음이네’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의 어떤 봉사직에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것이 어떤 십자가이던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헝승권 안드레아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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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십자가!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십자가”라는 단어가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감동을 주는 십자고상을 찾고, 화려한 십자가를 목에 걸고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그런 십자가를 져야만 당신을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신 파스카 신비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소명과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예수님께서 드러내 주신 인간의 신비는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에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24항)”고 이야기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신비.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인간의 신비이고 소명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질 때만,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걸을 때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비를 발견하고 실현하고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언제우리는 인간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는지… 인간이 왜 창조되었고, 어떻게 살아갈 때 그 생의 의미가 충만히 드러날 수 있는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때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살아갈 때, 오직 그럴 때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비와 소명을 살아갈 수 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는 말해줍니다.

나 자신을 버려야만 하는 무거운 희생이 요구되는 십자가의 소명 앞에서, 우리는 머뭇거리고 주저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이미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부부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는 부모님들입니다. 나 자신을 희생하며 이른 아침부터 가사노동을 하고, 힘든 직장생활을 견디는 이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사랑의 기쁨”을 발견하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요구하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일상의 순간들이 나에게 주어진 신비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됩시다.

▥ 의정부교구 이현승 다미아노 신부 - 2017년 9월 3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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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수난과 그리스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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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로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신약성서에 그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기에 성서를 읽음으로써, 또는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것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러 해 동안 예수님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직접 그분의 행적을 보았던 제자들보다 지금의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전체적인 면에서는 훨씬 더 유리한 상황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 복음과 한 덩어리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한 덩어리의 말씀을 반으로 나눈 것이지요.

예수께서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명대답을 해서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 이야기가 지난 주일 복음이었습니다. 물론 그 대답이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구세주가 어떤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베드로에게 아무런 힌트(?)도 주시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랬더니 하늘의 지혜가 아닌 인간 베드로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나옵니다. 그 결과가 참담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정면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 같으면 당장 때려치고 보따리 싸야겠죠?

거룩한 성주간, 예수님의 수난복음을 따라가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과 특별하게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도 않은 군중이 누군가의 선동에 휘말려서 당시의 절대 권력자인 로마 총독에게 소리 소리 지르는 대목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죠. (하긴 지금 시대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만)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저 군중 속에 들어 있지 않았을까?

혹은 당시 내가 율법학자였거나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예수님과 맞서려 했던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모를 일이고,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자신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빛,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분별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덧붙여 욕심까지 끼어든다면 억지 주장을 펴고 하느님의 일을 가로막는 오류에 떨어질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모습에서 이와 같은 교훈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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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윤석주 레오 신부
2020년 8월 30일 ‘의정부교구 주보’에서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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