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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충고, 풀고 맺고, 청하면 이뤄주심)
조회수 | 2,002
작성일 | 08.09.05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에제키엘 예언서 33,7-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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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

얼마 전 들은 한 신자분의 신앙체험이다. “저는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교회에 오는 모든 신자들이 마치 천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잘 알고 지내던 한 자매가 갑자기 나를 찾아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나는 순수한 형제적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아주 큰돈을 꾸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자매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나는 너무 큰 배신감을 느꼈고, 더 비참한 것은 같은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일년정도를 병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되었는지 그 곳 성당의 신자들이 환자방문을 왔습니다. 나는 냉담하게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도 연세가 지긋하신 신자 몇 분이 계속 저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함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 한구석도 미움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를 찾아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신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다른 신자들을 통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늘 함에 계시는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립니다”.

▪ 잘못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역할

오늘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부터 오늘까지 가능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론이 중요하게 나타나는 복음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잘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바로 잡아야 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지상의 교회는 아직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다. 거룩한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미성숙하고, 단점을 보유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교회도 인간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잘못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는 사랑과 믿음 안에서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선은 잘못한 형제가 부끄럽지 않도록 둘이서 이야기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충고를 듣지 않을 때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동원하여 견책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단호하게 가르친다. 이것은 교회의 충고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지 않는 이들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많은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그들의 척임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교회의 중요한 특성은 공동체에 있다. 즉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친교를 드러내는 것이다. 죄인들의 회개와 충고를 위한 기도는 초대 공동체의 의무였다. 기도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

초기 교회 공동체는 성전 뿐 아니라 신자 집에서도 기도를 함께 바쳤다.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즉 교회가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앙의 모임의 성격을 띠는 것은 함께 기도하는 데 있었다. 교회가 참다운 공동체로서 일치와 친교, 그리고 복음을 실현하는 힘의 원동력은 바로 기도에 있었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참다운 의미의 공동체라고 할 수 얼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들도 이 기도 안에서 해소되고 해결될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잘 닮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주님께서도 늘 제자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우리 교회의 모습이 너무 세속화된다고 걱정한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물질문명의 영향으로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가 하는 뼈아픈 반성도 함께 있다. 사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함께 산다고 무조건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일치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 특히 도시의 교회는 그러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있다.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 그리고 세속 안에서 힘있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그저 인간적인 모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크고 작은 어느 공동체든 문제가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기도로서 사랑과 일치, 용서의 관점, 즉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기도를 통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표현이다. 신앙이란 바로 하느님께 신뢰하는 삶을 의미한다. 나는 교회 공동체, 그리고 나의 가정, 내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혹시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자!

▥ 누굴가? 감사합니다.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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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

카뮈(Camus, 1913-1960)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귀머거리인 어머니 밑에서 빈곤 속에 성장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 점령하에 있던 1942년 7월에 29세의 청년 카뮈는 「이방인」(異邦人)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총아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부조리성을 통렬히 비판한 그는 「이방인」을 통해 실존주의 문학의 거두(巨頭)가 되었으며, 195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자동차사고로 죽은 20세기의 훌륭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른다’로 시작되는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무감각한 청년이 장례식 다음날 여인과 정사를 하며 햇빛이 눈부시어 아랍 청년을 살해하고, 두려움없이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이방인의 부조리와 절망, 그리고 인간 실존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헤친 20세기 최고의 걸작입니다.

소설의 제목 「이방인」은 성경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이방인’이란 말은 ‘다른 나라에 살고있는 사람’을 뜻하지만 유다인의 세계관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이 유다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여 선민(選民)으로 내세웠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유다인이 아닌 이들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도 이방인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7)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마태 6,7). “그러므로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마태 6,25). “그들이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이방인’은 유다인들처럼 유다인이 아닌 이들을 지칭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교인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무아지경 속에서 “베드로야, 어서 잡아먹어라”는 신비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사도 10,13) 바울로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은 “나는 너를 이방인의 빛으로 삼았으니 너는 땅 끝까지 구원의 등불이 되어라”(사도 13,47)는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중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파헤친 카뮈의 「이방인」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비극은 이처럼 무신론적 허무주의와 유신론적 물질주의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진 듯하지만 카뮈의 「이방인」에서 보듯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부재, 절망, 쾌락의 탐닉, 가치관의 혼돈, 밑도끝도없는 폭력과 광기는 오히려 한층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비록 유다인은 아니지만 이방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가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모인 가정이야말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임을 깨닫고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1세기를 살 모든 인류의 단 하나의 희망인 것입니다.

▥ 작가 최인호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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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가 죄를 지으면

한 사형수가 형 집행 전에 이렇게 유언을 하였습니다. “내가 한 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됨은 어느 면으로 부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언제나 나의 편이었지요. 특히 잘 못을 저질렀을 때도 충고나 매질을 한 번도 안 하셨을 정도로 나의 편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죄의 타성에 물들어 나쁜 짓에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었기에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지요. 부모님의 맹목적인 사랑이 결국 나를 파멸 시켰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속담이 있듯이, 따끔한 매와 충고는 한 인간을 성숙시키는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충고의 의무와 충고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한 형제가 잘 못을 저질렀을 때, 타인에게 알리어 이웃으로부터 소외시키기 전 우선 본인에게 솔직히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할 때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잇도록 둘이나 셋의 도움을 받아 잘못을 시정해 주도록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즉 그 잘못을 제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나 공적인 권위를 가진 자에게 알리어, 그 잘못을 시정해 주도록 해야합니다.

특히 그 잘못이 한 단체와 주위 사람들의 질서를 파괴할 정도로 중대하면, 더더욱 질서를 지키기 위해 공권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책임을 진 사람은 알 권리가 있고 단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대책을 강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서도 잘못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십시오.

예수님 시대에 이방인이나 세리 분명 죄인으로 배척받고는 있었습니다. 그들도 구원에서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세리였던 자케오가 회개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충고와 교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언젠가는 회개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라는 묵시적인 뜻이, 오늘 복음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형제 중 잘못한 이에게 충고해야 할 의무는 크리스천적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현세에 살고 있는 한 누구나 남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또 한 타인과 필연적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이라면 그는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자기 모순이며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라면 타인에 대해 무관심 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라면 타인에 대해 무관심 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에게 사랑을 쏟는 태도는 적극적 의미로는 타인이 잘 되도록 협력할 것이며 잘못이 있을 때는 충고하여 잘못이 없도록 인도하는 것이겠습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 수수방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타인은 결국 구원의 빛을 잃게 되며, 수수방관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방조죄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형제 중 누가 잘못이 없도록 협조하기를 당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데전 3,1-5). 이런 예는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고쳐 주거나 충고해 주는 의무는 중대합니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따라오는 임무이며, 그 도움의 효과가 크면 클수록 의무 또한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충고하는데 있어 비판을 위한 비방이 되어져서는 결코 아니 되겠습니다. 충고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명백히 하는 판사의 판결문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호소요, 함께 나누는 고통이며 염려입니다.

판사의 판결문이나 의사의 진단은 어느 죄인, 환자의 상태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결코 공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찬 충고는 판결해 주고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 함께 치유되길 희망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공감의 터전에서 이룩됩니다. 따라서 충고는 형제애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충고는 인내와 지혜를 요구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거듭거듭 회개할 때까지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왜냐면 사랑은 모둔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며, 가실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고전 13,7). 그리고 충고는 때와 상황에 맞게 그리고 적절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때와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의사가 집도하여 환자를 죽일 수 있고 과도하게 투약하여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듯이 충고라도 각자가 지혜롭게 판단하여서 적시에 적절히 해야겠습니다. 이제 충고하는 우리가 아니라 충고 받는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흔히 자기의 과실이 타인에게 드러내 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충고 받기는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자기의 병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거나 의사의 권고를 무시할 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여야 하며 타인에게 개방적이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잘 못할 수 있고, 우리도 이 범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러한 인간적 나약성을 시인함으로써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비울 줄 모르는 자, 교만한 자는 이웃을 잃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마저 잃게 됩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형제적 사랑으로 이웃에게 충고합시다.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충고를 받아들입시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그를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자기 자신이 많은 죄를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야고 5,19-20).

▥ 너무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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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 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일부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깊이 이해해 주고 믿어 주는 그런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런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모든 것을 믿어 주고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줄 수 있는 친구, 내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슬플 때 달려가 엉엉 울어도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며 내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 삶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생에서 그런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 기다리는 친구가 되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삶의 짐을 덜어 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손을 붙잡고 주님께 기도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의 비밀스러운 아픔을 품어 주고 함께 아파하며 사랑해 주는 사람,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그를 외면해도 나만은 곁에 남아 그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기다리는 그런 좋은 친구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줄 때 이미 내 곁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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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9월 4일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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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를 묵상하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이 세상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엄중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거듭 깨닫습니다. 이웃 사랑은 감상적인 느낌이나 기분 내킬 때 베푸는 시혜가 아닙니다. 서로서로 지고 있는 외면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똑바로 인식하고 실행하는, 수고와 용기를 요구하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지고 가야 하는 사랑의 빚은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 나오듯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예언자가
파수꾼의 두 가지 역할을 지니는 것과도 같습니다. 파수꾼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또한 파수꾼은 불의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형제들을 자신의 안위를 돌보는 것에 앞서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차원의 깨달음과 실천을 품고 있습니다. 불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가 있을 때 이웃 사랑은 그저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뼈와 살을 가진 실재가 됩니다.

그러기에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공범’이 된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기억하고, 각성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월호’의 참극은
이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분노의 바다가
우리에게 다가온 사월의 그날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의 기억을 고통스럽게 안고 살았던 이탈리아의 유다계 지식인 프리모 레비의 책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마음을 저미는 그의 시 ‘고통의 나날들: 까마귀의 노래 2’의 처음과 끝을 음미해 봅니다.

“그대가 버텨 온 날들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하나씩 세어 보았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왔던 고난의 세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어둠의 나날들
서서히 밝아 오는 새벽에 대한 공포감
그대를 기다리는 내 기다림의 불안감들

(중략)

비록 그대의 꿈들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가을 낙엽이 구르고 시계가 멈추더라도
그대의 몸이 쇠락하고 삶의 마감이 오더라도
그대의 세상마저 저물어 새벽이 오지 않더라도
난 옆에서 그대를 지켜보고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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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9월 7일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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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내 것을 다 주고도 못 준 것이 없는지 둘러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내가 지닌 소유와 집착,
이기심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하는 의무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면,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의 정신을 완성한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칩니다.

사랑은
자비와 선의로 채워지지만, 그렇다고 악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거짓 앞에서 사랑은 침묵하고
인내하기에 앞서 올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한 정의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웃과의 사랑을 관계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가르치십니다. 죄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에 그를 꾸짖는 행위도 사랑에 속합니다.

혹시라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상대의 진의를 왜곡할 수 있기에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은 다른 두세 사람의 증인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기기만과 편견에 빠진 사람까지 끌어안으라고 예수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행위가 자칫 불의를 용인하고, 거짓을 인내하는 위선적인 사랑으로 변질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는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고 강조합니다.

무뎌진 마음으로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악에 맞서 선의 승리를 선포하고, 거짓과 위선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사회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의 악의 연대가 강해 보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신앙 공동체의 영의 연대가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우리의 예언자 직무를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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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7년 9월 10일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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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하늘은 숭상의 대상이고
땅은 겸허함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지요.

하늘을 우러러 감히 따져 묻지 못하며
땅 위에서는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꼿꼿이 쳐드는 일을 금기시해 왔지요.

그럼에도 오늘 복음은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솟아오르는 천지개벽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맞닿을 수 없는 하늘과 땅이 마주 보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고작 두세 사람이 모인 땅의 뜻이
하늘에 닿아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천지개벽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은,
탓을 하고 비판하는 데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마저 함께 안고 가자는 공동체 정신을 강조합니다.

땅이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을 디디고 사는 모든 이를 형제로 생각하는 것, 그 형제의 아픔과 실수를 제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고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말하는 교회는
거룩하고 흠 없는 이들의 고상한 모임이 아닙니다. 어찌 저런 인간이 성당에 나올까 싶어 혀를 끌끌 차는 그 순간에, 그럼에도 형제, 자매라고 불러야겠다는 다짐과 결단이 있는 곳이 마태오 복음의 교회입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심정으로 하늘만 쳐다보는 일은 그만했으면 합니다. 그 ‘감히’라는 생각과 시선을 우리가 업신여기고 하찮게 여긴 땅의 사람들에게 되돌리는 일, 그것이 천지개벽의 일이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입니다.

하늘과 맞닿아 거룩해지는 일은
우리의 편협한 잣대로 만들어 놓은 자칭 ‘거룩함’이라는 우상을 부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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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9월 6일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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