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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랑의 말
조회수 | 2,198
작성일 | 08.09.05
제가 오늘날 사제로 서 있게 된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만났던 많은 분들의 충고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충고 중에는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차이가 아주 작은 것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애정을 갖고 해 주시는 충고는 도움이 되었지만, 애정이 없고 비난에 가까운 충고는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불리움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파수꾼으로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사람 중 누군가가 그에게서 경고를 듣지 못한 탓으로 죽으면, 예언자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인에게는 악을 버리고 돌아서라고 경고해야 했으며, 의인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파수꾼으로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이스라엘 민족을 정화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는 무조건적인 비난과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죄로부터 정화함으로써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깊이 뿌린 내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 예언의 말씀이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비수에 베이는 아픔같이 느껴질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말씀이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죄에 빠져 유배지에 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 격려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에
사려 깊은 배려를 통해 죄를 지은 형제를 깨우쳐 돌아오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악화만 시킬 뿐입니다. 오직 사랑이 가득한 말만이 상대방의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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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나병식 대건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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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임무 '충고'

젊은이들의 꼴불견을 보다 못해 백발의 노인이 그들을 꾸짖다가 망신을 당하거나, 교수가 학생의 잘못을 꾸짖다가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않게 듣게 된다. 이쯤 되면 ꡐ동방예의지국ꡑ이라는 간판이 떨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슬픈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느니, 살아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느니 하고들 격론을 벌이기도 하는가 보다. 이러한 격론이 있다는 자체도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구원 역사 속의 충고들 어른이 젊은이들의 잘못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젊은이들은 충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을까? 독재자일수록 칭찬만을 찾았다. 성군이 되는 것은 옆에서 칭찬만 해대는 신하 무리들을 과감히 쓸어버리고 충고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두루 배치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충고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충고는 소태처럼 쓰기 때문이다.

어떤 신자가 말을 너무 잘해서 연사로 이곳저곳에서 강연하게 되었다. 그의 말솜씨는 그야말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하면서도 힘차 많은 사람들이 감명받았다. 그래서 박수를 많이 받았다. 몇년이 지난뒤 그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내게 말했다.ꡒ신부님, 우리 선생님이 이상해졌어요.ꡓꡒ왜요?ꡓꡒ어디가서 강론하고 나면 우선 우리들이 잘하셨다고 말씀드려야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ꡓ나는 그때 생각했었다.ꡒ그의 운명이 바뀌겠군!ꡓ결국 그는 계속 박수소리에 속고 있었다.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충고같은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교권을 문제 삼기 시작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 말았다.

구원 역사 속의 충고들 원죄는 따먹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한데서 시작한다. 노아의 홍수가 그랬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을 잡아죽이기까지 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하였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조카며느리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충고했건만 그는 무시하였다. 결과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창세 19장참조)

예수님은 성서를 통해서 우리더러 회개하기를 계속 충고하신다. 하느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라, 제일 사랑하라, 인간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충고를 듣고 있는가?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문제들

구약의 전통대로라면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공동체내에서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견책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ꡒ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ꡓ(레위 19,17) 그러나 남이 보는데서 하지말고 단 둘이서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남들이 들으면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고, 명예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 때문에 오해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말하기 쉽기 때문에 옛부터 침묵은 금이라고 했을 것이다. 남들이 듣는데서 충고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입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지껄여댈 수도 있기에 혼자서 조용히 충고하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두세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라도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고집을 세우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공동체 앞에 그의 문제를 가져와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사람의 잘못을 타일러 주는 문제에 집요하게 대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한사람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끝장을 보려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우물안을 다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면으로는 한 인간의 존재가 너무도 귀하기에 그를 끝까지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공동체의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스스로 죄없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다. 부족하기에 충고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내게 충고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나는 인간성이 시원치 않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포기한 사람이다. 남들이 나를 포기한 사람이라면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 내게 충고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충고가 받아들여졌을 때 서로간에 막혔던 벽은 무너진다.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내도 남편에게 충고할 수 있어야 한다. 남편은 당연히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도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식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ꡒ아빠, 술 잡수시고 오시면 안돼요ꡓ 이렇게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딸이 얘기할 때 그것은 하나의 충고일 수 있다.

하나의 충고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충고를 싫어하게 된다. 매일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충고하시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아홉번의 칭찬 뒤에 한번의 충고라 해도 싫어하는 자세였다면 바꿀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ꡒ주님, 충고하기보다는 충고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되게 하소서.ꡓ

최기산 주교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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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에게 다가가는 방법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가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니?”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주거나 또 그러한 차원으로 충고를 해줬을 때 들을 수 있는 예상 대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이가 있다면 처음에는 단둘이, 두 번째는 둘이나 셋, 이렇게 단계적인 방법으로 다가가 가르쳐 주라고 말씀하셨지만, 막상 이렇게 접근하려는 이들에게 들려오는 이러한 대답들은 발길을 주저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잘못한 그 사람이 끝까지 돌아오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를 공동체에서 아예 제외시키고 소외시켜야 하는 것인가요? 물론 정 안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슴 아픈 일은 웬만하면 일어나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상당 부분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득해도 돌아오지 않는 형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위한 기도입니다.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청한 기도는 분명히 어떤 열매를 맺고야 맙니다. 예수님께서도 큰일이 있으실 때마다 그전에 반드시 홀로 외딴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기도의 힘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나와 틀어진 형제를 위해 기도해 보셨나요? 나의 가슴에 못을 박은 형제, 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할퀴어버린 어떤 형제를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그를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기적, 또 그 형제의 돌 같은 마음이 살처럼 부드럽게 변화되는 기적.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 어떤 문제 때문에 같은 반 신학생들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한 신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사실 그 사람을 위해 요즘 기도하고 있어. 그런데 기도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더라. 너희들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이 잘되도록 기도해봐.”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형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정답은 기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여러 번 찾아갔던 사람들도 분명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송기철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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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서 혼밥,혼술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말 그대로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술을 마시는 행위를 가리키는데요. 이러한 현상 속에서 점점 공동체보다는 개인적인 행동들을 더 선호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보다는 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만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동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져만 가는 요즘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복음은 다시 한 번 우리들이 속한 교회 공동체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운을 떼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그리고 뒤이어 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과 단둘이 만나서 원만하게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서 공동체 안에서 배척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배려심이 느껴집니다. 다행히도 이 방법이 통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형제적 사량으로 깊어질 것입니다.

허나 그것도 안 될 때에는 두 사람을 그것도 안되면 교회에 알 리라고 하십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설득하는 범위가 커져서 이제는 한 공동체의 문제로 발전된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공동체 안에서 한명조차도 포기해서는 안 됨을 묵상해 봅니다. 이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면 죄인은 공동체 안에서 쫓겨나기 전에 이미 공동체 안에서 내민 회개의 손길을 여러 차례 거부한 것이므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우리 능력 밖의 일은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니다. 단지 내가 귀찮거나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기 싫어서 은근히 죄지은 사람을 멀리하거나 미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관점에서만 상대방의 죄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시도를 여러 번이라도 우리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특히 신앙 공동체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서 지내고 있는 우리는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있는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23주일을 지내고 있는 오늘 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들의 교회공동체는 서로를 위한 기도, 사랑의 이름으로 드리는 청원을 통해 사랑의 공동체로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끈끈한 형제애로서 서로의 모습을 올바로 잡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도록 단순한 지적이나 무관심이 아닌 사랑의 관점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해 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 인천교구 안성수 마르코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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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우울증 환자 숫자가 글쎄 전 세계 4위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을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튼 그만큼 우리나라가 스트레스와 소외감이 많은 나라임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에게 커다란 축복은 상상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상력은 꿈 꿀 수 있는 힘이고, 이를 통해 희망을 품고 또 그 희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울증 환자가 많아질까요? 상상력이 없어져서일까요?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상상력을 키우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즉, 긍정적이고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부정적이고 절망을 바라보는데 상상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큰 선물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또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이 오히려 하느님을 느끼고 함께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하십니다. 어떤 분께서 기도 중에 분심이 너무 많이 든다면서, 이 분심 때문에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면서 분심 퇴치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더군요. 분심 퇴치의 방법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지요.

“그 분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시고, 그 분심 안에 계신 주님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주님과 대화해보세요.”

분심 안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까요? 어디에나 다 계시는 주님께서는 이 분심 안에서도 계시기에 그 안에서도 충분히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분심 자체에 너무 깊이 빠져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분심으로 주님을 못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만나면 모든 상상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희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해당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죄를 지은 형제를 처음에는 단둘이, 그 다음에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리고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향해서 몇 단계에 걸린 계속된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력이 그냥 가능할까요?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마음을 간직해야만 가능합니다.

나의 조그만 노력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면서 쉽게 포기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희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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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의 비난(非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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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오 복음 18장 15절)

이 짧은 구절을 읽자마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나의 죄가 아닌 타인의 죄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타인의 죄를 먼저 바라보라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매우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병행구절인 루카 복음 17장 3절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이라고 되어 있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너에게”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만의 편집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너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하늘과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어리석고 교만한 이가 아닙니다. 그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앞에서 나의 원래 모습을 되찾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죄를 보기 전에 하느님 앞에서 먼지처럼 작아지고 원래의 본분을 깨닫게 된 죄인입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1절-5절)

인간은
내 죄의 무거움을 먼저 알 때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보는 법입니다. 그래야 또 다시 밀려드는 죄의 유혹들을 단호히 물리치고 살아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마태오 복음 18장 6절-9절)이 됩니다.

때문에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작아진 또 다른 죄인들을 결코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마태오 복음 18장 10절-11절) 왜냐하면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하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비롯된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은 결국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과 같은 다른 죄인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의로운 목자(마태오 복음 18장 12절-14절)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준 분은 누구입니까?
나 자신입니까?
죄인에게 베푸신 그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이어서
“그를 타일러라”(마태오 복음 18장 15절)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 희랍어 “엘랭코”의 뜻은 ‘고소하다’, ‘비난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더 부딪힙니다.
그 비난을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 날카로운 판단과 매서운 심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양심과 인생에 대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무섭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비난은
우리의 비난과 근본적으로 그 지향점이 다릅니다. 우리의 비난은 내 눈앞에서 죄인을 없애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하느님의 비난은 죄인이 아니라 죄를 없애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죄인을 다시 당신의 형제로 재창조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마음입니다.

죄인을 다시 살리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고 그 피로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우리 죄인에게는 당신의 진정한 비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점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죄인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제2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를 짓는 것이야말로 또 다시 하느님께 빚을 지는 처사요(로마서 13장 8절-10절), 그 빚을 갚을 길은 오직 모든이들의 종이 되어 사는 것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코린토 1서 9장 19절).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겸손과 온유의 덕망으로 사는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을 통해 하느님은 다른 죄인들의 병든 양심과 영혼에 큰 경종을 울리실 겁니다. 그것이 15절에서 말하는 ‘타이르다’의 참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안 될 때가 있지요.
17절에서는 그럴 때는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절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이방인과 세리만을 찾아오신 분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그렇게 져주고 양보해도 안 된다면 그건 이제 하느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시어 변화시키실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든 죄인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올바르고 의로운 형제요 자매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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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고동수 바오로 신부
2020년 9월 6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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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람들 앞에서 강의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옆 본당의 견진성사 교리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하는 강의였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되었습니다. 그 본당의 신부님께서는 1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그 1시간도 너무나 길게 느껴졌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저였기 때문에, ‘내가 신자들 앞에서 특강을 해도 될까? 자격도 없는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강의를 망치면 어떻게 하지?’, ‘강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이 항의하지는 않을까?’ 등등의 걱정이 제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렇게 긴장을 하는 제게 선배 신부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습니다.

“걱정할 것 없어.
첫째, 못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둘째, 안 듣는 사람이 손해일 뿐, 네 손해는 없다. 셋째, 네가 그 자리에서 제일 전문가다. 넷째, 유명 강사도 실수는 많이 한다. 마지막으로 청중은 너를 감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면서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강의 내용이 너무 좋았다면서 강의록을 청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강의를 시작으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의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강의를 듣는 분들이 저의 감시자가 아니라 함께 해주고 도와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니 항상 힘차게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함께 살기 때문에 웃을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일치와 화합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소망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탓이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은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결국, 함께 하는 삶, 일치와 화합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율법을 완성하는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분리되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닐까요?
이제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함께 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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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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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   [원주] 최고의 계명 ‘사랑’  [2] 710
796   [부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936
795   [청주]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1] 703
794   [전주]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2] 95
793   [의정부] 법대로가 아닌 사랑으로  [2] 2349
792   [인천] 반성문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6] 2705
791   [수원]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4] 2471
790   [서울] 가장 큰 계명  [7] 3491
789   [군종]서로 사랑하여라.  [1] 565
788   [대구] 사랑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2] 2230
787   [안동] 애주애인(愛主愛人)  [3] 2611
786   [광주] 사랑의 계명  [2] 738
785   [대전]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  [2] 2863
784   [마산] 가장 큰 계명 - 참사랑  [2] 2699
783   [춘천] 이웃 사랑  [4] 2711
782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261
781   [수도회] 신앙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  2074
780   [전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2139
779   [청주] 내 생명, 내 재산,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1273
778   [대구] 하느님께 바쳐야 할 몫은 내 안에서부터!  [1] 2263
777   [춘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1] 2228
776   [원주] 거지신앙과 순교신앙  1030
775   [수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1] 2156
774   [군종]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1114
773   [대전] 지금은 놀부시대  1184
772   [서울]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  [1] 2154
771   [의정부] 하늘가는 길  1204
770   [안동]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1] 2158
769   [부산]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2396
768   [마산]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1100
767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카이사르의 것은, 하느님의 것은---)  [2] 1941
766   [청주] 하느님 나라의 드레스 코드  [1] 115
765   [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6] 3578
764   [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3] 2740
763   [서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8] 3092
762   [인천] 하느님 나라의 예복  [4] 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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