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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용서와 사랑
조회수 | 2,271
작성일 | 08.09.0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그에게 가서 화해하거나 조용히 이야기해서 오해를 풀도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그를 찾아가 화를 내고 옥신각신 하다가 급기야 싸움을 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에게 해야 할 일을 단계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듣지 않으면 한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다른 이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가서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화해하도록 타일러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의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다른 이와 더불어 그의 회개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남에게 충고를 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릇된 판단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임에 있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방법을 잘 따르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봅시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으로 형제를 받아들이고 단죄와 판단으로 갈라짐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심과 용서와 사랑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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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백학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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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교회, 그 시끄러운 사랑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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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례력 (가)해의 연중 제 23주일입니다.
오늘 주일과 다음주일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 18장의 내용입니다.

마태오 복음 18장은
교회 공동체의 이상적인 틀이 잘 제시되고 있기에 “교회 공동체에 관한 대헌장” 또는 “교회론적 담화”로 불리며, 교회의 실상과 문제점들 그리고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가르침이 잘 나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이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순진무구한 자들이나 성인들만의 공동체도 아니요 신앙이 원숙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는 세상 어느 단체나 공동체보다 중구난방의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인간 공동체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모이기에 나름 수준과 품격이 있으나, 교회 공동체는 애시당초 수준이니 자격요건을 따지지도 않고 개, 닭, 소 외에 사람이면 누구나 올 수 있는 인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온갖 사람이 다 있다 보니
거룩하고 고요할 것 같은 교회 공동체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 모두를 난감하게 하는데 이런 사랑황이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시끄럽다는 것은
많은 이유로 울어대는 갓난아기의 울름과 같은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우는 아기를 보고
어떤 사람은 핏대 올리며 시끄러우니 애좀 조용히 시키라고 짜증을 내거나 소리를 지릅니다. 심지어 아기의 가족조차 그러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결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뜸 엄마라고 답할지 모르지만 그냥 엄마가 아니라 진정으로 아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엄마인 것입니다.

동일하게 복음은 말합니다.
공동체가 시끄러운 것은 아기가 우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누군가 큰 소리 내어 고함치고 야단치다 안 되면 법으로 고소고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 모두가 모든 인간의 문제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고 지니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워서 살려고 나름 노력중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더 간단하게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심으로써 사랑만이 인간사 모든 문제의 최종의 답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새겨보면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사랑도 법이라는 겁니다.
법이 무엇입니까?

법이라 모두가 지켜야 하는 약속이고 의무입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옵션 즉,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기본이며 또한 최고의 의무 실천 사항인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이 되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시끄럽고 삐거덕거리는 교회라는 사랑의 요람에 몸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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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배달하 필립보 신부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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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교정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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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람들로 붐비던 도성이 외로이 앉아 있다.”(애가서 1장 1절)

코로나 제2차 대유행 시작이라는 뉴스를 들으면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연중 제23주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불가피하게 공동체와도 거리를 둔 시기에 모든 말씀의 주제가 공동체의 형제애적 교정이라 감사드립니다. 실천하기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약 40년 전, 1982년 독일 성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그의 저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상호 충고가 교회 공동체 건설의 토대이자 신자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는데 “오늘날 공동체에서 무슨 형제적 충고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도 이뤄지고 있기는 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하느님 앞에서 서로 소속된, 서로 책임 있는, 공통된 구원과 불행의 역사를 가진 공동체라는 의식이 아예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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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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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다섯 설교에서 네 번째 ‘공동체 설교’(마태오 복음 18장 1절-35절)에 해당합니다. 마태오는 이 본문에서 위기에 빠진 형제들을 되찾는 규칙을 제공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부와 권력을 중시했고 작은 이들, 약한 이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회당에서도 그럴 여건과 능력이 없던 작은 이들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마태오는 공동체 신자들 일부가
당시 이런 사회의 기준을 공동체 안으로 들여오면서 작은 이들을 환대하고 격려하던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봤습니다.

지혜롭고 식별 있는 사목자,
교회 조직과 활동에 관심을 가졌던 마태오는 공동체 설교 한가운데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목적 방법으로 예수님이 가르치는 ‘형제애적 교정’과 ‘공동체기도’를 소개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악한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죽음을 대가로 치를 것이라고 선포하는데 이는 복음 묵상에 빛을 비춰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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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애적 교정과 공동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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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너희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까요?
외면할까요? 소외시킬까요?
뒷담화를 하며 비난만 할까요?

여기서 ‘죄’는
한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 아니라
공동체 삶과 일치하지 않는 행실을 한 경우입니다.

모욕은 용서하지만 죄는 교정해야 합니다.

용서할 상황과 교정할 상황을
섬세하게 식별하는 것이 형제적 교정의 첫 단계입니다.

잘못한 형제(이하 자매도 포함되는 개념으로 사용)를
그냥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화해한다면 정말 그 형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는 심각한 죄와 관련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죄들을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 육의 행실이라고 규정합니다.(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

먼저 누가 공동체 삶과 일치하지 않은 행실을 한다면
그를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단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크겠지만 먼저 단 둘이 만나 그가 한 행동의 동기를 알아봐야 합니다. 이 순간은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돼야 할 모습을 보는 사랑의 시선을 품은 만남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복수, 분노를 품고 만난다면 타이름은 분노의 투사가 되고 오히려 그 형제, 자매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단계의 사랑에 이르려면
인내와 기도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힘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에 바탕을 두고 주님의 자비와 온유함에 힘입어서 형제애적 교정을 실천한 본보기는 사도 바오로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서 13장 8절)

이런 교정은 화해와 다릅니다.
관계가 악화되거나 멀어질 수도 있지만 주님의 자비 안에서 한 교정은 언젠가 그 형제가 스스로 공동체에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재판에서 두세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규칙(신명기 19장 15)절을 떠올리게 하는데,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교 공동체와 많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에 알려서도 듣지 않는다면
이민족이나 세리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외나 판단이 아니라 가슴이 아프지만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극단적인 처방입니다. 그는 공동체에서 분리돼 자신을 동반하고 염려했던 공동체의 선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제대로 볼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태오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맡긴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에까지 확장시킵니다.(마태오 복음 18장 18절-20절) 교회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의 표징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잃어버린 형제와 자매의 회개와 귀향의 은총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또한 교회는 기도 안에서 인간적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른 형제적 교정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되고, 시대와 문화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애적 교정을 실천하는 식별력과 용기, 힘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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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양이자 착한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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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안에서 살면서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체험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목장으로 데려오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압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오늘날 길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진 형제와 자매에게 착한 목자가 돼 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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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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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코로나19 시기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우울, 고독,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태오 공동체에서 실천했던 것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고 형제, 자매의 삶과 죽음의 선택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책임 의식을 갖는 신자들과 세상의 고통을 품에 안는 교회 공동체의 형제애와 중재 기도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연대와 희망, 세상을 비추는 빛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야 예언서 43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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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2020년 9월 6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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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회개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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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어제키엘 33.7, 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이
죄와 악을 저지르다가 회개할 시간 없이 어느 날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회개의 시간으로 어느 형제를 하느님의 교회로 인도해 주었다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넘치는 은총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서 13장 8b절)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편견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계명에 충실한 자녀라면 당연히 하느님을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이웃을 편견 없이 사랑하고 함께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형제를 사랑하고 나누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5절) 예수님은 너희 형제가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살아간다면 그에게 다가가 죄와 악을 그만둘 수 있도록 인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변화할 수 있다면 그는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마주한 죄인들은
구약에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언자의 말씀에 귀 기울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선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이들은 죄와 악에 빠져서 후회할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부끄럽지만 여전히 죄와 악이 존재합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도하는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기뻐하실 말과 행동들을
더욱 자주하며 하느님 곁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죄와 악에 머물러 버린다면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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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함형식 바오로 신부
2020년 9월 6일 ‘원주교구 주보’에서[원주] 회개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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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어제키엘 33.7, 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이
죄와 악을 저지르다가 회개할 시간 없이 어느 날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회개의 시간으로 어느 형제를 하느님의 교회로 인도해 주었다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넘치는 은총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서 13장 8b절)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편견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계명에 충실한 자녀라면 당연히 하느님을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이웃을 편견 없이 사랑하고 함께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형제를 사랑하고 나누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5절) 예수님은 너희 형제가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살아간다면 그에게 다가가 죄와 악을 그만둘 수 있도록 인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변화할 수 있다면 그는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마주한 죄인들은
구약에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언자의 말씀에 귀 기울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선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이들은 죄와 악에 빠져서 후회할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부끄럽지만 여전히 죄와 악이 존재합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도하는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기뻐하실 말과 행동들을
더욱 자주하며 하느님 곁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죄와 악에 머물러 버린다면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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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함형식 바오로 신부
2020년 9월 6일 ‘원주교구 주보’에서
  |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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