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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지금 여기!
조회수 | 2,117
작성일 | 08.09.05
지난 2000년 대희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황청 문헌 <기억과 화해>를 통해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된 여러 과오들을 반성하면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한국교회 또한 <쇄신과 화해>라는 반성문건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두 반성에는 큰 틀들이 존재합니다.
그 틀 중, 하나가 바로 침묵(가톨릭 대사전 참조)입니다. 종교적인 침묵은 기도와 정신 수련을 위한 필수 수단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침묵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도 부정적인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관찰’, ‘동의’, ‘당황’, ‘공포’, 등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반성한 “침묵”은 후자에 속합니다.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에 침묵했기에 반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예언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파수꾼이 되지 못하고 침묵한다면 책임이 따른다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같은 맥락에서 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불의에 대한 침묵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몫을 하라는 말입니다. 결코 침묵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행동하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 모든 행동의 바탕에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수꾼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습!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삶을 통하여 힘 있게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파수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또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자신의 자리에서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것이며, 교회 공동체는 그 목소리를 모아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정의가 지금 여기에서 자리 잡도록 몫을 해야 합니다.

다시는 침묵 때문에 반성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거울삼아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는! 그 곳은! 다른 어느 때도 다른 어느 곳도 아니요. 바로 지금 여기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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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진병섭 히지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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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는 보초의 임무다

군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아도 보초 경계를 게을리 한 지휘관은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라도 작전의 실패와 보초 경계의 태만은 차이가 큽니다. 작전의 실패는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한 것이지만 보초 경계의 태만은 그 자체가 이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초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전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초는 항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위험이 있을 시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재난 을 피해야 합니다. 일찍 알렸는데도 그에 대응치 못해서 사람들이 다치면 그것은 그 사람들 잘못이지만 알리질 못해서 사고를 만났다면 그것은 순전히 보초 책임입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보초입니다. 위험이 있을 때 그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보초로서 소임받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그 고달픈 직무 때문에 왕과 백성들에 게 미움을 받아 참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보초의 임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유신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 주도하의 언론 매체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국민투표에서도 거의 100% 가까운 지지표를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교회의 주교님과 몇몇 신부님들이 정부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유신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도전이었으며 사리를 분간하지 못 하는 무모한 행위로까지 보였습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까지도 그때의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정부가 어련히 잘 하고 있는데 왜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나쁜 여론이 빗발치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교님 한 분과 신부님들 몇 분이 투옥되었으며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리는 그분들이 옳았으며 백성은 유신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수는 우둔합니다. 한마디로 군중은 어리석습니다. 앞에서 누가 얼굴을 가리고 거짓말을 하면 그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래서 전체 가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인 줄 알고 착각 속에 걸어갑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충고를 받아들이는 아량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보초의 말을 듣지 않고 충고를 외면하면 그는 망합니다. 혼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도 망치고 백성도 망칩니다, 그러나 충고를 듣는 것도 어렵지만 충고를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유럽에서 어떤 왕이 낮잠을 자는데 왕궁 뒤에 있는 방앗간의 풍차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짜증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왕은 신하를 시켜 풍차를 부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달려가서 그 풍차를 부숴 버리자 방앗간 주인이 나와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인데 자녀들이 생업에 힘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재산을 부숴 버리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한탄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왕에게 전하자 왕은 방앗간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풍차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왕이 바로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충고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보다는 옆에서 더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두 보초의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못은 지적하고 고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잘못되고 있는데도 충고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공범잡니다.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틀린 것은 지적하고 고쳐 줄 때 그가 참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보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된다 해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로마 13,8) 이 사랑이 바로 보초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길웅 신부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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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보산 모세 기념성당 앞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모세 예언자의 마음을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죽어가는 모세! 죽기 이전까지 하느님과 충실한 관계를 맺었던 모세!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너무 억울하고 심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라 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방법이 모세 안에 이루어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허락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따르겠다. 모세를 따르겠다.’하면서 분열과 갈등으로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세 모든 신자들은 모세의 삶을 기억할 때 ‘하느님의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고 ‘분열의 사람’으로 기억할 지도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서 모세를 느보산에서 천천히 죽게 하신 의미는 “내려와야 될 때 마련을 갖지 않고서 내려오는 것”을 깨우치도록 도와주는 사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세 사람의 말도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타민족이나 세리처럼 취급하라" 주님 말씀도 거부하고 공동체에서 떠나게 되는 이유는 잘못에 대한 회심 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으로 스스로 성찰하여 떠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잘못에 대해서 쉽게 용서받기 원하면서도 상대방의 잘 못에는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마음은 같지만 예수님 사랑에 대한 체험이 각양각색으로 살아가기에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마음을 모아서 청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렇게 한마음으로 공동체가 청하지 않으면 올바른 기도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아가는 과정” 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마음 을 모으는 일”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심하도록 인내심을 갖고서 애정 어린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서로 다른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할 것입니다.

느보산에서 모세를 죽게 내버려 두신 하느님의 뭇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살펴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마음을 모으는 일’에 집중 해야겠습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생각으로 마음 을모아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 광주대교구 구석훈 요셉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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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귀를 기울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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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5절)

누군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우리는 타이르거나 충고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충고를 들으면 그리 기분이 좋지 않죠.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호의적이다.' 라는 것을 본인이 느낄 때입니다.

충고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낀다면 상대방이 본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알기 때문에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충고나 타이름이 조선시대 사또가 주리를 틀면서 '니 죄를 니가 알렸다' 라는 식이라면 이 충고가 아무리 옳은 소리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것을결코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타이르고 충고하는 사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충고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충고를 잘하는 사람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충고는 듣기 싫어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너보다 더 위에 있으니까, 나는 너보다 더 잘 사니까, 나는 너보다 더 나이가 많으니까, 나는 너보다 더 잘났으니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결코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교만하면 들을 귀가 닫히고
상대방의 옳은 소리를 멀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가족과 이웃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아무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누구도 자신에게 충고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올바른 길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해주는 충고를 내가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95장 7절-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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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재경 요한 신부
2020년 9월 6일 ‘광주대교구 주보’에서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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