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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4주일 독서와 복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조회수 | 1,906
작성일 | 08.09.12
마리누스 반 레이메르스바엘의 <매정한 종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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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 집회서 27,33─28,9(27,30─28,7)

27장 33절  원망과 분노는 가증스러운 것이니 죄인이 좋아하는 것이다.

28장 1절  보복하는 자는 주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며, 주님께서 그의 죄를 엄격히 헤아리실 것이다.
2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3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4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
5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 주겠는가?
6 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움을 버려라.
7 한 번은 죽어 썩어질 것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8 계명을 생각하고 네 이웃에게 원한을 품지 마라.
9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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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4,7-9

형제 여러분,
7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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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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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혼자 살기는 춥고 외롭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에는 상대방의 가시가 너무 아픕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고슴도치를 부둥켜안고 사는 듯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동반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면 부부 사이부터 가족, 친척, 이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같지만 자신과 관계 맺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 천 억 명이 살다간 인류 역사 속에 한 시대 한 지점에서 만나 삶을 함께하는 인연입니다. 이 소중한 인연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데 그 만남들에서 숱하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상처 없는 만남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많이 받고 덜 받고는 자신의 삶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내적으로 겸손하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내면에 온갖 자존심과 열등감, 욕심이 채워져 있을수록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두는 못된 종처럼 자신이 받은 은혜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자신만이 살고 있고 온갖 욕심들이 꽉 차 있으면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며 살 때 내적인 겸손이 생깁니다. 내적인 겸손이 쌓일 때 우리는 상처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 출발은 하느님께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깊이 감사하고 나면 모든 이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처 받을 일도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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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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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에서
교회는 하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흔히 ‘교회의 복음’이라고 일컫는 마태오 복음에서 ‘형제애’란,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 책임을 바탕으로 한 끝없는 용서와 화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이를 사고파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는 가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빚의 문제가 아니라 형벌의 문제로 뒤바뀐 이 불행한 이야기는 26절부터 급격한 반전을 보여 줍니다. 종이 엎드려 애원하니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약속도 없이 주인은 종의 간절한 청을 기꺼이 들어준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는
주인이 ‘빚’이 아니라 ‘부채’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빚’(오페이레테스)은 상당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죄책감마저 담고 있는 단어인 반면, ‘부채’(다네이온)는 상호 동등한 경제적 거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단순히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동등한 형제적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빚을 탕감받은 종의 무자비함에서 불행은 다시 불거지는데,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동료’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쉰둘로스’인데, ‘쉰’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의미를 지니지요. 함께해야 할 사람을 감옥에 내던지는 이의 냉혹함은 주인의 자비로움과 대비되어, 보는 이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회는
저마다 사는 처지가 다르고 능력이 달라도 서로 형제로서 책임을 함께 지는 데 그 본디 가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서로에 대한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살아간다는 최소한의 책임 의식이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공동체를 지탱합니다. 돈 몇 푼에 살의마저 느끼는 살벌한 세상에 교회의 형제애는 눈물겹도록 요긴한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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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9월 13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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