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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신앙은 입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다
조회수 | 2,416
작성일 | 08.09.26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오 복음 21,32).

오늘 예수님 말씀의 청중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이들을 빗대어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싫다’고 대답하였지만 생각을 바꾼 맏아들, 반대로 아버지의 말씀에 ‘예’라고 대답은 하였지만 행동하지 않은 둘째 아들. 재미난 것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가 ‘맏아들’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지만,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이들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더불어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이들인 ‘세리와 창녀’들도 회개와 돌아섬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입에 오른 신앙이 몸으로 도달하기 어려울까?
말로 한 신앙이 행동으로 옮기가 왜 이토록 어려울까? 그것은 예수님 말씀의 청중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이익을 채우는 것에 혈안이 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만 목적을 둔 이들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맞추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남용하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처럼 들린다.

좋은 말 많이 들리는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막힌 말들로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세상이다. 세상의 기술은 이들의 말을 더욱 현실감 있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되었다. 하지만 진정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이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던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삶의 지향이요, 목표로 삼고자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주제로 머물고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간디의 예리한 비판이겠다.

회개와 사랑은 입으로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임을 오늘 예수님 말씀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봐야 하겠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피서 2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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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표창연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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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며,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마을에 ‘착하고 의롭다고 소문난 신사’와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신사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깔끔하게 차려입고 출근을 하였고, 그 여인은 아침이 되어서야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두 사람 모두 죽었는데, 그 여인은 천국에서 아주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는데 반해 그 신사는 어두운 곳에서 지친 모습으로 울고 있었답니다. 이 모습을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하늘나라 문지기인 베드로 성인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저 신사는 아침 출근 때마다, 아침에 퇴근하는 여인이 무슨 일을 하는 여인인가를 생각하며 그 여인의 단정치 못한 행동을 상상하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 신사의 삶은 점점 자신이 상상한 대로 바뀌었고, 그 여인은 아침에 출근하는 신사를 보며 자신의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일렀을 때, 맏아들은 “싫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반면에, 다른 아들은 처음에는 “예”하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시며,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예제키엘 예언자는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며, 현재의 의인이 미래의 의인이 아닐 수 있음을, 현재의 죄인이 미래의 죄인은 아닐 수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최종적으로 하시는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잘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순교 성인들 가운데에도 처음엔 신앙을 배교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죄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서, 장렬하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여 승리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삶은 겸손한 삶’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의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이미 교만의 길을 걷고 있었고, 내가 잘났다고 뻐기고 있을 때 이미 빗나간 삶을 살고 있었고, 내가 많이 알고 있다고 느꼈을 때 이미 지적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내가 건강할 때 함부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자신의 이기심과 허영을 버리고 겸손함을 추구할 때, 나는 항상 인정받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았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 주변 여건이 어려울 때, 나는 겸손해질 수 있었고, 그때마다 하느님은 제 곁에서 전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나를 아름답게 해 주는 것임을 새삼 느끼고 깨닫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회사 사정이 너무 어려워, 열심히 일해 번 돈은 빌린 돈을 갚고 직원들 월급을 주고 나면 항상 적자가 나곤 해서, 집에 생활비도 갖다 주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밤에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새벽에 마지막 손님을 내려준 곳부터 집까지 걸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꿈꾸며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부인이 해 주는 발 마사지를 받으며 잠시 쉬고 또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고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자기 처지에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시리라는 것을. 지금은 어쩌다가 잘못되어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고 일어서려는 겸손함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별님이 반짝이며 밤길의 친구가 되어주며 희망을 선물해 주듯이, 하느님께서 새롭게 일어서려는 이의 친구가 되어 복을 선물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인각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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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친교

속담 중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속담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갖는 마음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어떤 자녀라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속에 더 깊이 머물고, 또한 주님을 닮은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결코 인정할 수 없던 죄인들 - 세리와 창녀들 - 이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들만이 하느님께 인정받을 것’ 이라는 그들의 교만한 생각을 바꾸도록 유도하십니다. 비유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죄인이 인정받는 맏아들로, 주변의 인정을 받던 의인은 오히려 인정받지 못하는 작은아들로 그 지위가 역전되는 상황은 현실적 계산과는 달리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소외될 수 없음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우리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 27-28).” 죄인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과 생명으로 끌어당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소식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희망과 용기를 얻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풀려버린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를 이미 체험하였고 그 기쁨의 충만함을 알던 바오로 사도는 더 나아가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눌 것을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필리 2,1-2).”

우리가 누구라도 사랑으로 품어 안았던 주님을 닮아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때, 모두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우리 각자이길 소망해 봅니다.

박유천(빈첸시오) 신부
  |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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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를 통한 구원

오늘 복음 말씀은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에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비난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참된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태도와 행동은 달랐습니다. 우선 맏아들은 싫다고 하였다가 생각을 바꾸어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가겠다고 하였지만 실상으로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 가운데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가 큰아들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그릇되고 완고한 신앙을 힐책하시면서 복음을 믿은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으로는 부족하고 그릇되어 보이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회개의 중요성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을, 자신의 생각과 지식만 옳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완고함을,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을 버릴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참으로 합당하게 믿을 것을 원하십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회개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매일 새롭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게 하여 우리를 구원에로 이끕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개할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죄인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로써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안에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신동걸 바오로 신부
  |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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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정의(正義), 언행일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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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을 선으로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맏아들(다른 민족 사람들, 세리, 죄인)과 작은아들(유대인, 지도자)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아버지 말씀에 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작은아들은 “가겠습니다.” 하였지만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가르침은,
큰아들처럼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작은아들처럼 그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요한이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세리와 죄인들은 그를 믿었지만 당시 지도자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예언을 통해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경고 소리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지식에 취해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것을 오직 율법에만 의지하였고, 죄에 대한 회개조차도 하찮게 여겼으며, 아브라함에게 물려받은 고귀한 특권을 자랑삼을 뿐이었습니다(교부들의 성경주해 中). 분명 “예, 가겠습니다.” 하였지만, 가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이미 죄 중에 있는 상태임을 깨닫고 있었고, 비록 죄의 상태에 머물고 있었지만 구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받기 위해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싫습니다.” 하였지만 말과는 다르게 가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일방적인 것이 아닌 대등함을,
서로의 대결이 아닌 평화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증오가 있는 곳에 화해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상처가 있는 곳에 치유를 가져다주는 것을 말합니다(세상을 통해 본 한국천주교회사 中).

이렇게 우리가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피서 2,3) 라는 독서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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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진우 베드로 신부
2020년 9월 27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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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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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회개이다.
자신들의 운명을 조상 탓으로 돌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개개인의 운명은 하느님 앞에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회 관념론이
오늘날에도 일반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우리 자신들보다는 사회적 구조에다 그 탓을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에제키엘 예언서 18장 28절) 당신께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금 살려주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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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21장 28절-32절 : 맏아들은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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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유다인들의 자세를 말한다. 즉 율법에는 ‘예!’하면서도 그리스도께는 ‘아니오!’라고 하는 모습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가지 질문,
즉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마태오 복음 21장 28절) 와 마지막에 나오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오 복음 21장 31절)라는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경각심 내지는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이 어떤 아들과 같은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지를 잘 분별하고 있다면, 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두 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초대에 인간들이 응답하는 두 가지 형태의 태도를 의미한다. ‘예!’하고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는 회피하는 둘째 아들의 형식적인 존경에 의한 행동과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 나중에 행동으로 옮긴 맏아들의 갈등과 깊은 사고에 의한 일치 행동이 그것이다. 맏아들은 무례하긴 했으나 사실상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종교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는
추상적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식주의적 종교로서 의지적 노력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요구를 실현하는 행동주의적 형태로 많은 수고를 치르는 형태이다. 즉 처음에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나중에 힘겨운 자기반성과 생각을 바꾸어 다시 받아들인다. 즉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마태오 복음 21장 29절).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종교를 만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같이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규정을 엄격히 지켰던(마태오 복음 23장 13절-32절)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그들의 ‘뜻’과 일치할 때 쉽게 ‘예!’하며 응답하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의 뜻하는 길과 일치하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써서 반대하고, 그들이 예수께 한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까지 쓰기도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였을 때, 그 뜻은 더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한편 이들 주변에는 강도들, 세리들, 창녀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힘겹게 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복음은 ‘해방’의 메시지로서
그들을 ‘아버지’의 집에 떳떳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복음은 그들의 인간적 품위를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21장 31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자신들이 비교된다는 것 자체를 치명적인 모욕으로 느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라고 하신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오 복음 21장 32절).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회개할’ 수 있으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올바르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이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첫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빛으로는 ‘꼴찌’가 될 수 있음(마태오 복음 19장 30절 / 20장 16절 참조)을 표현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범적 태도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피서 2장 8절)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일치하신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필리피서 2장 5절) 하도록,
즉 하느님의 뜻에 완전한 ‘순명’의 태도를 보이도록 권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
의심이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철저한 ‘예!’의 태도였다. 즉 '아니오!‘의 부정적인 태도도 아니었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예!‘의 태도가 아니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이해관계로 빚어지는 내적 분열이며, 이기심과 교만에서 야기된다고 한다(1절-4절 참조).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깊이 새겨주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을 예로 든다(필리피서 2장 6절-8절 참조). 그러나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높이 올려주셨고’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세워주셨다(필리피서 2장 9절-11절 참조).

하느님의 뜻에 대해,
하느님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선택과 이에 따른 철저한 응답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담을 수 있으며, 그분을 닮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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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9월 27일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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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군종]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1110
776   [대전] 지금은 놀부시대  1181
775   [서울]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  [1] 2151
774   [의정부] 하늘가는 길  1201
773   [안동]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1] 2154
772   [부산]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2392
771   [마산]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1095
770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카이사르의 것은, 하느님의 것은---)  [2] 1936
769   [청주] 하느님 나라의 드레스 코드  [1] 102
768   [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6] 3572
767   [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3] 2737
766   [서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8] 3087
765   [인천] 하느님 나라의 예복  [4] 2540
764   [대전] 초대 받은자의 예복은?  [3] 2911
763   [전주] 구원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3] 2534
762   [의정부] 예복은 미리 준비해야 필요할 때 입을 수 있습니다  [3] 2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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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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