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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조회수 | 2,172
작성일 | 08.09.26
교구장 주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서품역순으로 주일마다 향기를 내뿜던 이 말씀란에, 오늘 복음의 맏이가 나중에야 일하러 간 것처럼 이제야 맨 끝으로 간신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언뜻 루카 15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연상케 하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왔듯이 처음에는 본성에 따라 싫다고 했지만 회개하여 일하러 간 맏이, 반대로 말로는 너무나 자신 있게 “가겠습니다, 아버지”했지만 마음으로도 실제로도 전혀 가지 않은 다른 아들, 이들의 비유는 이어지는 비유 적용 말씀에서 처음에는 공적인 죄인이었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 반대로 비록 겉으로는 가장 지극한 종교인이었지만 생각을 바꾸어 믿지 못한 사제들과 원로들에 대한 폭로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포는 당시 종교적·사회적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직업상의 죄인인 세리, 윤리적인 죄인인 창녀, 그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공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반면 종교적인 삶을 위해
거친 서민과 거리를 두고 살 정도의 바리사이파,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 그리고 백성의 원로들은 그 누구도 범치 못할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예수님은 죄인과 의인의 순서가 거꾸로 바뀔 것이라 선언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역전은 우리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자기 욕심에 따라 살고 싶은 욕구, 우선 말로만이라도 현실을 모면해보고자 하는 짧은 술수, 그러다가도 가끔씩은 삶의 진실을 탐구해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들입니다. 그러함에도 주님께서 항상 중요시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잘살았고, 못살았고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악하고 공적인 죄인이라 하더라도 회개하여 지금 깨끗하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바로 여기에 삶의 희망이 있고, 의욕이 있습니다.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맏이는 우리의 표본이 되고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물론 생각을 바꿔 회개한 나중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중은 언제든 되풀이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넓으신 자비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회개하며 하느님의 일터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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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조원행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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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생각하는 것’과‘의롭게 행동하는 것

살다보면 주님은 공평하지 못한 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원인이 주님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 하지만 출발점이 대부분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처럼 잘 나가던 의인도 불의를 저지른 자신의 죄 때문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등 돌려 불의를 저질러 스스로를 죽음과 좌절로 떨어지게 합니다. 마치 이것은 내가 태양을 향해 서있으면 내 그림자가 뒤쪽에 있게 되고, 내가 태양을 등지게 되면 그림자가 내 앞에 놓이게 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이신 주님을 향해 서있을 때는 삶의 고통과 그림자는 내 뒤로 물러나게 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주님을 등지게 되면서부터 마치 그림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서로 상반되는 정 반대의 모습을 통해서 공동체의 신앙생활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부했던 큰아들에 비유되고, 잘 믿고 열심히 살아온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다른 아들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공공연한 죄인들이고,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부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아왔지만 요한의 설교에 마음을 열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들은 작은 아들과 같이 아버지의 말씀에는 “예”라고 응답했으나 포도밭에 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려주고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세례자 요한은 ‘의로움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보여준 신앙은 ‘의롭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 2,24)라는 말씀처럼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참다운 믿음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에제18,27)

김남철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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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신앙과 삶이 따로 노는 ‘이상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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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신앙의 가르침에 맞지 않게 하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 삶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따르지 않는 신앙은 ‘이상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기 삶을 매사에 신앙의 가르침에 맞추어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진정한 신앙에 걸맞지 않은 ‘이상한 신앙’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때로는 신앙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까지도 스스럼없이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상한 신앙인’의 모습을 지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듣는 척하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서 신앙과 삶이 따로 노는 ‘이상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직접적으로 당시 지도자들의 허위와 위선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자신들만큼 거룩하고 열심한 사람이 없다고 스스로 뽐내면서도 믿음 따로, 삶 따로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훈계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문제는 말로는 믿지만,
행동으로는 따르지 않는 ‘이상한 신앙’은 자신을 속이는 것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사회에 엄청난 폐해를 가져오는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의 현실을 보면서 씁쓸한 분노가 이는 것은 믿음과 생활이 따로 노는 ‘이상한 신앙’으로 겪어야 하는 피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신앙생활에
얼마나 오래 믿었는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진실하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또 신앙생활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바를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윤기 있는 말로
믿음을 고백한다고 해서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위선과 거짓을 키우는 것일 수도 있습니
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신앙인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냥 듣기만 하고, 하는 척하고 결국은 하지 않는 사람인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실행하려고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인가?
말씀을 듣고 믿지만, 실제 삶에서 말과 행동은 신앙의 가르침에 걸맞지 않은 ‘이상한 신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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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추교윤 시몬 신부
2020년 9월 27일 <의정부교구 주보>에서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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