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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기 격려하기
조회수 | 2,206
작성일 | 08.09.26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권하는 말이나 행동이 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더욱 생각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받기 어려울 자녀는 오늘 복음에서의 작은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예’라고 대답만 했을 뿐 포도원에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사랑받을 자녀는 ‘예’라고 대답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는 자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두 아들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큰아들에게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큰아들은 처음엔 ‘아니오’라고 대답했지만, 뉘우치고서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의 부족함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격려하며 일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자신에게 실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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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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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는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마태오는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구전해온 예수의 전승을 이 자리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구성은 두 아들의 비유(28-31절 전반부)와 비유의 설명(31절 후반부-32절)으로 되어 있다.

1. 두 아들의 비유

처음에는 포도원으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다가 나중에 일하러 간 맏이는 윤리상의 죄인들, 직업상의 죄인들로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면서 살았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서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과는 반대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곧이곧대로 실천하며 따른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배척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예수 전승들이 복음서 여러 곳에 자주 나온다.

2. 비유의 설명

이 비유 설명과 비슷한 내용이 루가 7장29-30절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태오는 그것을 예수의 어록(語錄)에서 베낀 것으로 여겨진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의인으로 자처하여 일반 백성, 더욱이 직업상의 죄인들인 세리들과 어울려서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처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세경륜(救世經綸)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3. 비유에 담긴 의미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상대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구약의 예언자들, 요한, 예수, 신약의 사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번번이 배척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선민을 처벌하시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신다. 하느님께서는 옛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택하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도 믿음(21,32), 열매(21,41-43), 예복(22,11)을 갖추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멸시하던 윤리상의 죄인들, 직업상의 죄인들을 예수께서는 스스럼없이 대하시고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말씀과 행동으로 허무셨다. 예수께서는 당시에 직업상 죄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과 가까이하며 친교와 우정을 나누시면서 회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음을 선포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에서 천대받는 소외된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그들을 우선적으로 끌어안으며 복음적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자주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대교구 주보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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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와 세리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407)는 뛰어난 설교가로 ‘요한 금구’(金口)라고도 불립니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교, 특히 성서의 가르침을 설교하였고,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도덕적 개혁에 노력하였는데, 반대자들의 박해를 받고 여행하던 중 피로와 열병으로 죽은 성인입니다. 그분은 생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 또 기념비가 기리는 자들의 궁전들은 모두 묻혀버렸으며, 도시를 점령하고 전승탑을 세우며 많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자들은 석상을 세우고 법을 제정하였지만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창녀였으며 어떤 나병환자의 집에서 예수께 기름을 부었던 여인은 전세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기리고 있다.”

크리소스토모가 찬양했던 창녀의 이름은 ‘마리아’, 바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태 26,13)라고 말씀하신 그 여인입니다.

창녀는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이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두 명의 창녀가 나오는데, 한 사람은 마리아이며 또 한 사람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성녀로 변화합니다.

성서에는 또 다른 직업의 죄인이 등장하는데, 바로 세리입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적국인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걷어들이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신 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키 작은 세관장 자캐오가 나무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가 1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였던 이 두 사람의 집을 방문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죄인과 어울리는구나” 하고 비난하자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1).

예수님은 ‘가겠다는 말만하고 가지 않는 둘째아들’보다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일하러 간 맏아들’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거역했던 창녀와 세리 같은 죄인도 뉘우치면 누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실제로 증명해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녀 마리아야말로 성 크리소스토모의 말처럼 ‘전 세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기리는 성인’인 것입니다. 주님의 눈에는 지금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고 어떻게 뉘우치고 변화하는가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계신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작가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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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삶

오늘 복음(마태 21,28-32)에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애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이릅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작은아들은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지만,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말씀이 흥미로운 대목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벌어지는 완전한 역전 현상입니다.

두 아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꿈으로써, 아버지에게 대답한 말과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절함으로써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지만, 생각을 바꾸어 일을 하러 나갑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맏아들은 몹쓸 아들에서 좋은 아들로 바뀝니다. 반대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기에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렸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작은아들이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괘씸한 아들로 바뀝니다.

생각과 마음이 바뀜으로 일어난 행동의 역전은 그들의 인생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처음에는 포도밭에서 일하기 싫어했지만, 궁극적으로 일하러 나간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뉘우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완전히 바꾼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그들은 이제 지상에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는 포도밭의 일꾼이 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삶의 길을 바꾸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맏아들의 경우가 행복한 인생 역전이라면, 작은아들의 경우는 불행히도 비극의 결말입니다. 포도밭에서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파기하고 일을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비유를 듣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더 나아가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 스스로는 이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말하고 약속한 것을 행동으로 지키지 못하고, 변덕을 부린 사람들입니다. 삶의 올바른 방향을 알고 있지만, 행동이 뒷받침이 되지 않아 오히려 뒤틀린 삶을 살아갑니다.

비유의 말씀은 어떤 이유로 두 아들에게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지만, 저는 이렇게 유추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했던 맏아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따랐다는 것을 뉘우쳤고, 실천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에 옮깁니다. 작은아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그것에 맞추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으로는 실천하지 못합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누구에게나 말과 행동의 역전이 일어나고, 그 역전에 따라 말과 행위의 총체인 삶에도 역전이 생깁니다. 비유에서 두 아들은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행복을 향한 역전과 비극을 향한 역전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두 부류입니다. 그들은 결국 우리의 투영된 모습입니다. 나는 맏아들입니까? 작은아들입니까?

김영춘 베드로 신부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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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충격 선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너무나도 충격적인 예수님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기들보다도 먼저 세리와 창녀들이 천국에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혁명적 말씀이었지요.
 
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해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충격 선언을 들은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칠 줄은 모르고 남의 잘못만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쳤고, 예수님이 가르쳤지만 정작 자기의 길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행동으로 보인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지요.
 
포도원을 경작하는 농부가 있었는데 그 농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일이 아주 바빴던가 봅니다. 농부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고 청합니다. 이 말에 첫째 아들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싫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아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아버지가 굉장히 실망을 했겠지요?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미친 맏아들은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맏아들에게 거절당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똑같이 일을 시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요한 21,28).
 
그러자 둘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마태 21,30)하고 대답은 합니다. 하지만 대답만 하고 아버지의 일은 아랑곳없이 곧 다른 곳으로 놀러가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성경 안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선뜻 "맏아들입니다"(마태 21,31)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대답만 하고 따르지 않은 아들보다는 뉘우치고 밭에 간 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이라는 데에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곧 명확해집니다.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았더라도 반성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대답만 잘 하고 행동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부부가 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한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기름을 넣는 동안 주유소 직원이 다가와 차 앞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이 거의 채워지고 유리가 거의 닦아질 무렵 남편이 주유소 직원을 불러 세웠습니다.
 
"유리가 잘 닦이지 않았네요. 다시 한 번 잘 닦아주세요."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열심히 유리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남편은 직원을 불러 소리쳤습니다.
 
"잘 좀 닦아보세요. 유리가 전혀 닦이지 않았잖아요."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차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닦이지 않는다고 화가 난 남편은 차 문을 열며 곧 뛰쳐나갈 태세였지요. 이때 옆에 있던 부인이 남편의 안경을 빼서 닦아주었습니다. 순간 남편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더러웠던 것은 차 유리가 아니라 자기 안경알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며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보다는 과거에 잘못된 길을 걸었더라도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 하느님께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자기를 닦아야 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내 눈에 남의 잘못들만 보인다는 것은 내 안에 나쁜 것이 있다는 증거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나를 정화하고 상대방의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 어떠한 지식보다도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는 말씀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기양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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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감옥에 있는 동안 종교로 귀의해 세례를 받고, 회개의 삶을 살다가 죽기 전에는 장기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형집행이 끝난 후 그를 신앙으로 이끌어준 선교사에게 기자들이 질문했습니다. “그토록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회개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려고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신학교에서 강의시간에 교수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천국에서 세 번 놀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와! 내가 드디어 천국에 왔네!” 두 번째, “어떻게 저 사람도 천국에와 있지?” 세 번째, “어? 천국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네?” 물론 우스갯소리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은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세리나 창녀들의 죄를 두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인 척하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종교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인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천시와 냉대를 받던 세리나 창녀들은 늘 자신들의 죄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관장 자캐오와 세리 마태오, 창녀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세속적으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진정한 신앙인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나는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다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부단히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다가가는 삶입니다. 또한 회개는 평생 끊임없이 계속되어야하며,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제 용기를 냅시다. 우리의 손과 발이 착하고 좋은 일을 하는데 더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입이 불만과 불평이 아닌 칭찬과 평화를 노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입니까?

허영엽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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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각을 바꾸어…. ‘좋은 이웃’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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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함께 만나고 사목하는 분들은 ‘국내 이주민’들입니다.
이들은 이주 노동자들, 결혼 이민자들, 이주민의 자녀들(다문화) 그리고 난민들입니다. 이들은 때론 이유 없는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속에 살아가곤 합니다. 특히나 난민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목숨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의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먼 나라 이곳 한국
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대한 편견, 잘못된 선입견과 오해들 그리고 그들의 피부색으로 인해 ‘잠재적인 범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우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주민 활동가 한 분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철저한 준법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좁은 도로의 횡단보도 하나라도 파란불을 지키며, 길거리에서도 침도 뱉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혹시나 작은 잘못 하나로 추방되거나 그것이 이유가 되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누구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제106차 이민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이주민’이라고 말씀하시며, 이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돕는 것이 각 나라의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시급한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교황께서는
요셉, 마리아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셔야 했던 예수님께서 ‘이주민’의 표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하여 강제로 피신하셔야 했던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주민’ 안에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서 굶주리시고, 목말라하시며, 헐벗으시고, 병드시고, 나그네이시며, 감옥에 갇히신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해야 합니다(마태오 복음 25장 31절-46절 참조 · 제106차 이민의 날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담화 일부 발췌).

오늘 복음에서 맏아들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포도밭에 일하러 갔다”(마태오 복음 21장 29절 참조)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민의 날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주민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의 마음을 바꾸어, 세상이라는 포도밭에 가서 사랑을 실천하고, 가련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지 모르는 외국인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입니다.

올해 이민의 날의 주제 성구는
“모든 이를 차별 없이 환대하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장 8절 참조)”라고 정해졌습니다.

이러한 차별 없는 환대와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줄 때, 그들도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줄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제2독서인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피서 2장 5절)라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이 지니셨던 이방인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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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광휘 베드로 신부
2020년 9월 27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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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금은 ‘예’라고 답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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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특별히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맏아들과 다른 아들의 비유이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요구하자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거절했으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반면 다른 아들은 처음에는 가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다시 보면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28절)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아버지의 요청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맏아들은 자신의 싫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접어두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하였다.

이 비유에서
우선 ‘오늘’이라는 말로 사전에 어떠한 예정이 없었더라도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주목해본다.

맏아들에게는
아버지가 갑자기 포도원 일을 시키니 못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오늘 급한 다른 계약 건도 있어서 잘못하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을지 모르고, 오늘 병원에 중요한 예약이 있거나 놓칠 수 없는 약속 등의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왜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았느냐고 불평할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 중에서 가장 우선이 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즉 의미 부여와 가치 부여의 문제 그리고 인생의 우선순위의 문제를 결정하게 만드는 대목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오늘’이라는 말에는
최종적으로 건네시는 하느님의 명령과 사명의 종말론적 시급성이 내포되어 있기에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도 결단할 것을 요구하신다.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아버지를 속인 다른 아들보다는,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향했던 맏아들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뜻에 더욱 합당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하시면서 비록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지금이라도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발걸음을 돌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다면, 지금이라도 이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따르고자 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국 속담에
“바닷가의 조약돌도 무의미하게 놓인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바닷가에 조약돌 하나도 그 놓인 위치에 따라 하느님의 뜻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과 사명이 없겠느냐는 것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 ‘바로 지금’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든 일에 앞서 우선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일,
하느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오늘’ 해야만 하는 것으로
절대로 우선순위를 미룰 수는 없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코린토 2서 1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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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2020년 9월 27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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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 방법은 거리 지키기와 마스크 착용입니다. 꼭 필요한 모임만 참석하고 가능하면 모임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도 코로나19의 감염을 막는 방법입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방역지침을 지키고 있습니다. 답답함을 감수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나19의 확산이 멈추지 않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박해도, 두려움도, 환난도, 칼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확진된 목회자가 예배를 통해서 신도들을 감염시킨다면 결코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중세에 페스트는 많은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페스트는 신앙을 통해서는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이웃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은 광신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규모 모임을 가지면서 거리두기를 하지 않기도 합니다. 위치 정보를 감추기 위해서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기도 합니다. 확진되었으면서도 동선을 알려주지 않기도 합니다. 검사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는 정치적인 대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코로나19는 사상과 이념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한 사람이 감염되어 사망한다면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손실을 주고, 삶에 불편을 준다면 이 또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서, 종교인이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죄인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구별하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바이러스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고, 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바이러스는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해도, 재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개인위생을 소홀히 하면 쉽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듯이 바이러스는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삶에 커다란 피해를 주게 됩니다.

율법학자라고 해도,
바이사리파라고 해도, 종교인이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기름부음 받았던 다윗도, 하느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였습니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본당에서도 여러 교육기회가 있습니다.
성서공부, 레지오, 성령기도회, 대림특강 같은 기회입니다. 평일미사는 하루의 삶을 돌아보고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 자리에 열심히 참여하는 분들은 축복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신앙이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에 함께 하지 못하면
뜨거웠던 신앙도 점차 식어가는 것을 봅니다. 저의 동창 중에서도 교구의 행사나, 피정, 교육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교육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기 때문에 본당에서의 사목도 기쁘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교육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친구들은 동창 모임에도 자주 오지 않는 친구들은 나중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거의 표시가 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훨씬 기쁘게 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은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빙자한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검사를 거부하고, 동선을 알리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자가 격리의 대상으로 통보를 받았으면서도 공공장소에 다니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확진 판정을 받고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코로나19는 나만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웃을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라고 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가 대구와 경북에 심각한 피해를 줄 때였습니다.
전국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대구와 경북으로 달려갔습니다. 전국의 소방대원들이 자원해서 달려갔습니다. 우한에서 온 교민들을 받아들인 천안과 아산의 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을 우선적으로 보듬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해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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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9월 27일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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