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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두 아들의 비유
조회수 | 2,131
작성일 | 08.09.2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대상으로 하신 비유 말씀이라고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말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공인된 죄인들입니다.

오늘 말씀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 유대아의 종교와 정치를 장악한 실세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 사회가 보장하는 권위를 가진 이들입니다. 그들은 유대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권위 있게 해석하면서, 그 말씀을 가장 잘 따르는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은 아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그 시대 죄인들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그 사회가 인식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한 아들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알려진 세리와 창녀들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유대교로부터 유산으로 받아 신앙의 핵심으로 간직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믿는 마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신앙인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내세이든 현세이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그 실천은 구약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출애 33,19)이고,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루가 6,36) 사람이 되는 실천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권위와 존경으로 치장한 지도자들보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더 잘 실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라는 그 시대 지도자들은 가진 것이 많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많이 알고 있다고 믿어져서 사람들 앞에 권위를 가진 이들이고, 사람들의 존경이 보장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 권위와 존경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것이 너무 소중하여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으면서,
율법과 성전 제물 봉헌만을 소중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행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일부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외치면서, 국민을 잊어버리고, 정권 장악과 그것의 연장만을 꾀하는 현상과 같습니다. 또한 오늘의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종과 같이 봉사한다고 구호로만 외치고, 실제로는 권위와 독선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들의 영광만 찾는 현상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르치신 ‘하느님 자비’의 실천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성찬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이다’, ‘쏟는 피다’라는 말씀으로 그 의미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에 충실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위해,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기에 그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입니다.

이 실천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일로 보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질서 안에 살고, 그 실천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어리석음이지만...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고린 1,1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우리를 위한 득과 실을 먼저 계산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만을 위해 하는 일은 허무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끝까지 긍정하면 그 말로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를 쓴 사람은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4)고 고백합니다. 이런 헛됨을 우리도 때때로 체험합니다. 남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해도, 어느 날 허무로 돌아갑니다. 때가 되면 사라져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우리 자신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협소한 시야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그 주간을 위한 신앙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미사는 앞으로 한 주일 동안 하느님과 함께 살겠다고 약속하는 신앙행위입니다. 미사는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의례입니다. 우리 자신만 보이는 우리의 협소한 시야를 치유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넓어진 시야를 가지고 새로운 한 주일을 위해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 따라
포도원에 일하러 가는 오늘 복음의 아들과 같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갑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성체를 몸속에 모시고 갑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서 아들 됨을 배워 실천할 것을 바라면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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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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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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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이릅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큰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작은아들
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라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큰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처음엔 싫다고 한 큰아들보다
아버지의 뜻을 처음부터 따르고 실천까지 잘하는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당연히 자신들의 것이라 여겼으나 세례자 요한의 말도 따르지 않았고 예수님의 말도 듣기를 거부하는 그들은 '작은아들이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이었으나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했던 세리와 창녀들'이 큰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일까요, 작은아들일까요?

보좌신부 시절
함께 계시던 수녀님이 저에게 ‘착한 목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별명이 마음에 들었던 저는 그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신자들이 무언가를 부탁하면 즉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가? 형평성에 맞는 일인가? 너무 몰캉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등 대부분은 안 할 핑계를 찾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냥 기쁘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저는 그 당시의 사제들과 원로들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 이 될 가능성을 늘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편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당신부가 신자들에게 뭔 일을 시키면 하기 싫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일을 맡게 되고 맡은 일은 열심히 합니다. 마음이 약해서인지 신앙심이 깊어서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큰아들이 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큰아들에게서는 속상함에서 안도의 기쁨으로, 작은아들에게서는 든든함에서 서운함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버지가 가지셨을 속상함과 서운함은 빼고, 든든함과 기쁨만을 드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적어도 '큰아들'로 살아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예, 제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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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장환 마르티노 신부
2020년 9월 27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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