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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회수 | 1,981
작성일 | 08.09.26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 이야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서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자기에게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직접 갑니다. 그리고는 부릅니다. 이 부름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아들아!”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그대로 “얘야!”하고 부릅니다. 그리고 분부를 내립니다. 딱딱한 명령이 아니라 부드럽게 분부합니다. 그런데 명령은 부드러우나, 그 내용은 쉽지 않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이 뙤약볕에서 고생해야 합니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기 싫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명령을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들이 자율적으로 대답하라 수 있는 자유를 이미 주었습니다.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는 아들들의 대답 이후의 행동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같이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를 줍니다. 이 시간은, 아들들이 ‘안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가, 마음을 고치고 일하러 가게 해줍니다. 또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곧 ‘가겠습니다.’ 하고서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적 여유를 줌으로써 결심을 뒤바꾸게도 하고, 결심을 순화 내지 강화하기도 합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 맏아들의 대답을 직역하면,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가 됩니다.
퉁명스러울 정도로 딱 잘라 거절합니다.
그는 다른 계획이 있을 수도 있고,
노동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반항의 그 달콤함을 만끽하려고 그러는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를 거역함으로써 자존심과 독립심,
그리고 해방감을 누리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뉘우칩니다.

비유는 이 뉘우침의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비유를 듣는 청중이 저마다 다름대로 상상해서 알아듣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습니다.
둘째의 대답을 직역하면, “예, 주인님!” 정도가 됩니다.
선뜻 대답하면서 동시에 정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에게 예의 바르게,
그러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빈 대답이 되고 맙니다.
결국 거짓 약속, 거짓 맹세가 됩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각자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못합니다.
“예, 아버지!” 하고 바로 포도밭으로 가서 열심히 일하였다면 완전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에서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생활에서건 불완전합니다.
불완전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불완전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으로 비유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그들은 그 두 아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고 쉽게 대답합니다.
올바른 대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 대한 판단이 곧 자신에 대한 판단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예수님 비유는 듣는 이에게 판단을 요구합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판단을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판단은 남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 내 자신에 대한 판단입니다.

하느님에게 응답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려는 우리는 늘 불완전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좌표는 무엇이고,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판단은 또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와 같이,
빈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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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승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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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에 사랑이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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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주님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제 ‘진리의 성령’과 함께하는 삶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오늘 미사에서 은총을 구합니다.

9월의 마지막 주일은 이민의 날입니다.
우리 이웃에 실향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국내 실향민에 관한 사목 지침」(2020.5)을 발표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코로나바이러스19의 위기 속에 가중된 실향민 고난을 이해하고, 형제애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며, 나눔과 환대에 동참하기를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기원전 6세기)는
이스라엘 멸망과 바빌론 유배는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속죄와 정화를 위한 하느님 정의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과거의 죄 때문에 공동체에 연대책임을 내리는 벌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찌 넘어갈 수 있느냐며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에제 18,25)하고 주님 정의를 판단합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개인 공적에 따라 심판하시기에 개인 책임임을 일깨우고, 악습을 버리고 회개하여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생명을 얻는다(에제키엘 예언서 18장 27절-28절)고 선포합니다. 연대책임 때문에 고통을 겪어도 회개하고 변화될 주체는 사람이지 하느님일 수는 없습니다. 의인도 공동체 내에 악과 불의와 싸워서 공멸을 막을 책임이 있습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3차 선교여행 중에 투옥된 에페소 감옥에서 에게해 건너 필리피 교우들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입니다. 주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돕고 은총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한마음 한뜻으로 기쁨을 누립니다. 이기심과 위선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시 교회에서 즐겨 노래하던 ‘그리스도 겸손의 노래’(필리피서 2장 6절-11절)를 전하며, ‘성덕의 모범’이신 예수 성심을 우리 안에 간직하라고 권고합니다.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자신을 비우고 낮추신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성부께서는 부활의 영광과 함께, ‘주님’이란 호칭과 세상의 주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 권한을 문제 삼는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마태오 복음 21장 23절 이하)에 연결된 내용입니다. 그들이 그 자격의 출처를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 권한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반문하십니다.

백성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지만
지도자들은 그를 믿지 않았기에 말문이 막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도 답변을 거절하는 대신 그들의 태도를 자성토록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마태오 복음 21장 28절) 하시며 이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이 비유는
다른 형식의 필사본이 두 개나 더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과 본문 내용은 같으나 아들의 순서가 바뀝니다. 맏아들은 ‘예’라고 대답만 해놓고 포도밭에 일하러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 한 뒤 뉘우치고 밭에 나가 일했기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입니다. 또 다른 필사본은 내용까지 바뀌어 혼란스럽습니다. 맏아들은 싫다고 대답한 뒤 뉘우치고 간 반면, 둘째 아들은 ‘예’라고 대답만 하고 일하러 가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은 맏이가 아니라 둘째라고 전합니다.

중동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방문지에서 이 비유 이야기를 자주 나눈답니다.

그들에게 ‘어느 아들이 더 좋습니까?’ 물으면, ‘싫다’ 해놓고 실천한 아들보다 ‘예’라고 공손히 대답하고 실천하지 않은 아들을 더 좋아한답니다. 그들 문화의 핵심가치는 ‘명예’이기에 가정의 중심인 아버지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은 가문의 수치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명예롭게 행동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오 복음 21장 31절)고 물으십니다.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회심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맏아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믿고 회개하여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먼저 얻은 사람은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죄인이던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께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오 복음 21장 28절).” 이르십니다. ‘포도밭’은 주님의 돌보심 아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교회의 은유이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사랑의 보금자리(이사야 예언서 5장 7절 / 요한 복음 15장 1절 / 아가서 1장 6절)입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고,
교회는 살아계신 하느님 목소리입니다.

주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삶이
은총 속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바라시는 아버지 뜻과 기도 속에 발견한 개인의 소명이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아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자만이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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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세례자 요한 –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2020년 9월 26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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