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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예, 아니오
조회수 | 2,385
작성일 | 08.09.26
우리 말 주에서 하기 힘든 말이 하나 있지요. “뜰에 콩까지 깐 콩까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하는 말입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면 안될 것도 없지만 그러나 조금만 빨리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 새어 마옵니다. 이 이야기를 초등학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어려운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 아니요”라는 말입니다. 천천히 해도 또 빨리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뜰에 콩깍지 깐 콩까지인가 안 깐 콩까지인가”하는 것은 자꾸 연습하면 안될 것도 없지만 ‘예, 아니오’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대한 말이기에 어렵다고 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생겨 먼저 약속을 취소할 일이 생겼을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먼저 약속은 “예”이고 두 번째 취소는 “아니오”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예, 아니오”를 아주 흔히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남발한다면 그 사람들을 가리켜 신의 없는 사람, 거짓말 잘하는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이라고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약속을 하고많은 계약을 맺고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약속, 부부끼리의 계약, 형제 사이의 사랑, 친구사이의 우정, 또는 동료 사이에도 어떤 약속 소에서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약속을 저버릴 때 불효자가 되고 모든 관계에서 신의를 잊어버리게 되면 의리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형태의 약속이든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맺어지고 행해지는 약속이 이처럼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나가서 보다 큰 약속, 보다 큰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인간과의 약속은 혈연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인정(人情)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돈이나 이익 관계일 수도 잇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생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와 하느님과의 약속은 나의 생명을 두고 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배반할 때에 바로 죽음이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약속을 했습니까?

우리는 세례 때에 이 약속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죄를 끊어 버리기로 약속을 했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 버리겠다고 했으며,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이 따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의 결과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죄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이 상태를 보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약속을 저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례 때에 “예”하고 대답을 한 사실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니오”하는 행동을 하는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인간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을 우리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느님과의 약속을 기키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무어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자,

둘째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하고는
“아니오”라는 대답과 같은 행동으로 포도밭에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가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너희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네가 해야할 바를 충실히 지키며, 죄를 끊고 악의 유혹을 끊으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힘써 일 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답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덧붙여서 말씀을 하십니다.
“예”란 대답을 하고 실행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아니오, 싫습니다”고 대답을 하고 실행하는 자가 훨씬 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예”하고 대답을 하고 그 대답에 충실한 행동을 하는 자일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놓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킬 때 우리는 영원한 삶과 생명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질 때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처럼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하느님을 원하고 선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받쳐서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굳은 결심 하에서 “예”하고 기꺼이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그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어떤 유혹이 일어나더라도 깊이 반성을 하면서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은 이상 열심히 하느님께 매어 달리고 충실히 생활하여 약속의 대가인 영원히 생명을 차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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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구본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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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한번 해보겠습니다

사도시대 이후 그리고 중세시대 이전까지 교회의 교리를 정립하고 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신앙과 교회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신 분들을 우리는 특별히 교부(敎父) 즉 교회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교부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신앙을 증거했으며, 설교로 가르쳤고, 수많은 저술들로 신앙의 진리를 확고히 했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모든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그들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이 그들에게서 발견됩니다. 대부분의 교부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질 사제직, 주교직, 그리고 교황직을 거부하거나 피했다는 것입니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사제 수품 직후 산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역시 자신의 주교 서품식 날을 피해 숨어버렸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또한 교황직을 사양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은둔해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암브로시오 성인도 자신을 주교로 내세우려는 백성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밀라노를 떠나 파비아 도상의 한 무덤에 몸을 숨깁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아프리카 교회들 사이에 성인의 이름이 회자됨을 알고 주교로 성품될 것을 염려하여 주교가 공석인 도시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제직에 대한 사양과 망설임은 그 당시 교부들 사이에서는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교부들은 깊은 신앙과 열정, 뛰어난 영성과 학식을 두루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누가 보든 성직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분을 거절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거부한 그 직무 없이는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왜 그리하였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그들이 남기 저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부들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사제직이 얼마나 존귀한 직분이며 또 그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과 어려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부들은 이러한 성직에 자신들은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며 그 직분에 비해 자신은 늘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질 성직을 사양했던 교부들도 결국에는 백성들의 요청으로 그 직분을 받아들입니다. 직분을 받아들인 후 교부들은 온 삶을 바쳐 누구보다도 충실히 목자로서의 삶에 투신합니다. 교부들은 두려움과 겸손으로 성직을 사양했지만, 결국 그 직분을 받아들였을 때에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싫다고 하였지만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첫째 아들의 모습은 아마도 교부들의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에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가지 않은 두 번째 아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불리웠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직무들이 있으며 자녀로서 그분께 드린 서약들이 있습니다. 세례, 견진, 혼인성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지키고 수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약속을 드렸습니다. 즉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재의 삶 속에서 그 약속이 잘 이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현실이라는 삶의 무게를 핑계로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교부들은 힘들고 두려웠지만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것이 두렵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시작해 봄이 어떨까 합니다.

정수철 야고보 신부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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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교리 신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모두가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앞에 두고 강의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수녀님들 앞에서 강의를 하려니까 쉽게 말문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2시간 강의를 힘들게 겨우 1시간에 마쳤습니다. 나중에 강의 마치고 방에 들어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수도자들 앞에 선 나의 삶이 부끄러워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완전한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들에게 얕은 신학지식을 가지고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가르치는 대로 정말 잘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신부는 죽으면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는 죽으면 귀만 천당 가고, 평신도는 죽으면 발만 천당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사제인 나는 참 말을 많이 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말 많은 이 세상에, 말은 잘 못해도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많은 말로 잘난 체 하며, 듣는 사람의 귀와 정신을 어지럽히고 현혹시키는 사람보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으로 겸손하게 살며, 보는 사람의 눈과 정신을 맑게 하는 그런 사람이 그립습니다. 적어도 나도 그런 사람들 축에 속하고 싶은데, 여전히 말 많은 나를 보면 아직은 욕심인 듯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번지르르 말만 잘 하고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말은 잘 못해도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셨듯이 목숨 바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실천이 어려운 법입니다. 사랑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말수는 줄이고 행동으로 사랑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래서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이호봉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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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말만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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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
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즉, 의인일지라도 불의를 저지르면 목숨을 잃을 것이고, 반대로 악인일지라도 자신의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목숨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예언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의 삶에 있어 ‘공정과 정의의 실천’이 중요함을 예언자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명령에 전혀 다른 행동을 한 두 아들의 얘기를 들려주십니다.

이 얘기에서,
맏아들은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는 아버지의 명에 “싫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대답은 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진정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사람은,
대답은 “가겠습니다.”고 해 놓고 가지 않은 아들이 아니라, “싫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맏아들입니다. 그저 ‘말로만의 대답’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이 우리 신앙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우리들이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함을, 또 ‘그저 말만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이 필요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신앙의 삶은 그냥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증거 되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말이나 입으로만 우리 신앙의 삶이 증거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앙의 삶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매일매일 충실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9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덧 한 해의 4분의 3이 지나간 셈입니다. 사실 올해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힘듦 때문에
혹시나 자신의 신앙의 삶을 소홀히 해 오지는 않았는지 살펴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이 오든지, 어떤 어려움이 오든지 충실히 우리들이 지켜나가고 행해야 할 것은 신앙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삶은 그냥 말로만, 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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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종현 요셉 신부
2020년 9월 27일 <대구대교구 주보>에서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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