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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시간이라는 밭에 무엇을 자라고 있는가?
조회수 | 2,094
작성일 | 08.10.04
어제는 제 동창 신부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과로를 해서 그랬는지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걸려서 입원해 있거든요. 그래서 함께 병문안을 갈 다른 동창 신부와 함께 우선 할인 마트에 가서 먹을 것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많아서 그런데요, 사실 병원 음식이 그렇게 맛이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희 둘은 병원에서 먹으면 좋을만한 음식들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회, 회덮밥, 떡볶이, 꼬치구이 등등....

음식을 어느 정도 구입한 뒤에 우리들은 공구를 파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게 꼭 필요한 공구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공구는 그 마트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공구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공구에 대한 욕심이 조금 있답니다. 즉, 공구만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요, 제가 별로 쓸 것 같지도 않은데 구매를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제도 제 마음에 쏙 드는 공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그와 비슷한 공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구가 왠지 더 좋아 보이고, 그 공구와 함께 따라오는 사은품이 제게 너무나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살까 말까를 생각하면서 그 앞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떠올려진 생각이 하나 있어요.

저는 단지 병문안을 가서 환자에게 먹일 것을 사러 이곳에 온 것이거든요. 그리고 공구는 그냥 온 김에 하나 구입하려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저는 원래 목적인 먹을 것을 구입하는데는 별로 갈등하지 않고, 대신 부수적인 것에 더 집중하면서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이 욕심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도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지요.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사랑’에서 벗어나 다른 것들을 소유하고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욕심’의 몫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들은 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이러한 욕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주인은 울타리와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소출을 많이 내서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다 준비를 해 놓았지요. 그리고는 마음껏 농사를 지어보라고 그 자리를 소작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조건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소작인들이 했던 행동은 너무나도 의외였습니다. 풍성한 소출로 대답한 것이 아니라 빈손을 대답했고, 뜨거운 박수로 응답한 것이 아니라 구타로 응답했고, 열렬한 감사와 환영으로 보답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죽이는 것으로 응답을 했지요.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시간이라는 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라는 밭에서 많은 소출과 소득을 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춘 우리들의 이 몸을 주셨습니다. 또한 여기에 무엇이나 심고 가꿀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선택의 자유까지도 주셨지요.

그런데 과연 여러분은 시간이라는 밭에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습니까? 혹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처럼 욕심과 탐욕을 키우고, 이를 억지로라도 간직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자신이 꽉 잡고 있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이를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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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습니다. 글쎄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어서 14억여 원을 받은 20대가 20개월 만에 돈을 모두 탕진한 뒤 도둑질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사였지요.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길들여진 헤픈 씀씀이 때문에 유흥비로 20개월 만에 당첨금을 모두 탕진했는데, 문제는 그 뒤에도 사치와 향락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해 절도행각까지 행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역전’이라는 복권의 광고 카피처럼, 평범한 사람이 복권 때문에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는 인생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통계 결과도 언젠가 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꼭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닌가 싶네요. 이런 이야기 있습니다.

영국 사람이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왜 이탈리아는 기후도 좋고 풍광도 아름답게 해주시고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까?”

이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게으름을 주고, 너희에게는 근면을 주지 않았느냐?”

한국 사람도 하느님께 따집니다.

“왜 중동에는 석유를 주시고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이렇게 명답을 말씀하셨지요.

“대신 너희에게는 아름다운 산과 물을 주지 않았느냐? 중동에서는 기름 값보다 물 값이 더 비싸다.”

물질적인 풍요나 인간적인 존경과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 체험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에 ‘감사’가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서 문득 그 괘씸한 소작인이 바로 내가 아닐까 싶습니다.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라고 성경은 말하면서,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해서 나누어주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고, 이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하느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받은 것보다는 받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기에, 감사하기는커녕 복음에 등장하는 소작인처럼 주인이신 하느님께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죽이고 심지어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을 뛰어 넘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리는 소작인의 모습. 그런데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이웃들을 향해 아픔과 상처를 주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작인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만이나 욕심 없이 만족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일본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미우라 아야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릴 정도로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폐결핵, 직장암, 파킨스병, 척추 카리에스 등이 그의 연약한 육체를 공격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999년 주님 곁으로 가는 순간에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고 하지요.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뿐입니다. 그 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다시금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그리고 이제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 기도만이 나를 탐욕이 넘치는 소작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 앞에 겸손되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을 생각해 봅시다.

조명연 신부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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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공경이란 기회의 은총을 주신 하느님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갑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례도 끝을 향해 나아 가고 있습니다. 연중 제27주일, 군인의 날, 노인의 날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겐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삶 안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있기에 그 아쉬움을 달래고 앞을 바라보며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겐 아직 기회란 소중한 은총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함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중한 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태 21,42)라고 말입니다. 과연 세상에 누가 ‘집 짓는 이’들일까요? 그리고 누가 ‘내버려진 돌’일까요? 전지전능하신 분의 눈에는 뚜렷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구분할 능력도 지혜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저 한계를 지닌 인간의 눈으로 구분해볼까 합니다.

우선 ‘집 짓는 이’들은 바로 세상 속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일을 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이겠죠. 그저 막연히 행복한 미래가 펼쳐져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럼 ‘버려진 돌’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제 더 이상은 내 힘으로 일을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하지 못하시는 노인들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사회 소외계층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노인이라는 약자 아닌 약자는 처음에는 우리처럼 ‘집 짓는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버려진 돌’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노인의 범주에 속할 테니까요.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언제나 ‘버려진 돌’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실 테니까요. 즉 지금 이 사회의 기둥이 되어 살아가는 세대의 위에는 현재 노인이라 불리는 세대가 존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현재의 기둥이 되는 세대의 원천은 전 세대에게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아버지, 어머니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버려졌다고 여겼던 ‘버려진 돌’은 결국 우리 삶에 ‘모퉁이의 머릿돌’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다시금 찾으셨습니까? 우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노인이라 불려 우리의 삶 안에서 무시되고 있지만 언젠가 나도 노인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소외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미리 방지하는 길은 바로 우리가 모범이 되어 노인 공경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발전 계승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삶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공경하며 사랑하는 우리의 삶을 원하실 테니까요. 만일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직접 그분들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은총마저 잃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기회는 우리가 스스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위에 소외된 노인분들을 한 번쯤 더 돌아보는 일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나를 위한 삶이기도 합니다.

문용길 아론 신부
  |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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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수많은 가르침과 함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를 금세 잊어버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불충과 배반을 거듭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갖가지 깨달음의 은총과 크고 작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지만 우리는 그 은혜들을 자주 잊어버리며 살 아 가 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배은망덕한우리의 삶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포도밭 주인은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설치하고 그 밖에 필 요한 시설을 모두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소작인들에게 마음껏 농사를 지으라고 그 자리를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을 주었지만, 그들은 소출을 거두러 온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주인은 실망하였지만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소중한 외아들까지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아 들마저도 잡아 죽였습니다. 이렇듯 주인은 믿었던 소작인들에게서 큰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소작인들은 처음에는 주인에게 너무나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들을 소작인으로 불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포도밭에 모든 시설을 준비해 놓고 자신들이 편하게 관리만 하도록 배려해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고마움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포도밭을 관리했고, 마침내 많은 소출을 수확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포도를 수확하고 나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소출을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의 결과물로만 여기게 되었고, 포도밭의 주인은 당연히 자신들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결국,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일구는 포도밭마저 빼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포도밭이 ‘포도밭 주인의 것’인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재산과 능력 우리의 존재마저도 모두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잠시 파견된 소작인들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우리들에게 풍요로운 세상을 주시어 많은 소출을 내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 하며, 그 사랑으로 맺게 된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 인천교구 류범선 루치오 신부 - 2017년 10월 8일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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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고 안정적인 가정에 사는 그리고 서울의 S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학교에서도 늘 좋은 성적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능 당일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원하는 점수를 맞지 못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학생은 자신의 이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노는 것처럼 보였던 친구는 손쉽게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것입니다. 자신은 놀지도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 친구와 자신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불만입니다. 부모님께서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주지 않아서 그런 것처럼 생각되었고, 소위 족집게 과외를 하지 못해서 이러한 끔찍한 결과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미웠습니다. 부모도 밉고 친구도 밉습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자신에게 준 주님도 미웠습니다.

이 학생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만을 비교하고 있으니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함께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비교는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욕구를 포기할 때 인간의 강한 면모가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강한 자아가 형성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각 개인에게 평화가 깃들이려면, 각자가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고 또 이 욕구를 충족하는 일을 자신에게 허락하는 한편 욕구 충족을 포기하려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고 합니다.

포도밭의 비유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포도밭 임자는 직접 포도밭을 일구었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도 세웠습니다. 일꾼이 할 일을 직접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소작인들에게 이 모든 것을 내주고서 멀리 떠납니다. 그런데 포도 철에 소출을 받아 오라고 보낸 종들이나 아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받았는데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괘씸한 행동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채우려는 마음에 상속을 받을 아들과 자신들을 비교했던 것이지요. 비교 대상이 사라지면 욕구를 채울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포도밭 임자는 이 소작인들을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을 고용합니다.

욕구를 충족하기를 바라는 비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수록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도 없으며, 진정한 평화와 기쁨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싸워서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도망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어두움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주 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바로 빛이 들어오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어두운 생각을 물리칠 빛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10월 8일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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