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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조회수 | 1,816
작성일 | 08.10.23
너희가 과부나 고아를 억누른다면, 나는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탈출기 22,20-2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0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21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22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23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24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25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26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1,5ㄴ-10

형제 여러분, 5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6 또한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울려 퍼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묵상

한 아가씨가 두 남자와 선을 봅니다. 모두 조건이 좋은 남자입니다. 첫 남자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마을 뒷산을 돌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남자가 멈춰 서며 말합니다. “잠깐, 뱀이 있는 것 같군요.” “어머나 어디에요?” 아가씨는 놀라 소리칩니다. “저기 나무 밑을 보셔요. 아, 죽은 것 같군요. 너무 놀라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표정은 굳어집니다.

다음 날 두 번째 남자와 산책을 합니다. 일부러 그녀는 어제 그 나무 옆을 지나갑니다. 그러자 남자가 말합니다. “그냥 똑바로 가시지요.” “왜요? 뭐가 있는가요?” 아가씨는 퉁명스럽게 묻습니다.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대신 저기 들꽃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남자에게 묻습니다, 나무 밑에 죽은 뱀이 있었는데 왜 못 보게 했냐고. 남자가 대답합니다. “안 좋은 것은 한 사람만 보는 것으로 족하지요.” 아가씨는 마음속으로 그를 선택합니다.

사람에겐 운명적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큼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실천의 첫걸음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좋은 정보와 좋은 말을 전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사랑의 관계는 깊어집니다.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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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갑니다. 신학교 시절, 어느 가을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지도 신부님은 우리에게 사제직은 외로우면서도 고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미셀 콰스트 신부의 기도 시집 『삶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주일 저녁 모든 일과를 마치며 느끼는 본당 신부의 소회를 표현한 기도 한 편을 읽어 주셨습니다.

“주님, 오늘 밤, 저는 혼자입니다.
성당 안의 소음도 차츰 사라지고
모두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 혼자서.
주님, 저를 보십시오.
저는 혼자입니다.
침묵이 나를 숨 막히게 하고
고독이 나를 괴롭힙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중략)
혼자라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것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고통과 죽음과 죄 앞에 혼자 서 있다는 것
주님, 정말 어렵습니다 …….”

이 기도의 몇 대목을 읊조리면서, 우리 사제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신 참된 사랑의 갈망을 따라가려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위한 삶은 때로는 이해받지 못하고, 외로우며, 지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사랑을 혼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귀한 길을 포기하여 외로움을 ‘잊는’ 어리석음 대신에, 그 길을 인내함으로써 사랑 안에서 벗을 ‘얻는’ 삶을 선택할 용기를 가집니다. 이 기도의 마지막 대목이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제 몸도 제 마음도 제 영혼도, 다 여기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주님께로 향해 가는 길이 되게 하시고
아무것도 꺾일 것이 없는 길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주님 앞에
혼자 있습니다.
이 밤의 평화 속에서.”

<매일미사 2014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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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사랑처럼 인생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것도 없으며 사랑처럼 인생을 환하게 밝혀 주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사랑은 인생을 아주 풍요롭게 채워 주며 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도 해 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는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약한 자들은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즉 병든 자, 헐벗은 자, 그리고 과부나 고아들은 누가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주 외롭고 고달픈 자들입니다. 그들에겐 붙잡을 것이 하느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대상자가 됩니다.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는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크게 됩니다. 누가 돌봐 주지 않으면 안되는 자녀에게 부모의 애정이 쏠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가 혹 불구된 그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베푼 것이 바로 당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첫째는 하느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사랑은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질이며 율법의 본질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613조목이나 되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계명이 너무 많아서 모두를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도 몰랐습니다. 율법의 조목만 풍성했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법의 본질과 그 정신을 몰랐습니다. 바로 거기에 신앙의 모순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백성이 지키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오히려 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위대한 사랑의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는 채 죄만 크게 짓게 되는 모순 속에서 고생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실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로 이해되고 해석되는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무시하고 있다면 그 하느님 사랑은 위선이며,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역시 잘못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길을 참 사랑인 양 걸어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사목회 임원으로서 열심히 봉사할 뿐만 아니라 교리 상식에도 밝았습니다. 그분 얘기를 들으면 믿는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은 당신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레지오 문제로 누군가와 언쟁이 있었는데 몇 달이고 그 사람 하고는 상종을 않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참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쁜 사람을 사랑하고 돈있고 세력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심지어는 강아지나 돼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웃 사랑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사랑이며 동시에 이웃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다 얻는 것이 됩니다. 잘먹고 잘살아도 사랑이 없다면 지옥입니다.

그러나 헐벗고 못살아도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는 천당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그것이 참 하느님 사랑입니다.

▦ 가톨릭신문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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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글줄깨나 쓰고 말발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싸움을 걸어옵니다. 만만치 않은 그분과 논쟁을 벌이며 자신들이 옳음을 관철시키려 하지만 그들의 약점과 허점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들의 지식과 권위와 명성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34절)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논쟁은 사실 터무니없었습니다(23­-33절).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 몸 바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이지만, 부활이 지상 생활의 복사판은 아니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치에 닿는 몇 마디 말씀에 사두가이들은 말문이 막혔고 군중들은 그 가르침에 다시 한 번 탄복했습니다(33절). 바리사이들은 부활 문제에서 사두가이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다 사이도 좋지 않았던 터라 이 소문을 듣고 내심 통쾌해했습니다. 모처럼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두가이들 코를 납작하게 만든 예수님을 만나러 우르르 몰려옵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35절) 바리사이들은 종교 규정을 완벽하게 준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과연 예수님께서 얼마나 알고 계신지 떠보려고 합니다. 뭔가 속셈이 엿보입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힐렐 랍비는 모든 계명 가운데 황금률(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7,12 참조)을 최고 계명으로 쳤고, 샴마이 랍비는 모든 계명을 빠짐없이 철저히 준수하라고 가르쳤습니다. 613개나 되는 율법 규정 가운데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다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들입니다. 백성들은 이 복잡하고 어려운 율법을 암기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적어도 어디까지는 꼭 준수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요지는 어떤 계명이 율법 전체를 하나로 요약하고 한번에 지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문을 인용하여 하느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여기서 약간 수정하십니다. ‘힘을 다하여’를 ‘정신을 다하여’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은 인간의 온전한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곧 하느님께 생명과 인생 전체를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 전체를 ‘사랑’으로 요약하십니다. 사랑은 의무와는 다릅니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이며 기쁨이며 충족입니다. 의무나 책임으로 똘똘 뭉친 율법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사랑은 율법의 해방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첫째가는 계명이란 모든 종교적 삶을 결정짓는 주된 계명을 말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둘째 계명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려진 레위기의 이웃 사랑을 꼽으십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동포만이 이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은 제한이 없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따져가며 하는 사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도 같습니다. 모든 이가 내 이웃이고 나도 모든 이에게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가 똑같이 주어집니다. 나와 이웃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인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가는 계명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계명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얘기합니다. 율법학자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예수님은 그의 슬기로운 대답을 칭찬하시며, 하늘나라가 그에게서 멀지 않다고 하십니다(마르 12,34).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40절)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관하여 물었으나 예수님은 사랑 타령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충실성을 얘기하는데 하느님은 사랑의 충실성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에 충실하다면 613개의 율법 규정을 준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이 성경 전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더 올바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성경 전체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에 그토록 열정적이던 바리사이들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들 스승들이 가르친 것과도 통할 것인데 묵묵부답입니다. 백번 옳은 말씀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속셈 따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입만 떼시면 한결같이 진리의 말씀이십니다. 사랑에 충실하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든 강제적인 법 없이도 응답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곧 예수님은 수난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웃을 용서하시고 그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 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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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초세기부터 지향한 완덕의 길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느 정도 세상에서 이탈하는 것을 뜻합니다. 도를 터득하려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종교가 가진 공통적인 방법론이고, 가톨릭 교회의 초기 수도자들이 택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을 거쳐, 진정한 완덕의 길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에 대한 기도와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허울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아름답게 꾸며지는 ‘내면의 삶’도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우리 이웃들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고 완성됩니다. 그래서 내면의 삶은 바로 우리 외적인 인간관계들의 원천이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려고, 그리고 하느님만을 생각하려고, 잠시 이웃들과 떨어져 지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리듬이 있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도와 활동의 리듬 안에서 늘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는 삶입니다. 기도는 활동을 지향하고, 활동은 기도로 우리의 삶을 초대합니다. 이 두 가지의 조화 안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거룩해지며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두 가지 계명은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완벽한 계명이며, 가장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미사 2017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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