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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조회수 | 2,070
작성일 | 08.10.25
사랑이란 무엇일까? ‘함께’하고픈 그것이 아닐까? 함께 있고 싶고, 함께 하고 싶고,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두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라고 표현해도 될까?
  
조병준이 저술한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은 저자가 인도 캘커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 집에서 봉사를 하면서 만난 친구들과의 소소한 일상을 정리한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봉사자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매우 감동적이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부와 명예와 같은 세속의 허물을 벗고, 고통 속에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 안에서 참된 사랑을 찾고 있었다. 이들이 이웃과 함께 하고자 하는 모습 속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들이기에 이웃과도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참 쉽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줄 모른다. 우리를 위해서 간도 쓸개도 다 내어주실 하느님이신데, 우리는 주는 대로 다 받아 누리면서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종종 감사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늘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모습이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평소에는 서로 웃고 인사도 나누며 다정한 사이였다가도,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바로 얼굴을 돌려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행복, 다른 사람이 이룬 성공만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 ‘왜 저에게는 남들과 같은 선물을 주지 않으십니 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의 불행과 실패를 보면서 하느님께 ‘남들의 불행과 실패를 왜 저에게는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함께’라는 생각만 하고 지낸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바로 내 옆에, 우리 곁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만 알고 지낸다면, 내 가족을 비롯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소중한 내 이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함께 할 때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두 계명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울긋불긋 아름답게 수놓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가족에게 맑은 미소를 보내보자. 이 세상이 왜 살만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지용(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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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부심 - 사랑

2000년 전까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부심(自負心-self conceit;pride)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기에 거룩한 백성이며 하느님께서 몸소 사랑으로 돌보시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계약과 모세와 함께 하신 시나이 계약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신 예언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믿음 위에 세워진 자부심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어 왔습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통해서 얻은 그 자부심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율법-commandments>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약속에서 나온 법조항으로서 그 바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법 자체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자랑이 되고(바리사이) 혹은 짐이 되어(일반백성) 바탕에 있는 ‘사랑’은 점차 뒤로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계약과 계명에 본래 목적과 바탕을 되새길 수 있도록 모세오경 가운데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새롭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당에서 가르치는 십계명이나 사랑실천에 관한 가르침을 들을 때 식상해 하면서도 정작 왜 실천해야 하는지, 또 얼마만큼 실천하고 있는지는 모른 채 꺼려하지 않았던가요?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큰 계명 혹은 삶에 있어서 으뜸가는 모토(moto)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임을 잊지 맙시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말이죠. 사실 우리의 봉사도 우리의 희생도 우리의 삶도 사랑을 빼놓고 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빠진 봉사는 자기 업적이 되고, 사랑없는 희생은 짐이 되며, 사랑없는 삶은 무미건조합니다. 사랑, 그것은 우리의 자부심이며 우리의 전부입니다.

강희재 신부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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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군인으로 살며 하느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며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역시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과 이웃 사랑은 완성된 것이 아닌 언제나 진행되어야 하는 우리들의 삶 자체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와 같이”라는 말씀으로 신앙인의 사랑 계명은 나와 함께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저는 특별히 ‘함께 하는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군종 신부로 살아가면서 많이 듣는 질문이 “신부님도 군인이세요?”입니다. 처음에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하게 ‘군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군인들을 사목하는 사제로서의 소임은 변함이 없지만,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군에 들어와 군인의 신분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스스로 군인이라 여기면 이들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집니다. 밖에서 군복 입은 사람만 보아도 절로 고개가 돌아갑니다. 특히 근무했던 부대 마크를 보면 괜히 아는 체도 합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군 헬기를 보면 ‘오늘도 안전운행을 기원합니다.’라며 화살기도를 바칩니다. 육군 항공 학교에서 사목을 하면서부터 생긴 습관입니다. 병사들을 대하는 모습이 다른 종파의 군종 장교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신부들 모두 병사 생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시대는 많이 지났지만 의무 복무라는 상황 속에서 무엇이 힘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함께 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종 신부가 군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군인들을 더 사랑하기 위한 큰 의미입니다. 군종 신부로 임관을 준비하는 교육시기에 한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군인들을 사목하려 군종 신부를 준비하는 신부님들은 더욱 군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처음에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른 채, 자꾸 군인으로 통제하려는 군종 신부의 삶이 싫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4년을 의무 복무하고 교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군종 신부로 7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요즘 주교님 말씀의 의미를 많이 생각해 봅니다. 군인 신분이라는 불편한 삶은 오히려 군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준다고 느껴집니다. 오늘도 불편함이 아닌, 더욱 군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군인 신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 신분은 군인이라 답하며 이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멘!”

,수원교구 김창중 루카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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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예수님께서는 그 많던 율법조항을 이 두 개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모아 주셨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그런데 원래 복음에 나오는 율법 교사는 단한 가지 대답만을 원했었습니다. 가장 큰 계명 그 한 가지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을 먼저 일러주시면서 덧붙여 둘째도 이와 같다고, 즉 똑같다고 하시며 이웃 사랑과 하느님사랑을 동일하게 만드시면서 답변하셨습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 조항들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믿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향한 진정으로 지혜로운 대답이셨습니다. 반면 우리는 사랑의 이 두 계명을 너무 자주 듣게 되어서, 이젠 익숙해져 버리지는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내게 맞는 사람들이나 내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지… 내게 맞지 않는 이들에게는 거리를 두는 우리,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리며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우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순진한 아이들의 그 사랑스러운 모습들, 아낌없이 자신을 주고 믿을 줄 아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어른들의 마음은 사랑하기엔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겁 많고, 게을러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도 사랑의 치료제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그 지고한 사랑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 그런데 예수님의 그 사랑은 똑같이 우리에게로 향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은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저녁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횡과 종이 한 점에서 모이는 것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사랑은 성체 안에 하나로 모입니다. 성체 안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셨던 그 사랑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랑은 성체 안에서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 사랑을 영하고 힘을 얻으라고, “자, 이제 너희도 사랑하라.”고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식탁으로 부르십니다.

▦ 수원교구 김영삼 요셉 신부 - 2017년 10월 29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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