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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사랑하기
조회수 | 585
작성일 | 17.10.25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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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일까?
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내가 무엇을 위해,
무슨 낙으로,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질문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참 의미 있는 초대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의미를 두며, 어떻게, 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하는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답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내 삶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지극히 상호적인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다른 이웃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위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어서 행복하지 못하면 그 불행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방치해둔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아픔과 도움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이웃 사랑이 정말 하느님께서부터 나오는 그런 성숙되고 진실한 사랑인가 생각해 봅니다. 사랑은 희생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 희생조차도 사랑이고 기쁨입니다. 의아함이나 의구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있는 우리를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하느님은 우리들을 대견하게 보시며 흐뭇해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이라는 기준과 가치로 살아간다면 궁극적으로 기쁘고 행복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와 함께하는 이웃들입니다. 세상이 행복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이 좋은 ‘사랑하기’가 안타깝게도 일상에서는 시기와 질투, 탐욕에 뒤처집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화, 짜증, 불만, 불평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기를 어떻게 하면 쉽게 그리고 내 삶의 최우선으로 할 수 있을까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보세요. 내가 그런 사람인데 또 누구를 찾아가 보란 말이야! 세상에는 내가 나눠줘야만 하는 그런 분들이 최소 한 명 이상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지금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나눌 수 있는 어떤 것 한 가지는 있습니다. 가난은 나눌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눌 마음이 없는 것이 가난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눈을 마주하고,
그분들의 손을 잡을 때 우리 마음 안에는 ‘사랑하기’가 자리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모를지라도 ‘사랑하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마음이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향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면 행복해지니까요.

‘사랑하기’가 우리 삶의 최우선이 될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랑받고, 행복해지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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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동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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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익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삶을 익어가게 하는 ‘사랑' 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우리 인간을 익어가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약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병든 자, 헐벗은 자 등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먼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 누가 불구된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프고 더 쓰릴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에는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곧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자유와 해방」(1986)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신학의 기본입장과 기본정신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딸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렇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과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자신과 형제를 사랑한다면, 자신과 형제를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귀함에서 오며, 자신에 대한 존귀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실,
이러한 ‘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교의 영성을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되고, 한 아버지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지니게 되고, 형제의 바람과 요구를 깊이 공유하며 깊고 참된 우정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서로 한 생명이 되고, 하느님은 사랑이 됩니다.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요,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의 혁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곧 사랑의 혁명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 강론(2014,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어진 사랑의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혁명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22장 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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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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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10월 25일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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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22장 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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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는 사랑의 길이다. 하느님 사랑이 마음을 살리고 목숨을 살리고 정신을 살린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한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며 사랑의 기쁜 관계이다.

계명의 본질 또한 하느님 사랑에 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삶의 방향성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율법에서 자유롭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참된 계명이다. 사랑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온 삶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길이다. 생명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하다. 영원한 사랑의 기쁨은 오직 하느님 사랑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사랑은 나눌 때 가장 풍요롭다. 가장 기쁜 나눔의 주일이다. 마음을 나누고 목숨을 나누고 정신을 나누는 기쁜 복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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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10월 25일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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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사랑 공부

-1.하느님 사랑,
2.나 사랑,
3.이웃 사랑,
4.자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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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시편 18편 2절)

서울주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온 오늘 시편 화답송입니다.
이 시편구절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 16편 2절)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어제도 상담고백성사 후
세 차례 형제들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함께 십자성호를 긋고 기념 사진을 찍으니 밝고 환한 모습이 그대로 성화聖畫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이 또한 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 받고 싶어하는 것은 생래적 본능입니다. 하느님의 모상 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사랑하라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사람이니, 사랑-삶-사람은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이자 ‘사랑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입니다. 사랑공부에는 끝이 없고 우리는 사랑공부에는 영원히 초보자일 수뿐이 없습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서 겸손의 덕입니다. 또 사랑의 여정중에 날로 성장, 성숙되어가야 하는 사랑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육신은 노쇠해가도 성장, 성숙해 가는 사랑과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사랑 결핍이 만병의 근원이요 사랑만이 만병통치약입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사랑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길도 사랑뿐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은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확인해 주십니다. 율법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교사의 물음에 주님은 거침없이 대답하십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우선적인 만고불변의 진리가
이런 갈림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수행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수행이 참으로 우리를 순수하고 자비롭게, 겸손하고 지혜롭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명하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참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입증됩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아가페 순수한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이 없는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약자보호법에서
이웃 사랑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신 하느님이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들을 사랑할 수뿐이 없습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너희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 주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입니다.
하느님은 친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보호자 배경이 되어 주십니다. 이들이 부르짖으면 하느님도 그 부르짖음을 들어 주신다 합니다. 오늘 탈출기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나는 자비하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랑으로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하셨고 몸소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전히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 사랑 공부의 롤모델이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셨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참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체험해야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열면 언제 어디서나 와닿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이 바로 사랑 받고 있음의 체험입니다. 새삼 행복뿐 아니라 감사도 사랑도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바로 제2독서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깨달을 때 저절로 회개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내가, 이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달아 더욱 하느님을 예수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여 하느님은, 예수님은 물론, 자기도 남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 아끼고 사랑합니다.

회개의 모범이 역시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입니다.
이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사랑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다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성소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늘 사랑에는 초보자이자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웃이란 개념을 확장해야 할 시대입니다,
사람만 이웃이 아니라 공동의 집인 지구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피조물이 이웃 형제들이라는 자각입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모두가 공멸할 위기에 처해 있는 작금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와 소비, 횡포와 탐욕으로 날로 황폐화 되어가는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된 이웃 자연환경들이요 멸종되어 가는 무수한 피조물 이웃들입니다. 사람 이웃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 이웃도 아끼고 사랑하는 공존공생의 지혜와 사랑이 참으로 절박한 때입니다. 하여 생태적 회개가 절실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충만케 하시어, 온 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나와 이웃 사람 형제들뿐 아니라 피조물 자연 형제들도 아끼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끝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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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신부
2020년 10월 25일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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