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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성령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신다"
조회수 | 125
작성일 | 20.05.15
[전주] “성령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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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올 한 해 코로나19 사태를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공동체적 삶을 권장하게 되었고, 이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새로운 형태의 신앙생활을 모색하게 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모여 봉헌하는 미사가 중단되고, 대중매체를 통해 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까?’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좀 더 근원적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물음을 던져주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사마리아에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이어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됩니다. 이들이 받은 성령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보호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미사를 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걷도록 가르치시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고 삶의 자리에서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법인데, 이 이끄심은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응답이란 말씀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처신이 이루어지는 것’(1베드 3,16 참조)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한 14,15 참조).

우리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이끄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을 통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내일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항쟁하였던 위대한 시민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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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진일종 스테파노 신부
2020년 5월 17일 전주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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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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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긴 동굴을 지나 밖에 나오니 세상은 온통 푸르름, 꽃이 만발합니다. 꽃, 꽃, 꽃! 오랫동안 실내에 두었던 텃밭 상자의 상추와 치커리, 로즈마리도 햇볕을 쬐고 나니 놀랍게 푸르고 단단해졌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햇빛과 바람을 받아들이기만 했는데도 식물이 광합성 작용으로 변화됐습니다. 이 모습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일어나는 우리 영혼의 광합성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합니다. 아멘!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나누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산란해진 제자들의 마음(부활 제5주일)을 위로하고 예수님이 떠나셔도 그들이 그분 일을 계속 하도록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어질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준비하는데,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약속에 대한 다섯 개 담화 중 첫 번째입니다.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이제 떠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께 청하시어 ‘다른 보호자’를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의 동반자가 되게 하십니다.(요한 14,16) ‘청하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간청이 아니라 간절한 갈망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은 꾸준한 기도, 중요한 고비에서 그분 자신을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맡기며 일치를 이루는 기도입니다. 아들의 순종을 보시고 항상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아버지는 이제 예수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입니다.(요한 15,26;16,7)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요한 20,22)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주도권으로 성령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는데 맞갖는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삶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전제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선해집니다.”(마틴 슐레스케, 「가문비 나무의 노래」)

■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호자’는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Paràkletos)입니다.

요한 복음서에만 나오는데(요한 14,16.26;15,26;16,7;1요한 2,1)
‘가까이 불린’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문학에서 원래 법정 용어로 사용했고
피고인 옆에 앉아서 그를 변호하는 변호자를 가리킵니다.
이 말에는 ‘위로자’라는 실존적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힘든 순간에 어려움을 겪을 때, 근본적인 고독을 느끼며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 옆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함께 짊어지는 ‘위로자, 협조자, 돕는 이, 보호자’를 뜻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적대시하는 세상에 어떤 변호자도, 위로자도 없이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사용하는데 성령에 관한 여러 표현은 성령이 누구신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성령의 활동이 예수님의 직무에만 해당됐다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의 활동까지 확장됩니다. 요한의 성령 개념은 유다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주님과 백성 사이에서 ‘변호자, 중재자, 위로자’ 역할을 한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유다 전통에서 이것을 가져와 자신의 복음서에서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청하시는 이 보호자는 ‘다른 보호자’입니다. 첫째 보호자는 이제 떠나시는 예수님이시고 ‘다른 보호자’, 곧 성령은 그분 청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반자입니다.

■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도 부르십니다.

이 영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 곁에 머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머무시는 분은 몇 시간 후에 ‘우리 안에’ 계실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전달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영이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의지, 영감, 실행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고 양들을 모으는 예수님 직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계명을 지킬 때에만
그들의 소명을 완성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 끝까지 그리고 종말까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확장시킬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 교회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돼 가는 것을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계획대로 복음은 예루살렘을 거쳐 사마리아에까지 전파되고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풉니다.(1독서)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서도 성령이 불어넣는 희망과 인내와 용기와 온유함으로 그리스도를 용기 있게 증언합니다.(제2독서)

하느님 아버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 내면 안에 함께 사십니다. 감사합니다. 성삼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을 헛되게 살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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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 삶 연구소 소장
2020년 5월 17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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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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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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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과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믿음’은 곧 ‘삶’이 되어야 하고, 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또 만일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좋아하는 감정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실천은, 멍에와 족쇄에 묶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사랑 없는 실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여기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라는 말은, 큰아들이 작은아들과는 다르게 대단히 성실하게 일했음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없이 ‘일만’ 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일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기쁨도 없습니다. 그는 종이 아니라 아들인데도, 자기 자신을 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따라서 그의 성실함의 가치는 인정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순종’을 나타내는데,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는 상태에서의 순종은‘자녀의 순종’이 아니라 ‘노예의 복종’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의 순종도 별로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성실함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고 마음속은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혹시라도, “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꺼이’ 참는 것과 ‘억지로’ 참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참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계속 죄를 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 같은 태도로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도 없이 기쁨도 없이 겉으로만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자기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또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 또는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정말로 잘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지키긴 하지만 사랑 없이 지키는 사람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솔직하게 반성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내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이미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신앙인은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 실천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웃 사랑’의 경우에, 사랑 실천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내 쪽에서 마음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그 이웃의 입장에서 판단할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경우에는 하느님(예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랑 실천인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 쪽의 사랑 실천은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종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종파도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이단도 많고 사이비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자기들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어떤 규정이나 전통만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종파는 예수님을 믿는 종파가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들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예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공동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들을 할 때 그런 태도를 자주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사이비로 전락하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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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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