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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새 사람과 완덕
조회수 | 82
작성일 | 20.08.28
[청주] 새 사람과 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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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인의 첫 관문은 세례성사입니다.
세례성사는 모든 죄를 정화하고, 새 신자를 “새사람”이 되게 하며,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 성령의 성전이 되게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65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한 몸이 되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표지(인호)를 받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내재한 나약함과 죄로 기우는 경향인 사욕(邪慾, 죄의 불씨)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욕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64항).

이렇듯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의 행위는 새로운 존재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시며 베드로에게 호통을 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이라 하시며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긴 분께서 오늘은 베드로를 사탄이자 걸림돌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로서 베드로는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그의 행위는 새로운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 사람”이 된 베드로와 우리에게 그 존재를 드러낼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 16,24)

그렇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새 사람에 걸맞는 ‘행위를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행위의 완성’이란 다른 말로 ‘완덕(完德)’이라 합니다.
우리가 완성해야 할 덕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향주덕’과 선을 지향하는 ‘윤리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완덕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통해 성화 되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입니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 진보는 참 행복의 평화와 기쁨 안에서 살도록 점차적으로 인도하는 고행과 극기를 내포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015항).

형제 여러분,
우리는 ‘새 사람’으로서 사욕과 싸우며 덕을 쌓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욕에 져 악을 행하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길이 아닙니다.

내 힘 만으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도움(은총)과 함께 하는 형제들이 있기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도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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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재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2020년 8월 30일 ‘청주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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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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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하여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고상을 끌어안으며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십자가에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하시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듯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고통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로마서 8,29)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맞추고 합리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행전 22,10) 묻고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가정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을 관철하려 하니까 불협화음이 납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도 서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활동만 있고 사랑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음에 안타까워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 자녀, 배우자, 친구, 술, 도박이 십자가입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을 보면 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고 순종하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져줄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 걸림돌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기도하게 만들며 침묵하고 희생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 옵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의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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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와 뱀은 앙숙이랍니다.
그래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독을 뿜어 낸답니다.
그런데 두꺼비가 새끼를 배면 일부러 뱀을 찾아가서 약을 올립니다.
그러면 뱀이 화가 나서 두꺼비를 통째로 삼켜 버립니다.
그러면 두꺼비는 뱀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독을 뿜어내고 마침내 뱀의 뱃속에서 숨이 막혀 죽고, 뱀은 두꺼비의 독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꺼비와 뱀이 썩은 시체 안에서 살아나는 새 생명이 있는데 그것이 두꺼비 새끼들이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 줍니다.
두꺼비는 자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뱀의 입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는 죽는 것인데 거기에서 새 생명이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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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뱀이 이겼지만,
속으로는 두꺼비가 이겼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고달프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복이 거기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
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나를 희생의 제물로 바쳐준다.’고 받아들이면 복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아니 주어지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오 16,27)

따라서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비안네).

집회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사용이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갈라 놓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4-17)라고 말합니다.

천상을 바라면 그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자리가 많이 비었는데 어디를 가셨을까요?
벌초(伐草) 혹은 금초(禁草) 하러 가신 분이 많으시리라 봅니다. 조상을 위하는 풍습은 좋습니다. 그러나 금초를 하는 것 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미사 안에서 기도해 드린다면 그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루가복음 9장 61절-62절을 보면 한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 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는 일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나를 죽이고 포기하는 일이
곧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교과서’,
‘ 삶의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며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나도 십자가를 집니다.
주님께서 약속한 영광의 미래가 있기에 그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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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20년 8월 30일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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