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7 98.4%
[서울] 측은한 마음
조회수 | 2,086
작성일 | 05.04.15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오늘은 좋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헌신할 더 많은 사제를 보내 주시도록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양 떼로, 지도자는 목자로 소개됩니다(이사 63,11; 에제 34,1-10 참조). 특히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하여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에제 34,2-3)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자를 도둑이며 강도로 규정하십니다. 직접적으로는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에(요한 9,39 참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는(요한 8,43.47 참조) 바리사이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부정한 것에서 ‘구별된 사람’을 뜻하며 정결과 부정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유다 백성보다 훨씬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엄격한 실천을 강요했습니다. 고통을 죄의 벌로 이해하며 안식일에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죄악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직면한 사람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남이야 고통을 받든 말든 나와 상관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법을 앞세워 안식일에는 병도 고치지 못하게 했습니다(마태 12,9-14 참조).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요한 9,13-16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14,14 참조). 예수님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안식처이셨습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은 결국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희생되셨습니다. 구약의 목자들은 양들을 잡아먹었으나,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1베드 2,23).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문’이시며 좋은 목자이십니다.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거나 보복할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정의대로 심판해 주시기를 겸손되이 빌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행여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죽음의 길로 이끄는 거짓 목자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

서울대교구 박요한 영식 신부
457 98.4%
어떤 계기로 사제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신부님! 신부님은 어떤 계기로 신부가 되려고 결심하셨나요?"
 
제가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천국의 열쇠」(A.J.크로닌)를 읽고 신부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하고 답하곤 합니다.
 
첫 영성체조차도 재수를 하면서(정신없이 놀다가 예식시간을 놓쳐 다음해에야 첫 영성체를 받았음)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던 제게 우연치 않게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읽었던 「천국의 열쇠」는 사제의 꿈을 시작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지요. 소신학교(신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프란치스 치셤 신부와 같은 사제 상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구체적으로 사제 상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프란치스 치셤은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는 불우한 소년기를 거치면서도 깨끗한 마음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후 사제의 길로 들어서지만, 사제가 된 후에도 자유분방한 성격과 신자들과의 격의 없는 관계로 완고한 주임신부와 갈등을 겪게 되고 그의 장점을 잘 아는 교장신부 권유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지요.
 
무료 진료소를 여는 것으로 시작해, 페스트가 마을을 덮쳤을 때는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사람들을 구하고, 내전과 기근에는 지혜와 용기로 대처하던 치셤 신부는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따뜻하게 보살피고, 어렵게 지은 성당이 홍수로 인해 폐허로 변했을 때도, '다 없어져버린 것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인생'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치셤 신부와 한 고향 출신이며 신학교 동창생인 안셀모 밀리는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 천부적 사교수완을 발휘해 교회 내에서 출세를 거듭합니다. 중국에 간 이후 단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치셤 신부에게 밀리의 주교 임명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패배자라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향 본당신부로 돌아온 치셤 신부는 신자들에게서 경외심에 이르는 애정을 받지만, 밀리 주교에게는 부적절한 사람으로 보여져 주교의 비서인 슬리스 신부에 의해 행적을 조사받게 됩니다. 그러나 치셤은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천국의 열쇠」가 계기가 돼 신부될 꿈을 꾸게 됐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느 자매가 단숨에 책을 읽고 와서는 "신부님! 신부님은 치셤 신부보다는 안셀모 밀리 신부 같아요!"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본당 신부로서 살다보면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는 행정적인 것에 더 치우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신부의 삶이 신자들 생각처럼 기도와 신자들을 만나는 거룩한 것으로만 짜여진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일이 사랑의 실천보다 우선이 아님을 잊지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말하며 특별히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후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시대에 사제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왜냐면 사제의 삶은 가난, 순명, 정결의 삶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역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뽑혀 하느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제가 있어야 성소자들이 끊이지 않고 대를 잇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그것이 신부 혼자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 속에 사제는 성화되고 그 사제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투영될 때 성소의 싹은 움트고 자라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04.12
457 98.4%
감사합니다. 주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양을 치는 일은 일상적인 삶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삶의 요소들을 가르침을 위한 소재로 삼으십니다. 물론 청중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착한 목자에 관한 가르침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는 유일하게 비유의 형태를 띤 것으로써 다양하고도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실 교회를, 양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울타리를 쳐 놓은 목장으로 소개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들도 그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양들의 합법적인 목자이십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합법적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 하나하나를 각자의 이름을 불러 푸른 풀밭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분으로서 양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서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시편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양 우리 안에서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때만이 행복과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향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며 그에 걸맞게 살려는 노력을 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
오늘 저희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에게 고갯길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저희가 가는 길에서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해 주십시오.
넓은 길, 평탄한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십시오.
넓고 푸른 또 다른 인생의 초원이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의 양 우리가 행복의 보금자리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착한 목자이신 주님,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진정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조건 없이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당신으로 인해 행복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감사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어디서 행복을 찾을 것입니까?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 마련해 주신 양 우리를 떠나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오만과 교만을 아직도 마음 안에 남겨 두시렵니까?

안병철 신부
  | 04.12
457 98.4%
[서울] 4627 아님 0073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수도원마다 지원자가 급감하여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학교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본당에 갈 때마다, 복사들에게 물어보면 안타깝게도 사제가 되기를 꿈꾸는 소년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복음을 위해 온전히 헌신할 젊은이들이계속 나올 수 있도록, 오늘 특별히 기도해주시길 청합니다.

오늘은 또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는 ‘생명 주일’ 이기도 합니다. 마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당신 자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요한 10,9)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은 생명의 잔치에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장 같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만이 불리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똑같이 생명의 나라로 초대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1베드 2,20-21 참조)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門)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고요.

‘예수님이 곧 문’이라는 말씀이 특별히 저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실 문이 필요한 경우가 많거든요. 살아가면서 도무지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문제와 마주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앞을 높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고 느낄 때,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나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무거운데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도무지 내삶에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한 발도 앞으로 내딛기 어려울 때, 그럴 때에 그 장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작은 쪽문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화 속에서 ‘책꽂이’ 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외부로 통하는 ‘비밀의 문’인 경우처럼 말입니다.

엄청나게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루 하루를 살면서 답답하고 힘들 때마다 주님은 저에게 문이 되어 주십니다. 눈을 감고 마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을 찾을 때마다, 그분은 제 손을 잡아주십니다. 매일의 미사는 ‘문 너머’의 환희와 영광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미리 ‘문 앞으로’ 당겨 보여주는 영적 향연입니다. 아침에 들은 복음 말씀 한 구절이 하루 종일 기쁨과 위로의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님은 저에게 문이 되어 주시고 손수 ‘문 안으로’ 이끌어주십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그 문의 비밀번호가 4627인데 0073도 된다고요. 46은 구약성경, 27은 신약성경의 권수입니다. 0073은 당연히 신구약을 합한 숫자지요. 구원의 문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개별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은 곧 성경 말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문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문 앞에 서기만 해도 ‘스르르’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이 아닐까요? 행복한 날 되세요!

▥ 서울대교구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 : 2017년 5월 7일
  | 05.06
457 98.4%
[서울]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

어린 시절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자주 부르시곤 했습니다. 부르시는 목적은 대부분 심부름이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신나게 노래 부르며 하는 심부름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구시렁거리며 하는 심부름도 제법 있었습니다. 당연히 대가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도와드렸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은 경우도 있었지만 가끔은 꾀를 부려 못 들은 척하거나 숨어 있다가 혼이 나고 기분도 엉망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고했다며 맛있는 간식이나 심지어 용돈이라도 주실라치면 그 기분 최고였지요.

사실 우리는 부르심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상이 부르심과 응답의 연속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선생님들은 제자들을,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부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상대를 부를 때는 무엇인가 용건이 있다는 뜻이기에 가끔 그냥 불렀다는 이들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어떨까요?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도 부르심과 응답은 멈추지 않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성소라면 하느님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는 응답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싱거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원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그것을 사제 성소, 수도 성소, 혼인 성소 등으로 구분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있고,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감각(sensus fidei)을 키워야 합니다. 감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어떤 분야에서든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뜻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감각을 키워주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또한 그분은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10,11)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분께 시선을 고정한 채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며 함께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뛰어난 감각을 얻게 될 것이고 용기를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고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선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시는 길잡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여러분 모두 성소 안에 담겨진 보화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교구 이성우 요셉 신부
2020년 5월 3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5.03
457 98.4%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 물어보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장황한 말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 더 큰 호소력을 주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의 말보다는 한 사람의 행동이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코로나19의 현장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의자에 잠시 기대어 눈을 부치고 있는 의사의 사진입니다. 말은 없었지만 현장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의료인들의 수고가 정말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콧등에 밴드를 부친 간호사들의 사진입니다. 마스크를 하루 종일 착용하니 콧등에 상처가 났고, 밴드를 부친 것입니다. 밴드를 부쳐가면서까지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천과 아산의 주민들이 길가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있었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푹 쉬다가 가십시오.’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버스를 탔던 교민들은 현수막을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을 겁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아버지처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위험이 있음에도 주민들은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었습니다. 2주간의 격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주민들은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를 받으면 사라집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 사라집니다. 길가의 현수막을 보면서 코로나19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열대를 가득채운 물건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의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은 사재기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있으며, 질병관리본부의 대응을 믿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텅 빈 진열대를 보았습니다. 휴지를 살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3월 27일입니다. 텅 빈 바티칸 광장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교황님 홀로 제단으로 올라가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고령의 교황님이 홀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듯이 교황님은 기도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수고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두려워했던 제자들처럼 교황님도 예수님께 두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렇게 믿고 싶지만 솔직히 아직은 두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광장은 텅 비었지만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님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자연과 생태계를 함부로 대했음을 반성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더욱 그리워하는 시간이 되었고, 신자들은 사제와 함께 하는 미사의 소중함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욕심과 교만함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겸손과 희생으로 타인을 위해서 살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어진 능력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능력과 재능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회개’했는지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지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타인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신학생 때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음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사리에 맞지 않는 독선을 피우지 않으며, 평신도와 함께 본당을 이끌어 가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 평신도들에게 적절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 검소하게 물질에 마음 쓰지 않으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웃어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과 행동에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성사 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교구장과 장상에게 순명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교우에게 매이지 않는, 양쪽 귀를 모두 여는 사제”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5월 3일
  | 05.03
457 98.4%
오늘은 부활 제 4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라는 것은 거룩한 부르심,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강론을 시작하며 저의 사제성소를 떠올려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서는 제가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셨고 저 역시 그에 동의해 자연스럽게 사제의 길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성소의 첫 위기는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삭막한 남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의 유일한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저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이전까지 몰랐던 이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제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습니다. 또한 그 시절 저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는데, ‘소설가’라는 꿈이었습니다.

평소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던 저는 각종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게 됐고 그 덕에 소설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두근거림과 사소하긴 하지만 언뜻 느껴지는 무언가에 대한 재능. 장래 희망이 바뀌는 것은 이 둘 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접은 채 새로운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제가 미처 상상할 수 없던 어마어마한 딜을 하셨는데, 예비 신학교에 나가기만 하면 오천원의 용돈을 더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오천원은 꽤나 큰 돈이었고 저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나가게 된 예비 신학교. 그곳에서 만난 저의 담당 신학생은 문예창작과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진학한 분이었습니다.

유난히 문학에 목말라있던 저와 그 신학생은 많은 대화가 통했고 결국 저는 그에게 푹 빠져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다시 갖게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학하게 된 신학교. 평온하게 사제가 될 꿈을 꾸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 길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미련이 남은 꿈이 저의 마음을 현혹했고, 나는 왜 일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신학교의 공부도 기도도 의미 없게 느껴졌고 사제의 삶은 외롭고 힘들어만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 타인을 돕는 삶은 굳이 사제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신학교에서 탈출해야 하나,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어머니는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제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성소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몰랐던 시간들. 당신을 피해 달아나려는 저를 끝까지 붙들어주시고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사제가 되던 날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납니다.

성소 주일을 기념하는 미사를 드리고 있는 오늘, 저의 성소 이야기를 들으셨지만 사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저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은 사제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결혼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혼인 성소를 받았고 어떤 이는 독신의 삶으로 천상의 삶을 증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해 세상에서 죽은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길이며, 전적으로 다른 이를 돕기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학창시절 저의 삶이 그러했듯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하느님의 부르심보다 더욱 더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들 뿐 아니라 미움, 원망, 시기, 질투와 같은 많은 감정의 유혹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던 성소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저는 종종 이 말씀을 기억하며 제 삶의 의미를 되찾곤 합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피상적이고 덧없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과 숭고한 목적과 근본적인 선택을 하려는 갈망. 곧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과 아낌없는 투신의 길, 힘들지만 용기가 필요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길에서 여러분은 섬김의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택받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성소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매우 특별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선 아무나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대하시는 자를 당신의 협조자로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성소 주일을 맞이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요청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지만 우리는 종종 다른 여러 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지나치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길, 희생의 길로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고통스럽길 바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누구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제가 성소를 지키며 나아갈 수 있음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선을 행했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이 있다면 그마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이라는 사실이 매번 부족한 저를 일으켜 세웁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를 사랑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다시금 생각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무는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음성에 기쁘게 응답하는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아멘.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20년 5월 3일
  | 05.0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89   [수도회] 기다리시는 하느님  [3] 1793
788   [전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하느님  1583
787   [서울] 우리가 밀과 같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1520
786   [인천] 하느님은 뭣하고 계시는지, 저런 못된 놈들 확 뽑아 버리시지!  [1] 1891
785   [대전] 하느님의 기다림과 가라지의 회개  1693
784   [수원] 비유 말씀의 결론 : 가라지의 비유  [3] 2062
783   [의정부] '나'와 '가라지'  [1] 1813
782   [군종]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1] 2093
781   [춘천] 누구나 추수 때까지는 시련을 견뎌야 한다  [2] 1886
780   [안동] 밀과 가라지  [1] 2035
779   [부산] 가라지(일명 : 독보리)의 비유  [5] 2188
778   [마산] 오늘의 밀이 내일의 가라지가 될 수도 있다.  2040
777   [대구] 오늘의 삶에 더 충실하기  [1] 1801
776   (녹) 연중 제16주일 독서와 복음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 함께 자라도록)  [2] 1477
775   [수도회] 열매를 맺는 삶  [2] 2417
774   [청주] ‘말씀의 씨앗과 마음의 밭’  [1] 31
773   [군종]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마음  [4] 2284
772   [인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  [2] 2067
771   [서울] 풍성한 결실을 맺는 삶  [4] 2336
770   [수원]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 2454
769   [춘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은  [4] 2339
768   [의정부] 내 마음의 밭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1] 1714
767   [전주] 마음, 그 마음이 문제  [2] 2157
766   [대구]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4] 2393
765   [마산] 씨앗과 토양과 열매  [4] 2339
764   [부산] 마음에 뿌려진 씨앗  [5] 2136
763   [광주] 농부의 희망  [2] 2088
762   [대전] 좋은 마음의 땅과 풍요로운 결실  [1] 2010
761   [원주] 꽃을 피우기 위해  [4] 2437
760   [안동]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4] 2694
759   (녹) 연중 제15주일 독서와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2] 2160
758   [수도회] 십자가가 다가올 때면  [4] 1549
757   [청주] “버림과 따름”  [1] 169
756   [전주] 하느님 사랑  [1] 122
755   [군종]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는 이웃 사랑의 삶”  112
754   [의정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126
753   [춘천]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130
752   [대전] 앞장서는 사람  128
751   [안동] 십자가 공동체  151
750   [서울] 최우선적 선택을 요구 받는 신앙인  [4] 1641
1 [2][3][4][5][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