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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평신도 가정이 성소의 온상이다
조회수 | 2,135
작성일 | 05.04.15
사도 바오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들을 수 있다."(로마10,17) 고 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여 복음 선포할 성소자가 없으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다. 부르심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응답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성(聖)가정이야말로 성소(聖召)의 온상이다.

1. 성소 주일의 의미

우리는 교황님의 선종을 계기로 한 사람의 위대한 목자가 온 인류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잘 보았다. 넓게 보면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가 성소주일을 지내는 목적은 하느님의 도구로 교회에 몸바쳐 헌신할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데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을 부르셨고, 또 마리아와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도 교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신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으로 엮어지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은 박해를 받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치민(治民)의 도리(道理)'를 집대성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썼다. 정치를 목민(牧民)이라고 표현한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봉사하는 자세로 국민을 섬기며 다스리는 목자다운 지도자가 없을 때 그 국가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교회의 사명은 이 일을 위해 몸바쳐 투신할 일꾼들을 필요로 한다. 진리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증거할 사람이 없을 때,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로마1017)고 하셨다. 전 존재를 바쳐 헌신할 일꾼들이 없을 때, 교회의 생명력도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2. 교회가 무기력해지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다."(사도2,26)고 외치신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그리고 참여정부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며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힘을 가진 자들, 권력의 최 상층부가 국민을 위한 개혁보다는 자기들의 세를 확장하기 위한 '우리편 봐주기'로 일관하는 세태가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투명성 지수'에 있어서는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불감증에 사로잡힌 이 사회에 참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죽어야 산다"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봉사의 진리를 되살려야 한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베드로의 말씀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울려 퍼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1베드2,20-21) 하신 제2독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스스로 개혁되려는 의지 없이 국민을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개혁, 비전도 확신도 없이 국민을 실험의 대상으로 여기는 개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는 참으로 짠맛을 잃지 않아야 하고 빛을 발해야 한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으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교회의 생명력은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데에 투신할 성소자들의 증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자.

3. 평신도 가정은 성소의 온상이다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신자들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셨다. 특별히 성소(聖召)를 사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자긍심과 함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끄러움도 느끼게 해 주셨다. 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성소자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그 진리를 증거 할 성소자는 모두 평신도 가정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하느님께서 먼저 부르시지만, 인간의 응답 없이는 수도자도 성직자도 될 수 없다. 모든 평신도들은 이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복음의 정신을 사는 거룩한 신자 가정이 없을 때 성소는 고갈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 신자들은 세상과 교회에 봉사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큰 삶을 따라 나서도록 자녀들을 격려해야 한다. 자녀들이 성소의 길을 걷도록 부모들이 협조하지 않을 때, 언젠가는 불안과 가책 속에서 고백성사도 못 받고 성체도 모시지 못한 채로 임종을 맞아야 될지도 모른다. 모두 이기적인 자세로 자신을 위한 작은 행복만을 찾는다면, 누가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에게로 달려 갈 것인가?

모든 신자들은 수도자와 성직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소 육성을 위해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우리들의 의무임을 명심하자. "주님, 저희에게 성인 사제를 많이 보내주소서." 아멘.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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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비유

오늘 주일 복음 말씀이 담겨 있는 요한복음 10장은 9장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시는 장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듣는 비유 말씀에서 “너희(바리사이)의 태도는 도둑이며 강도에 비유할 수 있고, 나의 태도는 목자에 비유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해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가르침을 놓치고, 그저 피상적인 내용으로 알아듣고 있을 뿐입니다. 이 비유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도둑이며, 누가 착한 목자인지 계속해서 물어야 합니다. 문은 누구이며, 양들은 또 누구인지 두루 물어야 합니다. 그처럼 오늘 복음에서는 비유가 참으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곧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특히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행복해 한다. 예를 들면 방글라데시 국민들은 열악한 경제와 사회 환경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들에 속한다. 모든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살아가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 그런가요?

우리 저마다는 어느 정도 서로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 편치 않고, 많은 경우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다 경계를 확실하게 해 두려고 합니다. 단독 주택이라면 가능한 한 담을 높게 쌓아 올리고,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면 경비를 강화하고 잠금장치를 보다 철저하게 하려 합니다. 어느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받고자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내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밖에서 우리를 불안케 하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즐겨 이용하는 이 울타리들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자유입니다. 말로만 “자유”를 남발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일을 두고 간섭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 어떤 권한도 없다’는 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사람들 저마다는 이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야만 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주 문을 열고 드나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계 주인이나 기술자나 의사나 선생님 등을 필요로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이나 걱정거리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왜 우리를 필요로 하는지, 우리는 곧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 채 해야 할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기쁨과 의미를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자신만 편하자고 해서 혹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도둑이나 강도나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 저마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착한 목자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주 오늘 비유에서 묘사되고 있는 도둑이나 강도처럼 처신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밝히면서 양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양들에게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들과 달리 우리는 ‘사람들 저마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하고 우리 자신에게 거듭 새롭게 다짐해야 합니다. 자기 홀로 만족할 수 있는 “사적인 인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누워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제 슬슬 일이나 한 번 해볼까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휴식을 즐길까’ 하며 마냥 이리 저리 궁리하고 있을 수만 없습니다. 우리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착한 목자인가 혹은 도둑처럼 처신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 혹은 사람들을 나쁘게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상생활 가운데 이 목자의 직분은 수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의 운명이 바로 나의 운명인지, 국가의 운명이 그리고 세상의 운명이 나의 운명에 직결되는지 묻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몰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 저마다는 자신이 목자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와 사람을 향한 배려일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기대하는 사명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나쁜 행실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나태함이나 냉담함으로 사람들에게 도둑이나 강도가 된다면 더 좋지 않을 겁니다.

착한 목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근심 걱정에 잠기기도 하고 두려움에 쌓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말해 우리는 다가오는 일을 두고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모든 것을 앞두고, 우리는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과거가 더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미래에는 더 행복해질 거라고 사람들이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모든 보수주의(Konservativismus)의 뿌리는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그들은 그를 따른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묵묵히 그들은 길을 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자에게서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어야 할까요? 또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으로 미래를 마주한 두려움이 커지는가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지 묻기도 할 겁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님이시며 그리고 우리 시대의 주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 묻는 것일 겁니다. 염세주의(Pessimismus)나 비관적인 모습은 비신앙의 표지입니다. 대안 없는 반대나 근거 없는 비판이나 무조건적인 거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지금 여기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충만한 생명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저편에 대한 약속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다 선하고 보다 아름답고 보다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참 목자들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착한 목자로 사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차광호 파스칼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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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사제

최동원 선수와 선동렬 선수의 전설적 맞대결을 다룬 영화 퍼펙트게임, 당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선동렬 선수는 최동원 선수와 맞붙어 이길 자신이 있다며 감독에게 맞대결을 성사시켜 달라 합니다.

한국 제일의 강속구, 한국 제일의 슬라이더, 한국 제일의 제구력.
그런데, 그냥 공 잘 던지는 투수일 뿐이야. 설령 네가 이번에 붙어서 이길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연 다른 사람들이 너를 최동원보다 낫다고 인정할 것 같냐? 최동원, 이 이름 석 자에 너처럼 공을 잘 던진다는 의미만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력, 지 어깨 으스러지도록 끝까지 던지는 투지, 팀이 한 점도 못 내고 지더라도 끝까지 던지고 스스로 패전투수가 되는 책임감, 그래서 어깨가 닳도록 국가대표로 뛰고, 롯데에서 뛰는 거야. 사람들은 그런 최동원을 좋아하는 거고, 존경하는 거다. 그래서 넌 아직, 다른 사람들한테 한국 제일의 투수가 못 되는 거야.

결국 두 사람은 불굴의 의지로, 내 편, 네 편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박수와 화합을 이끌어낸 멋진 맞대결을 만들어냅니다.

아주 어릴 적, 지금보다 세상을 더 모르던 시절, 미사를 봉헌하시는 신부님을 보면서, 신학교 가면 몇 년 동안 저렇게 미사 하는 것만 배우고 연습하나? 저게 저렇게 어려운 건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 사제를 미사 드리는 사람으로만 이해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때 아주 어려서 그랬습니다. 세상도 잘 모르고, 신앙도 잘 모르던 아주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가 볼 때는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지요. 제가 조금만 더 철들고, 조금만 더 세상을 알고, 조금만 더 신앙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제를 그냥 미사 드리는, 그냥 성사 집행하는 ‘기능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그냥 철없는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글쓰기의 ‘기교’가 아니라 글쓰기의 ‘태도’가 작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임을, 나는 오직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 - 정여울 작가 -

▥ 마산교구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 2017년 5월 7일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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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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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소를 생각하면 성직자, 혹은 수도자의 길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떠올립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맞는 표현이며 성소 주일의 여러 행사 또한 성직자,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들을 향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볼 때우리 각자의 부르심을 되새길 수 있는 성소 주일은 우리 모두의 축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교회법 제2권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해 다루는데 제204조 1항은 2권의 첫 번째 조항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례로 그리스도께 합체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고…하느님이 교회에게 이 세상에서 성취하도록 맡긴 사명을 각자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실행되도록 소명 받은 자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각자의 삶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힘들고 고단할 때가 많으며 자신의 삶의 자리가 하느님께 받은 소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각은 성당 안에서만 느껴지며, 일상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올 공간이나 여유를 찾기란 대단히 어렵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고통에서 그분은 마치 방관자처럼 느껴집니다.

로마의 예수 성당에서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Ad maiorem Dei gloriam’(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늘 부릅니다. 코린토 1서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이 가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을 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작은 일이나 어려움들이 그분의 지체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하게 된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라 우리의 동반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의 자아실현과 삶의 계획들의 성취는 각자 고립된 ‘나’로서 내리는 결정들로 계산되는 결과가 아니며 반대로 그 무엇보다 이는, 높은 데서 오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교황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도 그분이 우리의 길잡이로서 함께해주시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그분께 온전히 신뢰를 보내며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찬미’를 드리자고 하십니다.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수난 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우리 모두 용기를 내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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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심정현 요한 드라살 부제
2020년 5월 3일 마산교구 주보에서
  |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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