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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조회수 | 2,108
작성일 | 05.04.15
성소주일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복음입니다. 착한 목자란 양 한마리 한 마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기에 양들도 그 사랑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 결국 양들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존재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목자,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구원의 향기를 퍼트리는 목자, 실의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양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목자, 그래서 삶의 이정표를 잃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 출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목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변에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온종일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 착한 목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신자들 얼굴에서는 행복이 묻어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착한 목자가 한분 계십니다. 이탈리아 국적의 김하종 빈첸시오 신부님으로 성남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불황의 여파로 무료급식소 운영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신부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노숙인들을 위한 저녁식사를 직접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앞치마를 두르신 신부님께서는 환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칼놀림이나 간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표정을 통해, 신부님 말씀을 들으면서 착한 목자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신선한 야채를 사서, 갓 구운 빵을 가져다가 노숙인들에게 원없이 퍼주는 꿈을 꿉니다."

"안나의 집은 비록 가건물이지만 이곳에서 수백명이 한끼 식사를 해결합니다. 노숙인들은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한시적으로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안나의 집에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일하는데 저는 그들에게 정말 성의있게 이 일에 참여할 것을 부탁합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하는 식단처럼 풍요롭지 않더라도 청결하고 정성스럽게 해야만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 늘어선 긴 행렬, 그들 중에 내 절친한 친구 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성당은 바로 여기 안나의 집이에요. 제가 평생 섬길 사람은 여기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이고요."

지금 하고 계시는 일만 해도 힘에 벅찰 텐데, 신부님은 아직도 많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단기 계획, 중장기 계획까지 다 세워놓으시고 한가지 한가지 실천하고 계십니다. 무료급식소 외에도 노숙인 자활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 운영, 노숙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 무료진료 활동, 상담서비스 등.

점점 늘어만 가는 노숙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시선이 상당히 엇갈리기도 합니다. '무료급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원점이다. 괜히 노숙인들에게 의존심만 키워주고 안 하느니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닙니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집을 뛰쳐나왔겠습니까? 나름대로 한번 일어서려고 다들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겠습니까?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거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도 굴뚝같을 것입니다. 몇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보니 수중에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된 분들이 노숙인들입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하더라고 분명히 하셨을 일입니다. 존경하는 노숙인들의 천사 김하종 신부님께서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답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안나의 집(031-757-6336)을 찾아가 쌀 한포대라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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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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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오늘은 저마다의성소와 저마다의 생명에 감사의 물을 주는 날입니다. 뜨거웠던 부르심의 시작 그 첫 마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제 첫 마음의 가슴 뛰는 역사의 풀밭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관령을 넘었습니다. 아프고 아름다운 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빛나는 시간들 또한 모두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길을 가셨기에 부끄러운 제 역사의 발걸음도 실망하지 않으며 감사하게 됩니다. 햇빛 없이 자랄 수 없듯이 은총 없이 나아갈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다시금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살리시듯 저를 살려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살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무게는 봉헌의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건네진 예수님의 생명이 참된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도 바뀔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진정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여정입니다. 부르심의 시작과 마침표 사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부르심은 축제가 되고 생명은 잔치가 됩니다. 부르심에 감사하는 건 생명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은 부르신 대로 살아야지 부르심이 될 것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분명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양들의 문이 있습니다. 들어가고 투신해야 문은 문으로 되살아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7년 5월 7일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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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양 우리”는 둘러싸여 있고 보호되고 있는 안뜰(정원)같은 곳으로, 안과 밖을 연결하는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요, 넘어 들어가는 이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요한 10,3).

여기서, “목자”는 ‘먹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양식을 먹이는 자’를 말하고, “양”은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을 찾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문”은 들어오면 누구나 구원받고, 드나들면서 목초를 찾아 얻을 수 있는 문입니다.

그리고 ‘목자와 양’는 하나하나 개별적이며 지극히 인격적인 친교를 나눕니다. 곧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양들을 문밖으로 이끌어내며, 앞장서 가고 그들과 동행하며 낯선 사람들로부터 보호해주며, 양을 그를 따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목자이며, 양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곧 그리스도는 양들에게 “말씀”이라는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이며, 또한 양들이 “드나드는 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 안뜰로, 다른 한 방향은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한 방향은 하늘에서 인간을 향하고, 다른 한 방향은 인간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합니다.

바로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곧 ‘말씀의 문’을 통해, 말씀이 나오고 들어갑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예수님이란 이 “문”은 ‘들어오는 문’이요 동시에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그(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3-4)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한 열려진 울타리인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처럼, 당신께서도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문밖에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먹을 것을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라고 그 소명을 일깨우셨습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이처럼, 부여받은 소명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목소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뽑은 것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이었듯이 말입니다.

그러기에,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타자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에 응답하는 것이 곧 성소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소는 사랑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불태워야할 일입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7년 5월 7일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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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성소 완성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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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활 제4주일은 성소주일이자 생명주일입니다. 특히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의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성소주일이지만 널리 보면 주님께 불림 받은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날로 신자로서 내 고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생명주일입니다. 참으로 각자 본연의 성소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생명 충만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언제 들어도 신바람나는 방금 들은 화답송 후렴입니다. 목자의 원조는 하느님이시며 아드님 예수님 또한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성소의 완성입니다. 참으로 우리 역시 삶의 현장에서 점차 참 좋은 ‘목자’이자 ‘양’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어제 써놓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수도원 주차장 앞, 붉게 타오르는 영산홍을 배경으로 한 성 요셉상을 묵상하며 쓴 시입니다.

-“얼굴은 평온해도/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영산홍 배경의 성요셉상/늘 그렇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 요셉상에서도 착한 목자 하느님 모습을 감지합니다. 늘 가슴은 타오르는 사랑의 불로 사셨던 착한 목자 예수님이셨습니다. 아주 예전 언젠가 성 요셉상 앞에서 단체 피정자들이 성모성월 성모의 밤 행사하는 것을 보며 웃은 일도 생각납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둥글고 후덕하며 고운 얼굴의 성 요셉상을 성모 마리아상으로 착각했던 것이며 그냥 모르는 체 했습니다. 부성과 모성을 그대로 지닌 어버이 하느님을 반영하는 성요셉상으로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저에 관해 이런 말을 듣고 정말 착한 목자 어버이 하느님을, 어버이 예수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고 받은 덕담입니다.

-“저도 훌륭하신 신부님께 지도받고 사랑받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좋은 엄마 아빠 두몫까지도 신부님께 느껴요! 신부님 최고요!”-

“사랑하는 자매님도 익명의 성녀 중 한분이지요! 수도원 예수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엄마, 아빠 두몫까지도 느낀다니 이보다 더 큰 찬사도 없습니다. 착한 목자 하느님은, 예수님은 정말 그런 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이런 착한 목자 어버이 모습을 봅니다.

지난 3월27일 비내리는 텅빈 바티칸 광장을 걸어 제단에 올라 기도하시던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모습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요. 개신교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지난 3월27일 저녁 비 내리는 성 베드로 광장에 외롭게 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재난 시대 종교의 힘과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그분은 공포를 강요하지도, 누군가를 비난하지도, 주술을 행하지도 않았다. 오직 겸손한 목소리와 인자한 표정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위로하고 격려했다.가장 어두운 시간에 들려온 교황님의 말씀이 상한 가슴을 싸매어 준다. “우리 모두는 한배를 탄 연약하고 방향감각 잃은 사람들이며, 동시에 서로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노를 저어야 하고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

바로 이런 착한 목자의 영성이 재난 속에서 종교가 살아남는 길, 사랑받는 길일 것입니다. 이번 성소주일에 교황님께서 사제들에게 보낸 글에서 네 가지 가르침도 비단 사제들뿐 아니라 성소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겠기에 소개합니다.

-“1.감사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 주님 은총, 자비 깨달아 열린 마음 가져라

2.용기
유혹과 절망 닥쳐도 나약함을 인정하고 기도 통해 물리쳐라

3.고통
신비로 받아들여 참회와 정화의 시간 갖고 신자들 고통에 관심 가져라

4.찬미
온유의 힘으로 완고한 시선에서 벗어나 성모님을 바라보라”-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1936년생, 85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미사에 매일 강론이 놀랍습니다. 강론의 단순성과 넓이와 깊이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예수님을 사랑하여 배워 알아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 모두의 평생 소원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은 그대로 성소 완성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불러 주신 내 고유의 색깔, 모습, 크기,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성소자로 살 수 있겠습니다. 답은 사랑입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 모두가 당신 사랑을 닮기를 바라십니다.
구체적으로 다음 셋입니다.

첫째,
회개悔改의 삶입니다.

사랑의 회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는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세례의 은총을 늘 새로이 하는 것이며 성체성사, 고백성사에 충실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얼마전 선종하신 사제의 묘비석의 묘비명을 보는 순간 저절로 터져 나온, “아, 성소의 완성이구나, 모두 용서받았고 모두 구원받았다!” 탄성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둘째,
‘열린 문門’의 삶입니다.

미움과 혐오, 증오와 배제의 닫힌 문이, 벽이 아니라 활짝 열린 사랑의 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문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로 넓어지는 사랑의 문입니까 혹은 날로 좁아지는 문에 점점 커가는 ‘이기利己의 벽壁’입니까? 과연 내 사랑의 문은 어느 정도입니까? 예수님은 벽이 없었던 존재 자체가 사면팔방 활짝 열린 사랑의 문이셨습니다. 흡사 요셉 수도원의 사방이 활짝 열린 쉼터 회심정回心亭, 정자같은 분이셨습니다. 세상 떠난 고故 정요한 수사가 창안한 회심정 이름입니다. 참으로 착한 양이 되어 착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충실히 항구히 따를 때 우리 역시 점차 넓어지는 사랑의 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밖에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얼마 전 수녀원 고백성사 때 체험이 생각납니다. 제가 이미 일찍 수녀원에 도착한 것을 모르고 담당 수녀님은 밖에서 거의 한 시간 저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함께 계신 주님을 놔두고 헛되이 밖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사랑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온유와 겸손, 섬김의 사랑이 함축된 순종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예수님을 따랐던 수제자 베드로가 전하는 이런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주님의 종을 판박이로 닮은 예수님이십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착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시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의 병은 나았습니다.”

우리가 미사중 특히 청해야 할 은총은 이런 주님을 닮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이제 우리 모두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성소 완성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본연의 ‘참나眞我’의 성소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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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5월 3일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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