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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조회수 | 2,228
작성일 | 05.04.15
오늘은 착한 목자의 형상이 주제이다. 유다인들은 이 목자의 형상에서 안정과 번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느낀다. 목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을 갖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또한 사랑과 더불어 힘과 용기의 사상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의 화답송으로 노래하는 시편 22의 내용에 나타나고 있다.

제2독서: 1베드 2,20-25 : 목자이신 그분께로 돌아왔습니다.

제2독서의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길을 잃은’ 양들까지도 구원하실 보다 큰 능력을 갖게되는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목자가 이제는 하느님께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여러 번 당신을 목자에 비유함으로써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목자’(시편 79,2; 에제 34,1; 예레 23,1-3 등)로 묘사되고 있는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이 목자라는 명칭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적 신분을 드러내신다.

복음: 요한 10,1-10 :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이 드러나는 내용을 담고있으며, 수난기(13장)가 시작되기 전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절정의 순간을 맞고있음을 의미한다. 하여간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우리에서 있는 일을 말씀하신다. 목자들은 한 양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래서 목자가 부르면 그들은 목자를 따라 나서고, 다른 양들은 자기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문지기’ 역시 목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나 ‘도둑들’은 ‘딴 데로’ 몰래 들어가 양들을 훔친다. 잡히지 않은 양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그들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이다”(5절). 이것은 ‘참 목자’와 ‘도둑’과 ‘강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누가 ‘문’으로 양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고,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하는 ‘도둑’이며 ‘강도’인가? 이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들은 ‘눈이 잘 보인다’고 하지만, ‘눈이 먼’ 사람들로서(9,4041), 스스로도 보지 못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보지 못한다. 안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전해지는 순간부터 그 의미를 상실한다. 오히려 폭력으로 그리스도를 없애려 한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온다”(10절). 그러나 양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없애려 한다. 그래야 양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마태 26,3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모든 양떼가 “더 풍성한 생명을”(10절)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참되고 유일한 목자이심을 주장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7-9절)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와야 안전할 것이다”(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항상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요구를 존중하고 따름으로써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할 ‘문’이시며,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보여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참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태어날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할 증명의 ‘문’이시다.

이것이 오늘 성소주일의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으려 준비된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실천해야할 그 봉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그 마음에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목자는 항상 그분뿐이시며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
아야 한다.

또한 오늘,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데,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참으로 봉사하는,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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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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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계절 희망의 계절 도전의 계절인 이 싱그러운 4월! 고통스러운 겨울처럼 움츠리고 묻힌 온갖 생명들을 일깨우시려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가 참된 삶에 대해 엄숙히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1978년부터 이제까지 가톨릭교회를 이끌어 오신 교황님께서는 1984년에 우리나라에 오셔서 103위 성인시성식을 집전하셨고 1989년에도 한국에 오셔서 세계성체대회를 거행 하셨습니다. 그 때마다 교황님께서는 엎드리셔서 이 땅에 입을 맞추시며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교황님의 겸손하심은 참으로 가톨릭 밖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좋은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예수님 행적에 대해 많은 유대인들이 "그는 마귀가 들렸소. 그런 미친 사람의 말을 무엇 때문에 듣는 거요?"라고 비아냥 거렸고, 또 한편에선 "마귀들린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소?"라고 논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배척에 대해 예수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들에게 참된 삶을 보여 주시며 우리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늘 기쁨에 되살아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충실하게 현실을 생활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살면서도 힘든 지상 순례 여정을 하고 있습니다.

승하하신 교황님께서도 세계평화를 호소하시다가 총격도 당하시고 여러 병마에 시달리시면서 고통의 삶을 거치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러한 고통은 무덤 없이 부활이 없는 것처럼 참된 삶을 증거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교황님 승하로 다시 또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면서 선을 행하다가 갖가지 고통에 직면해도 아픔을 참으면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갖가지 고통에 시달리는 이 시대 모든 양들을 위해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라는 각자의 처지에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착한 목자와 봉사자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 할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성소는 빛나는 은총이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믿음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성덕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둘째로 서로 도와주며, 셋째로 빵을 나누어 먹고, 넷째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착한 목자이시니 우리들은 아쉬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더 완전한 천상복락을 그리면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또한 우리는 이 시대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후계자인 새로운 교황님 탄생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쳐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으니 내가 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아멘.

서동신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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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거대한 목자로 부르십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름만 들어도 고맙고 가슴 설레인다. 이 지상 삶을 마감하셨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을 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주님의 부르심에 늘 충실하게 따르며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던 분. 온 인류를 하느님께 충실히 인도하시고 좋은 모범을 보여주신 분 등등. 그분에게 붙여질 찬사와 수식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8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며 성모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갔던 카롤 보이티야(요한 바오로 2세의 어린시절의이름). 그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 안에들려오는 ‘카롤, 나를 따라오라. 나의 사람이 되어 지쳐 헤매이는 내 양떼를 돌보아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아픔을 딛고 사제의 길을 걷는다. 주님의 부르심은 아마도 인류를 모두 살리고자 하는 뜻이었나 보다.

잠시 세월을 되돌려 생각에 잠겨본다. 카롤 보이티야가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 당신을 닮은 아버지가 되겠습니다’하고 평신도의 삶을 살았더라면, 어떤 삶을 사셨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그 추측과 답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 어떤 것들을 그와 꿰맞춰 보려고 하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음을 자인하게 된다.

건강하고 운동과 문학을 좋아하던 카롤 보이티야는 사제가 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하느님에 관한 학문을 공부하고 가르친다. 그리고 주교, 추기경이 되어 지역교회와 전체 교회에 당신의 정열을 쏟아 세상과 하느님을 위한 자신의 소명을 다하신다. 지칠 줄 모르는 기도로써…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를 받으신다. 앞선 세대와 현재, 미래의 양들을 하느님 품으로 인도하는 착한 목자, 교황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이 순간은 우리 인류에게는 선물이요, 하느님과 교회에는 기쁨과 희망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먼저 저주님의 음성을 먼저 듣고, 참된 목자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이끌고 앞장 서 가시는 삶을 사실 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주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기에, 발걸음은 한결 힘이 있었고, 음성은 감미로우면서도 천둥과 같았으며, 팔과 다리는 양들과 그 우리를 지키는데 굳건했고, 지팡이는 늘 승리의 깃발이 날리는 듯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중요한 직무, 양들이 드나드는 문을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가끔은 강도들로 인해 많은 오해와 시기, 아픔도 있었지만, 그분은 자신의 직무를 완수하셨다. 당신의 직무는 양들을 훔쳐가고 죽여 없애려고 하는 강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결실을 얻으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철저히 동참하도록 하셨다.

이 글을 읽는 이가 우리 교회의 어른이며 아버지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 앞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묻고 싶다. 분명 많은 것을 남기고 가신 교황님이었기에 우리 자신 안에 무언가 남았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양심 안에 남겨주신 새로운 삶의 길.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생명을 얻도록 도와주어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이끌어내야 하는 곳이 무수히 많다. 그리고 주인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헤매는 양들을 이끌고 안전하고 행복한 하늘나라로 이끌어야 할 일들이 많다.

지상을 살아가면서도 천상과 하늘나라를 이야기하고, 한생을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맛들이며, 어둠을 거닐면서도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을 추구하고 보여주라고 야심만만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이들이여! 용기를 내어 일어섭시다. 당신이 바로 거대한 목자가 될 것입니다.

그대들의 응답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하느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 모두에겐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전 지금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부르심에 충실하도록. 카롤 보이티야도 한 때는 주저했으나, 딛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마침내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었고, 하느님은 이를 받아주셨음을 전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승리하셨습니다”

최인각(바오로)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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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미로(迷路)에는 언제나 입구(入口)와 출구(出口)가 있다

오늘은 성소 주일이며,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특히 성소 주일을 맞이하여, 거룩한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착하고 성실한 목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신학생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끊임없이 돌보고 이끌어주시는 목자로 늘 상징되었고, 이 착하고 성실한 목자의 이미지는 신약에 와서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이끄시는 예수그리스도께 적용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는 메시아이시며 착한 목자로서 양떼를 사랑하고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양떼를 잘 돌보는 착하고 성실한 목자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신적권능을 지니고 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미로(迷路)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찾아야 하는 출구는 어디인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의 왕인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라고 하는 사람에게 미궁(迷宮)을 하나 만들 것을 명합니다. ‘미궁’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되 그 안의 길이 하도 꼬불꼬불하여 나올 수는 없는 ‘감 옥’입니다. 어떤 사건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미노스왕은 수소와 인간의 모습을 한 미노타우로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궁에 미로를 만들고 그곳에 괴물을 가두었습니다.

누구든 미궁에 들어간 뒤에는 살아남지 못했지만, 테세우스만은 그 유명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레를 쥐고 있던 덕분에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출구를 찾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미로는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곳이 샤르트르 성당입니다. 수도원 뜰에 있는 이 미로는 목책과 잘 손질된 잔디와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미로’는 사람의 일생과 삶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늘 그 중심을 향해 가까이 가다가도 다시 중심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와 달리 그리스도교의 미로는 출구가 없는 미궁이 아닙니다. 언제나 입구와 출구가 있고 중심에는 착한 목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목자의 말은 오직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곧 믿음을 갖고 착한 목자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때 구원과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한 가지 깊이 깨달은 것은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풀밭에서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합시다.

박경민(프란치스코)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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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이에 사도들은 단호하고 명쾌하게 답을 건넵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가! 사는 법을 물을 수 있고 또 그 물음에 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

반면 지금 이 시대에는 그러한 물음에 단호하고 명쾌한 답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없어 수많은 사람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비판, 평가, 지적을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는 ‘어른’이 보이지가 않습니다.석·박사 학위자는 많은데, 사람들을 참 행복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줄 지혜로운 ‘인도자’는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영성을 가르치는 영성가들은 많은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따라 사는 ‘성인(聖人)’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권력으로 다스리는 지도자들은 많은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착한 목자’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에 교회는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마음의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린 양들에게, 또 내적인 방황과 상처로 지치고 아파하는 양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목자요 보호자이신 분이 여기 계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선포는 예수님께서 오늘 교회를 통해 목자가 양들을 부르듯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식에로 이끄시려는 ‘거룩한 부르심(聖召)’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증언대로,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심으로써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다시 의롭게 살게 해주시고 그분의 상처로 우리의 병을 낫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1베드 2,24).’ 그분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잠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오도록, 그분께서는 우리를 자비로이 부르십니다. 일찍이 세례성사로 그분의 복된 양이 된 우리는 비록 잠시 방황하여 그분께로부터 멀어졌을지라도 목자이신그분의 음성만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거든 기쁨과 희망으로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응답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구원과 생명의 문(門)이신 예수님 앞에 다다른 우리는 어떤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믿음을 고백하며, 그 문을 통해 구원과 안식에로 들어갑시다.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 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 : 2017년 5월 7일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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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양들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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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소(聖召) 주일입니다. 거룩한 교회 안에서 많은 젊은이가 자신의 생을 온전히 봉헌하여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또한, 더 넓은 의미로 우리를 신앙의 길로 불러 주심에 세례로 응답하고, 모든 신앙인이 부활의 희망을 바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사제, 수도 성소를 위해서 특별히 기도함과 동시에 거룩한 부름에 응답한 신앙인으로서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우리 인간을 양(羊)으로, 당신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십니다. 양은 스스로 안전한 거처를 찾거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는 데 태생적으로 익숙하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위험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빠르지 않을뿐더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방어 수단(독, 날카로운 이빨, 위협적인 뿔 등)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양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들짐승과 도둑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푸른 풀밭과 물가로 인도해 줄 수 있는 목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의 근본이 ‘양(신자)들은 목자(예수님)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 있음을 간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제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교만함에 길을 잃거나, 돈과 부귀영화, 권력, 세상이 주는 즐거움들, 즉 목자가 아닌 다른 목소리에 현혹되어, 안전이 보장된 문이 아니라 울타리로 넘나드는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자기 주인(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해봅니다. 그 답은 바로 ‘익숙함’입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자주 듣기 때문에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하거나 분석할 겨를 없이 자연스레 반응하게 됩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목자가 가는 대로 조건 없이 그를 따라갑니다.

우리는 왜, 성경 말씀을 자주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까? 또한 성사, 특별히 거룩한 미사성제에 자주 참여해야 합니까? 주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 목소리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누구를 도와주어야 하는지, 이해해야 하는지, 용서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해주어야 하는지’ 등을 그 즉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한 사람만이 가능할 것 입니다.

세속적 편안함을 더해주는 것들에 귀가 점점 어두워져 주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주 길 잃어 헤매는 나를, 오늘도 또 찾아 나서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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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상용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
2020년 5월 3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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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아닌 목자는 도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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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라이프’(2013)는 고독사를 처리해주는 존이라는 한 구청직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는 고독사 한 사람들을 그가 원했을 법한 종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런데 워낙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기에 그의 일 처리는 매우 더뎠습니다. 고인의 장례식에 와줄 만한 사람의 단서를 찾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느린 일 처리에 짜증이 난 그의 새로운 상사는 22년간 같은 일을 해온 그를 해고하고 새로운 사람을 고용합니다. 새로운 직원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고독사 한 사람들을 재빠르게 ‘처리’합니다.

이제 존은 마지막 일만 처리하면 됩니다. 마지막 대상은 빌리라는 자신의 집 앞에 살았던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를 힘겹게 찾아냈지만, 그녀는 빌리의 장례식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진첩에 있는 딸을 찾아냈습니다. 딸은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그렇게 자신을 찾아와 준 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둘은 아버지 장례 때 만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존은 장례식 전날 교통사고를 당해 말 그대로 고독사를 하게 됩니다. 존은 아무도 와주지 않는 장례식을 끝으로 재빠른 일 처리를 하는 직원에 의해 매장됩니다. 그 옆에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존을 기다리는 빌리의 딸과 몇 명의 사람들이 다행히도 빌리의 장례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존의 주위로 그동안 그가 장례를 치러주었던 모든 고독사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추도를 해 줍니다. 존은 세상에서 혼자였지만 천국에서는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주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목자는 자기 양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어서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 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 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아이들처럼, 결점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말해줍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단점을 덮어주셨고 우리는 그 희생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문이라고 하십니다. 목자는 양우리에 이미 있는 양 중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이 이름을 지어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있는 양들을 아드님을 통과하여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파견받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아버지께 가는 문이 되십니다. 문은 양들을 보호하고 또 참 목자에게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들을 봉헌하는 문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목자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이지만 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파견되어 양들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목자가 양우리에 도착하였지만, 문지기들은 목자를 죽였습니다. 양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파견받은 목자들입니다. 자신의 우리에 양들을 잘 모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칫 양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도둑이 되고 맙니다. 도둑을 조심하고 또 도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파견받은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이 되어주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있는 양들을 데리고 나를 밟고 아버지께로 가시게 만드는 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깊은 산속에 거미 한마리가 오랫동안 친구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거미줄을 보니 이슬 한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넌 누구냐?”
“난 이슬이야!”
거미는 오랫동안 친구가 없던 차에 “우리 친구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슬은 잠시 생각하다가 “응 그래 좋아.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나를 절대로 만지면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거미는 약속 지킬 것을 이슬에게 맹세했습니다. 그 후 거미와 이슬은 행복을 만끽하면서 외로울 땐 서로 위로하고 즐거움을 서로 나누었고, 세월은 흘러 거미는 이슬이 없는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미는 이슬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거미가 용기를 내어 “나 너를 한번 만져보고 싶어 응?”하고 말했습니다.
이슬이 슬픈 표정으로 “너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럼 너 나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해야해. 만약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거미는 “응!”하고 말했습니다.
거미가 두 손으로 이슬을 꼬옥 껴안는 순간 이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파견되었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파견받았음을 잊으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도둑이 됩니다. 주님께 봉헌하는 부모라야 참 목자요 주님께서 드나드는 문이 됩니다.

우리는 참 목자에게 닫힌 문입니까, 열린 문입니까?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께서 통과하게 하지 않는 목자는 모두 닫힌 문입니다. 문은 마치 혈관처럼 자신이 커지면 닫힙니다. 우리는 참 목자를 자신이 얼마나 목자에게 열린 문인지를 보며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이슬처럼 여기고 다시 하늘로 올려보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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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0년 5월 3일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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