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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이 하시는 일
조회수 | 2,180
작성일 | 05.04.22
오늘 필립보가 예수님께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주십사 간청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필립보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믿기지 않으면 ‘당신이 하는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하십니다. 대체 ‘당신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당신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 6,39).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길지 않은 지상의 삶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고, 병자 그리고 마귀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모든 일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자, 이제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강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뿐더러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요한 8,19).

이런 말씀을 듣는 우리 신자들은 약간 서운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응당 하느님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본인들이 알고 있는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 먹은대로 만들어 놓은 그 어떤 신에게 기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먼저 어쩌면 하느님을 잘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 순서일 듯 합니다. 그런 연후에 그분을 제대로 알아가는 길목에서 묻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내가 하는 일을 보면, 곧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은 알아듣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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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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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하신 다음, 그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를 명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록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가 가서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죽음을 넘어 당신이 가신 저승으로 제자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분이 하신 실천을 하여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떠나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부활하셔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이 도달한 결론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는 말씀도 같은 결론을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셨고, 예수님은 그 하느님을 당신 생명의 기원이신 아버지로 받들고 그분의 일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안에 살아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하느님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달랐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성전 제사의례 규정에 충실하여 하느님의 분노를 사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께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의 생명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에 있어서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행세하는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비굴하게 굽히기보다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부르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은 하느님은 과연 예수님이 믿었던 그대로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하느님의 것이었기에 인간의 죽이는 힘이 그분을 말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더불어, 초기 교회는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는 말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로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느님에게 도달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이 행복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좇아서 살지도 않았고, 권력을 탐내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과 더불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웃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진 자녀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진리를 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의 생명을 본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짧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로 나갑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여건에서는 새로운 실천을 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그들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은
새로운 신앙인들 안에 새로운 실천을 발생시키신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배워서,
자기들의 시대와 문화에 합당하게 말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살아서 하신 실천을 넘어서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을 종교적 의무 수행이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무수행을 위한 미사, 의무수행을 위한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하시지 않다고
오해할 수 있는 율법과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불행도 하느님에게
그 기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을 보셨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그분 안에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법과 제도를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는 인간들의 눈에
예수님은 탈선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축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인간은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인간을 불쌍히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숙한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에게 이로운 것만 추구하지 않고,
이유가 있으면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고 수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자비롭게 보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분의 시선과 마음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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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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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길과 진리와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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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의 아버지의 집에로 돌아가서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해 놓고
그들을 데리러 올터이니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당신을 믿으라고 당부하신 다음
아버지를 뵈옵게 해달라는 제자에게
당신을 뵈옵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이 오늘의 복음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전인 유신 군사독재 시대에 어떤 젊은이가 민권운동을 하다가 붙잡혀가서 매도 많이 맞고 옥살이도 오래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광복절 특사로 풀려 나왔다. 하지만 계속되는 감시와 당국의 간섭 때문에 국내에서는 인권운동은 커녕 직장생활도 할 수 없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뉴질랜드에 일찍 이민을 가서 사슴농장으로 기반을 닦고 생활하시는 아버지께로 가 농장일을 거들어 드리면서 살기로 아버지와 합의를 했다.

그리고 이민수속을 밟으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아빠는 『뉴질랜드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시는 할아버지께로 먼저 가서 우리가 살 집도 마련해 놓고 가구도 새로 들여놓고 너희들을 데리러 올터이니 그동안 형인 네가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보면서 학교에도 결석하지 말고 잘 다니고 있어라. 여기 약간의 예금되어 있는 통장과 도장이 있으니 낭비하지 말고 필요할 때 조금씩 찾아 써라. 그리고 이웃에 사시는 이모님에게도 당부해 놓았으니 무슨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든 이모님에게 말씀드려서 해결하도록 해라』하고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들에게 당부했다. 그러자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이가 할아버지를 한번도 못봐서 어떤 분인지 궁금한데 아빠가 좀 이야기 해달라며 조르자 아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빼닮았단다. 외모도 같고 키도 같고 목소리도 같고 걸음걸이도 같고 체격도 같고 성격도 같고 식성도 같고 취미까지도 같으니까 나를 보면 할아버지를 뵙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온갖 죄악과 고통과 가치관의 혼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어 고군분투를 하셨건만 기득권자들로부터 엄청난 저항과 박해를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행을 받고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죽음보다도 더 강했기에 부활하셔서 당신의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시기 전에 사랑하시던 당신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에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는대로 그들을 데리러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동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께 희망을 걸고 잘 살라고 당부하셨다.

그러시면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7성사를 제정해 주셨고 협조자 성령을 즉시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어머니까지 우리의 어머니로 받들도록 주셨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를 빼닮으셔서 당신을 뵈옵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되지 않을까? 비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그분의 아버지 모습까지도 연상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도의 마하트만 간디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크리스챤들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하는데 크리스챤들은 싫어합니다. 왜 당신네들 크리스챤들은 당신네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습니까?』라고 비난했다.

예수께서는 당시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우쭐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과 같이 살라고 하셨다.

『나보고 주님 주님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뜻만을 따라서 철저히 사시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호소를 한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으실뿐 아니라 모든이에게 모든 것이 되셨다.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 하찮은 사람들을
당신처럼 대하라고까지 하셨다.
그렇기에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최후심판의 기준을 미소한 한사람 한사람에게
당신을 대하듯 사랑을 베풀었느냐 아니냐로 삼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 어디를 가든지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도록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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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허성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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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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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때 친구가 참된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참된 믿음은 시련을 만날 때 그 깊이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근심 걱정으로 신음할 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슬픔과 고통의 암흑의 밤을 맞이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자
스승을 잃고,
슬픔과 실망,
좌절 속에 빠지게 될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강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요한14장, 1절~12절).

제자들은 곧 스승을 잃게 된다는 암시를 받고 몹시 마음이 산란하며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은 그들이 당신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써 그러한 시련의 순간을 극복해 갈 수 있기를 바라시면서, 믿음의 근거로서 당신이 그들을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신다는 것을 전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 사업을 완성하고, 성령 안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날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토마스는 스승이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묻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가는 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따라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보이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길을 묻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답으로 제시하시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장, 6절) 하셨습니다.

길은 목적지인 아버지께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길이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니(14장,10절), 이 길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는 머리로만 깨닫는 진리가 아니라 믿음과 삶을 통하여 실행해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구원하여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근원을 만나고, 생명인 사랑을 살아내는 진리를 만나기 때문에 그분은 또한 길이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자비와 정의를 보여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명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실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가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계심을 보여주시며 당신의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며 당신의 일이 아버지의 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14장, 9절).

우리도 사랑과 용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길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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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찬우 요셉 신부
  | 05.08
457 99.2%
[부산] 깨달음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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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14,8) 하자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고 섭섭해 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9)

또한 요한복음 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은 들어보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다.” (공동번역 요한 2,25)

하지만 당신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요한 2장) 이때부터 제자들은 달라집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고대 종교에서 제3의 눈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마 한복판에 제3의 눈을 그립니다. 이것을 '티카'라고 부르는데, 깨달음의 눈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제3의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 여성들은 이마에 붉은색으로 제3의 눈을 그린다고 합니다.

우리 성당 자매님들이 미사에 참여할 때 미사포를 사용합니다. ‘여자가 기도하거나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남편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했는데, 이제는 그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남자에 대한 순명만으로 미사포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잘 볼 수 있도록 그 의미를 더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재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던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깜짝 놀라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말과 함께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했습니다.

바오로가 일어나 눈을 뜨려고 하니 사흘 동안 앞을 볼 수가 없었답니다. 나중에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을 받고서야 바오로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부활 5번째 주일입니다. 아직 부활 체험을 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으시죠?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오로 사도처럼 세상일에 분주하게 돌아다니지만 말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 눈을 “깨달음의 눈”으로 바꾸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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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윤벽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5월 10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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