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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조회수 | 2,530
작성일 | 05.04.22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라는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귀하게 여기며 그분을 저기 위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으로 받들어 모신다.

“나는 곧 나다”라는 당신의 이름은 인류가 친밀하게 만나고, 마주하기에는 막연한 이름이고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인류에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었을 것이다. 당신에 대한 완전한 이름! “나는 곧 나다”라는 표현은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치 않고 당신이 시작이며 마침이니, 당신이 존재 자체임을 알아라’라는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 ‘야훼’는 지극히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극히 당연한 그분을 인류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자 당신은 스스로 드러내신다. 당신의 말씀과 법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 ‘당신이 당신이심을’. 그래도 인류는 오리무중에 빠지고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당신이 당신을 드러내고 계시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으로 세상에 입장하신다.

이렇게 당신이 세상에 입장하시고, 당신이심을 드러내 보이신 사건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당신은 존재자체가 완전하기에, 필요한 것이나 아쉬움이 전혀 없는 존재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께서 세상에 입장하시고 계시하심은 순전히 타자(인류)를 위해 현현하시며 배려하시는 모습임을 읽어낼 수 있다.

그 현현과 배려를 가장 완벽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달받는 이(인류)가 가장 쉽고 편하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달받는 이와 같은 처지에 동참, 즉 하느님이 사람이 되는 방법을 선택하신다. 인간을 당신의 지위로 올리고 인류로부터 이해받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고 인격대접 아니, 사랑을 나누는 만남을 나누기위해 철저히 인간이 되고자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이다.  

그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모든 이가 당신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배려하는 일. 이 길을 당신은 진리로서 받아들여 생명을 바쳐 그 임무를 수행하신다.  

당신 것이 온전히 당신 것이 되는 길. 그러기 위해 당신은 기꺼이 버림받은 돌이 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고, 친히 인류가 하느님에게 향하도록 길이 되어주신다. 그리고 세상에 당신을 밝혀주는 진리가 되며, 죽어가는 모든 것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즉, 당신의 창조를 구원으로 완성하기 위한 길을 택하신다.  

당신의 이름을 ‘나는 곧 나다’라는 이름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시고, 인간을 위한 구체적이며 살아 움직이는 당신의 존재와 이름이 되기를 원하신다. 당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인류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코드로 전환시키신다. 철저히 인간의 편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과 존재를 하느님의 본래의 이름인 ‘야훼’,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형식에서 ‘나는 (    )이다’로 코드를 전환하신다. (    ) 안의 답을 인류가 채워 넣기를 바라신다. 그러기 위해 몸소 인류의 길이 되고자 하신 당신이 그 괄호 안의 존재임을 손색없이 보여주시며 인류가 뜨거운 감동으로 당신을 알아보도록 이끄신다.  

하느님의 이름의 코드가 바뀌었다고 하느님의 본래 이름이 손색되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에게는 확신에 찬 그분의 이름이 자리매김하게 된다.  

인류는 이런 신비스런 계시를 체험하면서, 자연스러이 ‘그분은 (     )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이 고백은 진리의 전파(케리그마)로 표현한다.  

정말로 인류는 이런 하느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깨닫는 순간, 찬미와 찬양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이에서 벅차게 울려퍼지는 신앙고백과 케리그마를 보이는 그 누군가에게 나누지 않고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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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인각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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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로 걷는 길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은 누구를 통해서 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며, 간절한 호소이고 하나의 초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답안을 제시해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요즘은 네비게이션이라는 물건이 나와서 우리가 길을 잘 모르더라도 원하는 장소에 척척 데려다 주지만, 이정표와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대한 선지식이 전혀 없으면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이라는 나그네 길에서 먼저 그 길을 걷고 있는 인생의 선배들이 있기에 우리는 참으로 안전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일을 개척하고 시작하는 용기있는 사람들은 위대한 개척자이며 순례의 상징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다음의 세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걸어야 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현재 걷고 있는 길

둘째는 자신이 걷고 싶은 길

셋째는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현재 자신이 걷고 있는 길과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이 일치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러나 살다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기에 인생이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로서, 내가 원하지는 않지만 가야만 하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 길이 고통스럽고 바보스럽고 타인들이 보기에 비웃음거리가 되는 길이라도 그것이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망설임 없이 가야 하지 않을까요?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길, 그러나 주님께서 불러 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고 따라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니, 다만 우리는 “예”라고 응답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그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많은 선배 신앙인들이 계시고 지금 그 길에 함께 동참하여 친교를 나누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곁에 있기에 덜 외롭지 않을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말 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고 그 길을 걸으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먼저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이 의미있는 길임을 입증해 보여 주셨기에, 우리는 주저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참된 길이시고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박경민(프란치스코) 신부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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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음악을 듣게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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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MP3 플레이어 한 대를 구입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운동도 하고, 어학용으로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어 구입했는데,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신제품이어서 그랬던지 인지도가 타사 제품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여 높은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용법의 난이도였습니다. 플레이어에 어떻게 음악이며 동영상 파일을 전송시키는지에 대한 제품 설명도 부실했고, 디자인의 단순화는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까지 줘서 좋았으나 너무 단순화 하다 보니 무엇을 어떻게 조작해 작동시켜야 하는지 조차 난해했습니다.

신제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기를 수삼일, 그러나 결과는 방황(?)의 연속이었습니다. MP3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목적으로 길을 떠났으나 그 방향을 뚜렷하게 잡지 못해 여기저기로 헤매고 다닌 시간이었지요.

그렇게 며칠을 인터넷에 들어가 사용법을 배우려고 애를 쓰기도 하며 같은 제품의 사용자들이 올려놓은 글들도 보고 했는데, MP3 한 대에만 매여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새로 구입한 MP3는 책상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더군요.

저도 제 할 일 바빠서 MP3에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다시 언젠가는 시간을 내서 천천히 사용법을 익히고 말리라는 안일한 속셈이 그 귀한 신제품을 홀대하여 구석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일종의 안주였을까요?

술 한 잔 기울일 때 곁들여 먹는 안주는 맛이라도 있지, 이번의 안주는 맛은커녕 귀한 것을 귀하게 느끼지 못하게 했고, 새로이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했던 의지를 꺾어놓았으며, 심지어 그 필요성까지 망각하게 하면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MP3를 작동시키기 위한 방향뿐만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목적까지 모두 없어진 그 상태는 분명 안주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작동시켜 보고, 안내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MP3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계속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순례의 끝에서 좋은 제품을 통해 들려오는 좋은 음악들을 만나고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적만 있고 방향은 잡지 못하고 헤맸던 방황의 시간도, 그 어떤 목적이나 방향도 뚜렷하지 않았던 안주의 시간도 모두 지난 다음에 뚜렷한 목적의식과 방향을 설정하고 열심히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아가자 얻게 된 쾌거였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이 제품에 대해서 열광하는지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도 방황과 안주, 순례의 길이 아닐까요?

가긴 가야겠는데 갈피를 못 잡고 헤매며 방황하기도 하고, 잘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주를 할 때도 있으며,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또 다시 순례를 떠나기도 하지요.

아마도 그 길은 우리가 하느님 품 안에 안기기까지 끊임없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끝을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지만, MP3로 음악을 듣게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노력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런지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또 다시 힘을 내어 아버지께로 가는 순례의 길에 용감하게 나서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그 길 위에서 어느새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 있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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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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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시기, 요한 복음이 자주 우리를 다독입니다. 아니, 영적인 힘을 북돋웁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큰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섰던 신천지에서도 매우 귀하게 여기는 말씀이 요한 복음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요한 복음 14장의 내용을 ‘장래사(將來史)’로 믿습니다. ‘간다.’ ‘떠나간다.’ 혹은‘갔다가 다시 돌아 오겠다.’와 같은 말씀(요한 14,3.4.6.18.28 참조)을 신천지의 종말론적 계시로 재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앞뒤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신천지의 ‘선택된 언약’ 카테고리에 의도적으로 꿰맞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신 사랑의 유언으로,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그리고 보호자 성령의 약속을 일차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마음을 쏟아야 했던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당신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질 철부지 제자들, 그래서 다소 불안해 보이는 그들의 ‘유대’였습니다. 공생활 동안 중단 없이 이어왔던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각별한 교육은 수난의 때가 다가옴에 따라 더 진전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고 큰 혼란을 겪게 될 제자들에게 지금 해줄 수 있는 가르침은‘모두가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이 영적인 무장은 부활 이후 그들을 다시 한데 모아들이는 강력한 울림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길’로 묘사된 성경의 이미지가 이를 대변합니다.

제자 토마스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각각 물음을 던지지만, 스승의 답변은 결국 하나로 통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계시니’(요한 14,10-11) ‘나를 알거나 본 사람은 내 아버지도 이미 뵙고 아는 것’(요한 14,7.9)입니다. 성자와 성부의 완전한 일치, 곧 ‘사랑 안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일한 통로(길)로 삼아 최종적으로 머물러야 할 곳(거처)은 바로 성부와 유대를 이룬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로 개방되어 이어지는끈끈한 사랑의 유대야말로 예수님에게는 수난과 죽음을 극복하여 부활에 이르게 하는 원천이고 제자들에게는 어두운 현실을 뛰어넘어 복된 희망을 꿈꾸게 하는 강력한 보루 아니겠습니까? 부활 신앙은 우리가 이 사랑의 통로를 따라 아버지께 나아가는 삶의 여정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함께 이룬 사랑의 유대를 가족과 이웃들에게도 계속 건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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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현창 베드로 신부
2020년 5월 10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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