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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조회수 | 2,203
작성일 | 05.04.22
신학생 때 자주 다니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아는 곳이라는 생각에 다른 길로 갔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분명히 이리로 가면 내가 아는 길이 나올 것 같은데 도무지 엉뚱한 곳만 나오는 것이었다. 결국 한참을 헤매다가 생각했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하산하게 되었다. 만약에 처음 가는 길이었다면 그렇게 다른 길로 접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는 곳이라는 자만심 때문에 힘겨운 산행을 한 것이리라. 물론 세상 모든 길은 다 통한다니까 새로운 길을 가보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니겠지만 큰 산을 갔다가 그렇게 길을 잃었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록 산행하는데도 길을 잘못 들어 낭패를 보는데 우리 삶에서 길을 잘못 든다면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뭔가 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바른 길이 아닌 유혹의 길에 들어갔다가 패가망신하거나 실패한 인생이 되기도 한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가 말이다. 가깝게 우리 주위에서 만나는 이들에서부터 큰 잘못을 해서 영어의 몸이 된 사람들, 나아가 지도자입네 하면서도 비리와 실정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기업가들이나 위정자들….

우리는 바른 길을 가야한다. 그 길은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히 이야기 하시는 그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사랑과 정의의 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 안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다. 주님이 사랑이시고 정의이시다. 그러므로 진리를 드러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아닌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니다.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면 거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교회의 이름으로조차 그런 것들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잘못들조차도 고해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았던가!

욕심과 이기심이 문제다.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고, 더 좋은 칭찬을 듣기를 바라고, 더 많은 이들이 우러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문제다. ‘나’가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다.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고 채우려는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어떤 생활성가 제목처럼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 노래말은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 늘 기도서에 넣고 다니셨다는 글이라고 한다.

‘그 무엇에도 너는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그 무엇에도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는 변치 않으신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그럴 때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분을 뵙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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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재학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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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길

세상에는 길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문을 나서면 골목길이 있고,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있습니다. 산에는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산길이 있고, 들에도 들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길도 있습니다. 바다에는 바다 사람들이 아는 뱃길이 있고, 하늘에는 국제 항공법으로 정한 비행기들의 항로가 있습니다.

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길입니다. 인간의 삶의 역사를 '여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인생행로'라고도 합니다. 이 길은 한 인간의 삶의 행동 양식과 사고 양식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삶의 길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체적인 모양새가 다른 것처럼 각자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은 다 다릅니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다르기에 사회적으로 가는 길도 모두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의사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평범한 샐러리맨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삶으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빛나는 얼굴을 마주 대하기 위해 예수님의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길을 가고,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각자의 불성을 추구하는 길을 갑니다. 그 외의 종교들도 각자의 종교적 모토를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표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은은하게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타인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 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거쳐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김규엽 아우구스티노 신부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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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그 희망의 소리

소녀라고도, 아가씨라고도 쉽게 말할 수 없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한 키 작은 여자가 그날만 임시 무대로 꾸며진 성당 제단 위로 오르고 있었다. 오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걷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무릎 아래가 없었으니까. 뒤뚱거리는 그 ‘걸음’으로 힘겹게 피아노 의자에 올라 그녀가 연주한 음악은 어렵고 정교한 곡으로 이름난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었다.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애초에 들은 터였다. 하지만 양 손에 두 개씩 전부 네 개의 손가락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음들의 향연은 분명 그 화려한 곡이었고, 초반 탄성을 지르던 사람들은 곧 숙연해졌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흘린 눈물....

네 손가락의 천사 이희아 히야친타.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봄날, 신학교 축제의 초청 연주 때였다. 선천적으로 불편한 팔다리를 가지고 태어난 그에게, 어머니는 연필이라도 쥘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자 피아노를 만나게 했다. 피아노는 그녀 자신을 살게 했고,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로 쓰여졌다. 즉흥환상곡을 연주하게 되기까지 하루 열 시간 씩 5년이라는 기간의 연습. 그 과정에서 쓰라림인들 전혀 없었을까. 좌절하고 피아노를 멀리하는 이희아를 그 어머니는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피아니스트이자 대학생이 되었고, 자신이 대단히 존경하던 유명한 피아니스트와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를 포함한 그날의 관객들이 흘린 눈물이 그녀에 대한 동정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건 한 인간의 열정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마음으로 느껴버린 사람들의 기쁜 무너짐이었으리라. 아름다움을 넘어선 숭고(崇高)였으리라. 그녀의 불편한 몸이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음악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적 불편함은 우리들 마음 속 응어리를 녹여내었다. 그녀라고 하느님을 원망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더 큰 계획으로 인간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희아에게서, 그리고 그의 음악과 인생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우리들에게서 본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공연 말미에 부른 ‘놀라우신 신의 은총’은 더 마음을 때렸는지도 모른다. 그건 단지 한 곡의 노래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혼이 깊어졌다.

시인 박노해의 글 일부이다. 이희아 그녀에게 있어서, 고통이라는 것은 혼자 들어가기 무서운 나무숲, 건너기 어려운 깊은 강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거쳤고 또 거쳐나가는 지금, 그녀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우리네 인생에서 늘 닥쳐오는 반갑지 않은 장애물들, 그 험한 나무숲과 강물들은 육체적 위험일 수도 있고, 정신적 위기일 수도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미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 땅에 고개를 박고 들어보자. 저 멀리 대척점에서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희망의 소리를. 그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을 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이다.

지병찬 요한크리소스토모 신부
  |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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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어라

세속적인 부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당연히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세속적인 부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 변기 안에 10원짜리가 빠졌을 때~수수방관.
* 변기 안에 500원짜리가 빠졌을 때~자포자기.
* 변기 안에 1,000원짜리가 빠졌을 때~우왕좌왕.
* 변기 안에 5,000원짜리가 빠졌을 때~안절부절.
* 변기 안에 10,000원짜리가 빠졌을 때~이판사판.
* 변기 안에 100,000원 권 수표가 빠졌을 때~사생결단.

그렇지요. 돈의 액수에 따라서 사람들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세속적인 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런 세속적인 부에 연연하지 않는 것, 대신 하나이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이 말씀에 희망을 두면서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정병덕 신부
  |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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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코로나 이전(B.C. Before Corona)과 이후(A.D. After Dis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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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예수님은 살아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1베드 2,4).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우리는 오랫동안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습니다. 보이는 성전에서 드리는 전례가 멈추어지고 제단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안치할 곳이 없어 성당 안에 시신을 안치한다는 이탈리아의 뉴스를 보았습니다. 성당이 무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필요한 이들, 죽은 이들의 장례를 위해 성당을 내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 외에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공간이나 방법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 전 세계의 주교들이 모여 회의를 하면서 “현대세계와 대화하고 적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던 반백 년 전 결의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는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이며,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1베드 2,8)입니다. 예수 때문에 대사제와 바리사이들, 성전 상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그들, 집 짓는 이들은 예수를 골고타에 내다 버립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예수가 무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돌, 죽음의 돌을 굴려 치워버리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빈 무덤. 여기에서 그는 모퉁이의 머릿돌, 새로운 약속의 시대, 신약의 시대를 열었습니다(1베드 2,7 참조).

인류는 지금 세계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세대의 가장 큰 위기일 것입니다. 가톨릭 전래 236년 동안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전쟁 때에도 단 한 번 멈추지 않았던 미사가 지난 2월 말부터 60여 일 멈추어 섰습니다. 멈추어 서니 비로소 보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끝나도 세계는 이전과 전혀 같지 않을 것이며, 코로나19가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질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위기(危機)는 위험하지만(危) 기회(機)이기도 합니다.

가톨릭(보편적인)교회는 지금 세계시민의 힘과 세계적인 연대(solidarity)로 당면한 세계적 질병에 대한 공동대응과 지구온난화 문제,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스웨덴의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연설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데, ‘보편적’이라 말하는 가톨릭교회, 세계적으로 방대하고 막강한 조직과 자금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미사를 못하게 되었다고 신앙생활이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 문을 닫아 레지오를 못하니 신앙생활이 멈추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 ‘병에 걸려 죽기 전에 굶어 죽을 것 같은’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이라도 나누어주는 자선이 신앙생활이고, 부족한 마스크를 만들어 어려운 세대들에게 나누어 주는 수도자들의 활동이 관상이고 수도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미사와 본당 내 단체생활로만 생각하지 않고 예수가 저 드넓은 팔레스타인 광야를 가로지르며 ‘기쁜소식(복음)’을 전했듯이 온 세상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고, 밥이 되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지금 가톨릭교회가 할 일은 차고 넘칩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예수를 따라 살겠다는 다짐을 하던 날 세워진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마음의 성전이 있습니다. 그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6)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가십니다”(갈라디아서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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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지성용 가브리엘 신부
2020년 5월 10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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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에서 허들 경주가 있습니다. 허들이라는 장애물을 놓고서 이를 뛰어넘어 순위를 다투어 결승선에 도달하는 경기입니다. 언젠가 육상 경기장에 갔다가 허들 선수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허들의 높이에 깜짝 놀랐습니다. 1m가 넘는 높이였고 그 무게도 상당했습니다. 총 10개의 허들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장애물이 없는 일반 트랙경기보다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기를 보면서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길에 장애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장애물을 당연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원래가 장애물이 놓인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빨리할 수 없다고, 또 이 장애물을 뛰어넘기 힘들다고 그냥 포기하면 어떨까요? 허들 경주 선수가 이렇게 했을 때 실격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결승선에 도달할 수 없으며 승리의 기쁨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허들 경주 선수는 달리는 연습뿐 아니라 허들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연습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길에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연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 좌절이 아니라, 결승선이라는 희망을 바라보며 앞으로 또 앞으로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결승선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그냥 주겠습니까? 고통이나 시련에 무너지지 않고 그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그 모범을 기억하며 오늘도 힘차게 나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굳은 믿음으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직접 오셨고, 가장 큰 사랑과 함께 많은 표징을 던져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을 말끔하게 치워 줄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편함을 해결해 줄 ‘종’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주님만이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길 앞에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만 굳게 믿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앞의 장애물만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의 웃음을 지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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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5월 10일
  |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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