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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조회수 | 2,433
작성일 | 05.04.22
예수께서는 천지창조 전부터 이미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요한 1,2)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으나(필립 2,6)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분(요한 1,11 참조)이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 곧 진리이고 생명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실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또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고별강론'을 하셨다(13,31-17,26). 오늘 복음은 고별강론의 일부인데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면서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로 시작된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촉구하신다(14,1-12).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뜻을 가르쳐주시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주님께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여쭙는다. 토마스의 질문을 받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그대들이 나를 알았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라고 말씀하신다.

필립보 역시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필립보는 구약의 성조들처럼 자기들도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이 요구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고나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믿는 사람은 당신이 하신 일들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당신의 제자들(교회)이 장차 지역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더 많은 효과(구원)를 낼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지난 주 복음에서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분만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뜻이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분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계시하시며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과 같은 분이어서 돌봐야 할 사람들을 확실히 아시며 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법'을 완전하게 깨닫고 수행하신 분이다. 하느님 사랑의 화신인 까닭에 자신있게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양떼의 구성원인 성직자나 수도자들 역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요 문이신 주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알리는 안내자요 소리일 따름이다. 영원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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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선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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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난을 앞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머지않아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당신 자신보다도 제자들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당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려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어린 자식들을 남겨 두고 멀리 떠나야 하는 부모의 애틋한 사랑이 엿보입니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담긴 율법(토라)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화한 것이므로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 준수는 약속의 땅에서 생명을 누리며 하느님과 함께 살게 하는 필수적인 길이었습니다. 율법에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었으므로 예수님도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마태 5,17 참조).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대신 인간적인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법보다 사랑을 앞세우지만, 인간적인 지혜는 사랑과 연민보다 법과 보복을 내세웠습니다. 결국 연약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의 땅에서 쫓겨나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고 하느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어 오시어 하느님과 함께 사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빵이며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요한 6,35 참조).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당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신(요한 5,30 참조) 예수께는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요한 1,14 참조).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구약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기 위한 조건으로 율법을 받았지만, 신약의 백성은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한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을 믿는 이들은 아드님을 본받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어야”(1베드 2,5)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산 돌은 식량 배급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과부들을 푸대접하지 않고 고아들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며 모든 이를 생명으로 이끄는 사랑의 봉사자가 됩니다. 산 돌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일이 있더라도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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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마치 철부지 어린애와 같았습니다. 스승의 뜻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몰랐고 또한 구원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천덕꾸러기들이었습니다. 그저 세 속적인 야심만 가지고 눈치만 보는 소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믿으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미래를 내다볼 때 주님은 사실 걱정스러웠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떠나셨을 때 그 못난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뻔했습니다. 더구나 박해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14,1). 최후만찬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 면서 특히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걱정할 것 이 없고 세상의 어떤 세력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 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길이 많아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뿐이고, 세상에 진리가 많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는 예수님뿐이며, 세상에 생명이 많아도 썩지 않는 생명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제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분만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최고의 삶의 지혜이며 또한 걱정에서 해방되는 길입니다.

어떤 자매가 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 참으로 많습니다. 남편도 성실하고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괜한 걱정 속에 눌려서 삽니다. 묵주를 들고 매일 미사에 나오면서도 걱정으로 자기를 묶어 놓고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루는 평일 미사가 끝난 뒤에 조용히 저를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가 죽으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얻을 것이며 그러면 그 여자가 재산을 빼돌리게 될 것이라며 한숨을 길게 쉬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랬습니다. 자매님은 건강하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젊으시고 더구나 남편이 굉장히 사랑해 주시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기쁘게 사시라고 해도 그 자매님은, 신부님은 모르는 소리 말라면서 사람의 인생이 어찌될지 누가 아느냐고 했습니다. 걱정도 팔자였습니다!

물론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미래가 활짝 열려져 있지만 그 속 내용은 캄캄하게 닫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겁도 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빠와 함께 있는데 미래의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분 뜻만 따르면 세상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가 믿는 것은 실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살얼음판을 걷게 됩니다. 믿으면 안전한 것을 맨땅을 까치발로 걷고 있으니 보는 사람도 불안합니다.

베드로는 오늘 2독서에서 좋은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시면서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태16,18참조).

베드로는 실로 우리의 반석입니다. 우리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 러나 베드로는 예수님만이 진정한 반석이라고 증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아니시라면 자기는 달걀 껍질보다 더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의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변덕이 심하고 충동적이었으며 학식이나 인품도 없었고 그 잘난 신앙도 들쭉날쭉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패해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머무르려 했고 또한 그분의 길을 가려 했기 때문에 위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와 베드로와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걱정이 많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반석인 줄을 모르니 두려워하며 또한 진리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헛된 진리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불안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모순이요 아픔입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이 바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며 또한 살아 있는 반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우리 또한 반석이 됩니다. 괜한 걱정 속에 인생을 썩히지 말고 참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평화신문 2000-01-02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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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만 할 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떠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동시에 오랫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이 당혹해하고 당황할 것을 염려하시며 그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그분의 현존보다 더 강력한 새로운 형태의 현존이 시작될 것임을 알려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요한 14,5)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단호한 어조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야말로 희망과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이미 걸어오셨고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여 주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곧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는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간절한 인간적인 욕구를 토해 냅니다. 그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친교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곧 아버지의 말씀들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업적들 또한 아버지의 업적들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 역시 그들이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일들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우리를 진리와 생명에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전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무릇 세상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계속 행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 대한 당신의 깊은 사랑을 표명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사람들이 이제는 당신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은 어떤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길이 있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다 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지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어떤 길을 가는 것이 행복의 길인지를 제시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예언자적인 소명이 구체적으로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안병철 베드로 신부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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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그러운 마음 갖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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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에서 개인적으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으면서, 여러 생각의 나래를 펼치게 해줍니다.

우선,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집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싶은 안도감이 듭니다. 또 물론 개개인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하늘나라에서는 집은 사는 곳이지 투기의 대상이 되는 곳은 아니겠다 싶은 생각에 미소를 짓게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우리가 살 곳이 충분히 있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무엇보다도 큰 위안을 줍니다. 이보다 멋진 구원 약속이 어디에 있을까요?

둘째로,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에서 우리 하느님이 얼마나 마음이 넓은 분이신가 감탄하게 됩니다. 내가 구원받
을 만한 어떤 업적을 이루어냈건 이루어내지 못했건 상관없이, 혹은 내가 키가 크고 잘생겼건, 키가 작고 못생겼건 상관없이, 혹은 피부나 출신지나 학위 등 무엇도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하느님의 마음은 크고 넓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또 그렇다면 이렇게 포용력이 크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 역시 이런 넓은 마음을 받아들여 우리 안에 있는 온갖 편견의 벽을 무너뜨리고 차별 없이 모든 이를 대하도록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넓은 마음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일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흔히 ‘신천지’ 내지‘JMS’ 같은 잘못된 유사종교에 빠지는 이들을 보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은 없으면서 ‘저’ 세상에 대한 관심만 과도하게 많은 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저’ 세상에서는 주목도 받고 권력도 누리는 ‘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저세상 한탕주의(?)’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평화를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교형자매 여러분,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성당에도 잘 나오지 못하고 미사와 봉사활동 등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내적으로 많이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공포와 걱정을 끼치는 이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해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우리 주님처럼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면서 작은 ‘부활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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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현준 루도비코 신부
2020년 5월 10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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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 확산 중심에 유사종교 ‘신천지’가 자리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한동안 종교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로 인한 사회적 논쟁이 있었다. 죄책감을 없애거나 복을 빌러 교회에 간다는 둥 그리스도인들을 반사회적이거나 이기적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왜곡하거나 의지가 나약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며 현실의 고통을 폄하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물론 이런 말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공격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맞는 내용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내어 교회에 나가고, 그들 나름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그곳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은 단지 사람들이 그 길에 이르는 것을 돕기 위한 안내판이 아니라 바로 그 ‘길’ 자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당신만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므로 엄한 곳에서 더 이상 헤매거나 근심하지 말고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바로 직전,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이들이 입으로는 목숨을 걸고 당신을 따르겠다고 장담하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치지만, 당신께서 잡혀가시고 나면 자기들이 가야 할 길도 모르고 방황하게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가셔야 하기에 단호하게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고 하셨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이제 다 끝장이 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사실은 이제 당신으로 인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당신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서게 될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나아가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갖고 세상의 일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너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믿음으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곧 길이다. 세상은 사방이 온통 위선과 사기와 거짓이 만연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믿어라, 내가 곧 진리이다. 너희에게 죽음의 위협이 닥칠지라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곧 생명이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유럽의 어느 수도원 경당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네 삶이 불행해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너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네 주인으로 삼지 않았고,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다.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너는 나를 능력이라고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 이제 모든 근심을 멈추고 오직 나를 바라보며 기도하라.”

세상에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그의 말씀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기에 세상의 어떤 역경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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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2020년 5월 10일 평화신문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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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고학년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입니다.

성당에 모여 교사들과 함께 여름행사를 준비하는데 한 여교사의 전화기가 울렸습니다. 그 교사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전화기가 울리고 교사는 받지 않고. 이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저는, 계속해서 전화가 오는데 왜 받지를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동네에서 설문조사에 응했고 번호를 적었는데, 그 이후로 사이비 종교에서 자꾸만 전화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완고하게 거절했고 그 이후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만나자는 문자와 전화가 와서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전화를 받으라고 했고, 그 교사와 함께 동네 아파트 단지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재차 전화를 했던 여자 청년 둘이 서 있었고 그들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인 저희를 보자 반색을 하며 기뻐했습니다. 저는 간단히 제 소개를 했고 곧이어 상호간의 뜨거운 설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대부분 흔히 우리가 받고 있는 뻔한 오해들,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종교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다’ 혹은, ‘성경구절을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천주교는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억지였고 저는 하나하나 반박하며 올바른 교리를 알려주었습니다.결국 그들은 점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지옥에 떨어지리라는 저주를 제게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대답했습니다.

“성경 구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따르지 않고 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군요. 저는 믿음이 다르다고 해서 당신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이 없는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모두가 지옥에 가리라는 교리를 우리는 배척합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모두가 지옥에 간다면, 태어나서부터 다른 종교를 믿으며 자라게 된 이들은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종교를 알 기회가 아예 없는 다른 종교 문화 안에서 태어난 이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매님들은 자매님들의 교리를 믿으며 선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믿으며 선하게 살아갈 테니 그렇게 살다 보면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제가 알려드린 교리가 마음에 남아있거든 언젠가 한 번 쯤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이 없는지 뒤 돌아 섰고 본당의 교사에게도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 논박에 의문을 제기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를 믿어도, 혹은 아예 믿음이 없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 우리가 믿는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정식 교리로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것인데, 이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포된 교리로, 그 이전 “천주교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교리를 뒤집는 새로운 교의입니다. 즉, 비록 하느님을 알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인 “양심”을 따라 살면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떠오릅니다. “천주교를 믿지 않아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왜 굳이 성당에 나와야 하는가? 선교는 필요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종교를 믿고 선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교리, 말씀,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이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기 때문이며 우리의 여러 죄들을 용서해주고 그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척박한 자본주의의 세상 안에서, 타인보다 내 자신의 이익이 중심이 되는 본성 안에서 아무런 이정표 없이 선하게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쾌락이 절대적 즐거움이 되는 이 세상 안에서 양심은 점차 무뎌지기 마련이고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 또한 느슨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는 마치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교리와 대치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를 연결시켜 묵상해보면 놀라운 예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외적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종교의 유무에 상관없이 예수님의 가르침, 즉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냐 하지 않느냐에 관한 기준을 새롭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실제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도, 다른 종교를 믿고 있어도 사랑을 실천하며 참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당에 나와 열심히 봉사를 하면서도 혹은 성직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비 그리스도교인들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한들, 미사에 성실히 참석한다고 한들 그러한 사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내 마음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당시의 유다인들처럼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하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만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는 것처럼 평소에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그리고 그 자리는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는가 혹은 따라가지 않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이를 명심하며 우리는, 주변의 이웃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으며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언젠가 우리를 주님의 거처로 이끌어 줄 것이며 그것은 타인에게 모범이 됨으로써 세상에 선포되는 진정한 선교가 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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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20년 5월 10일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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