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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
조회수 | 2,651
작성일 | 05.04.29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언약의 내용을 전해 주고 있고,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그 언약이 실현되고 있는 생생한 모습을 전해 줍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두드러진 특성들 가운데 하나가 상호간의 충실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항구하게 보여 주셨으므로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 역시 항구성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충실하게 계명을 지키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충실성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요구하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충실성과 당신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협조자 성령과의 관계를 설정해 주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변론자’ 또는 ‘협조자’, ‘위로자’라고 부릅니다. 그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전파하신 가치들을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가치들을 우리 안에서 내면화시키고 심화시켜 주십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 성령님이십니다. 나아가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심어진 희망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우리의 이웃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케 하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공동체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아들’로 남겨 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전해 받은 메시지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거나 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연약한 상태로 놓아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시지만’,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서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충실성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충실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입니다. 사랑의 길에 들어선 연인들이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부부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모습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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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안병철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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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강열한 사랑이 있기에!

"저의 남편은 외교관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들 부러워하는 외국공관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에는 가슴 터질 듯 기쁘고 행복했지요. 아들 하나 데리고 남편을 따라 나서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참 행복했었지요.”

그렇게 말하는 스텔라 자매님의 얼굴에 왠지 모를 우수가 서려 있었습니다.

“딸이 하나 생겼어요. 얼마나 가슴조리며 기다려 왔었는지요! 그런데 기쁨도 기다림도 잠시 뿐…. 가슴 벅찬 기쁨을 안겨 준 딸아이는 심각한 장애를 안고 태어났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그 때까지는 가정 일에 소홀하기만 했던 남편이 그 날부터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우리의 사랑 없이는 이 아이가 살아갈 수가 없어.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이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 부읍시다’라고 말하는 남편의 얼굴엔 왠지 모를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생명을 갖게 된 첫 순간부터 혼자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이 아이에게 누구보다 부모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라 여긴 남편은 과감하게 외교관직을 내 놓고 온 정성으로 딸아이를 돌보기 시작했지요. 고국에 가서는 이 아이가 장애아라는 이유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는 외국에 남아 살기로 하고 수년 간 살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웃 사람들의 냉소와 무관심이 있더라도 내 나라 내 땅에서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용기 있게 귀국하게 되었고 오늘 처음 성당에 온 것입니다.”

그 자매님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로 인해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가족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 아이는 장애아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사랑과 축복 그 자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부모의 얼굴은 행복하게만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성령을 청하시겠다는 모습을 전해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가 우리 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그분께서 명하신 계명들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믿는 모든 이들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래서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이란 행복한 사람’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는 장애아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축복과 사랑 그 자체랍니다’라고 한 그 부모의 말처럼, 우리가 바로 하느님께는 ‘축복과 사랑 자체’인데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안병철 신부
  |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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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1992년 10월 20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는 경악할 일이 벌어졌었지요. 세상을 비관한 한 젊은이가 자기 혼자 죽기 억울하다고 차를 빌려서 여의도 광장을 마구 내달린 것입니다. 그 때 여의도 광장은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도 타고 간단한 운동을 하며 여가를 즐기던 곳이었지요. 2명이 죽고 20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상이 벌어져 온통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기적 같은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여의도 차량 질주 사건으로 손자를 잃은 한 할머니가 그 범인을 양자로 삼았다는 뉴스가 보도된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한 정신나간 청년의 만행으로 애지중지했던 손자를 잃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범인을 미워하고 당장 사형 당하는 것을 지켜봐도 시원치 않았을 할머니가 교도소로 범인을 찾아가 용서를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자로까지 삼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감정을 넘어선 신비로운 신앙의 힘과 성령의 은총의 극점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할머니가 범인을 용서했을 때의 삶과 일생을 범인을 증오하면서 사형선고를 받기를 고대하며 살았을 삶, 그 중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이겠습니까? 지켜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용서는 은총입니다.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은총을 받은 사람이지요. 이렇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느님의 성령으로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당신의 몸과 피를 내주신 예수님께서 또 한 가지 우리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있지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
 
협조자이시고 지혜 자체이시며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언제 성령을 받았나?' 갸우뚱거리며 성령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이나 열심히 기도를 해서 받는 것쯤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신자 중에 첫 번째 순교자는 스테파노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지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며 그 죄조차 묻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 넘은 모습이지요.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사도 7,55).
 
성령이 충만했다는 표현이 그 답이지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인간의 의지를 뛰어 넘는 불가능한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오늘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으로 괴로울 때, 앙갚음하고 싶을 때, 또 친구나 남편 아내, 직장 동료의 배신으로 불신과 미움이 가득 차 있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께 기도하십시오. 나의 의지와 감정을 넘어서는 힘을 달라고 끊임없이 청하십시오.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넘어서서 세상이 줄 수 없고 인간이 찾을 수 없는 지혜와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총 속에서 힘든 삶을 의탁하며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기를 기도하며 나의 의지나 지식이 아닌 성령의 이끄심이 내 삶을 끌어가시기를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때 우리 삶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깃들고 우리는 현존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기양 신부
  |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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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부분의 본당은 5월에 ‘성모의 밤’을 지냅니다.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밤에 성모님의 순명과 희생을 생각합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도 함께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성모님에게 꽃다발과 노래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도 함께 봉헌합니다.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주제는 ‘사랑은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다가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주님을 증거하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을 믿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성령께서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갔었습니다. 아이들이 100여 명 있었습니다. 미혼모들이 맡긴 아이들, 결손 가족이 맡긴 아이들이었습니다.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여도,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아이들이 약하고, 자주 아픈 것을 봅니다.” 시설과 환경 그리고 음식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족과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육체적으로 허약해진다는 수녀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하느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안수해 줍니다. 안수를 통해 사랑의 성령, 위로의 성령, 뜨거움의 성령이 신자들에게 내리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도들을 두려움과 나약함에서 자유롭게 해준 것도 바로 성령의 기운이었습니다. 필리포스 사도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앞둔 교우 분을 위해 안수기도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두려워하던 자매님은 안수기도를 받으시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맡기신다며 웃는 얼굴로 병원에 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매일 기도를 열심히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제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신다면서 나이도 많으니 수술도 하지 않고 암을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면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먼 길을 가실 때면 며칠 전부터 준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찬도 미리 만들어 놓으시고, 빨래도 다 해 놓으시고, 찬장에 용돈도 넣어 두시고, 밥도 넉넉하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작은집에 연락하라고 하시고는 먼 길을 다녀오셨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골을 다녀오신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주셨습니다.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양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협조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빛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빛은 어둠을 이깁니다. 지금 자신의 몸에 성령의 불을 붙이십시오. 그분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령이시여! 나약한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에게 오소서. 저희 몸에 당신의 불꽃을 당기소서. 그리하여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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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직은 미욱하기 그지없는 당신 제자들을 애틋하게 바라보시며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사뭇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 계명에 집착하는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 꾸짖으시고, 심지어 회칠한 무덤 같다며(마태 23,13-35 참조) 힐난하셨던 그분이, 이제 와서 당신 제자들에게는 계명을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 하시다니.이것이 바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요즘엔 ‘내로남불’이라고 간편하게 칭하기도 하더군요)의 예수님 버전인가요. 사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꾸지람을 들었던 것은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의 근본정신은 잊어버린 채 자구에만 세세하게 집착하면서, 율법을 단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로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지어,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 가운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요한 7,19)고 말씀하시며,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구약의 율법을 대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완성하는, 그리고 그 근본정신을 환히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 보여줄 뿐 그 자체로는 구원의 힘이 없었던 율법은(로마 7,7 참조) 이제 예수님의 계명 안에서 그 근본적인 의미를 성취하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계명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가나를 사랑한다면 또한 서로를 사랑할 것이고,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움직임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행위로 드러나는 실천적인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무릎을 꿇고 이웃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랑이고, 이들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이며, 힘 있는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불의하게 내려 누를 때에는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용감히 맞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은 결코 스러지지 않을 것이니(1코린 13,8 참조),우리는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사랑 안에서 비로소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최규하 다니엘 신부 : 2017년 5월 21일
  |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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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령은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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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떠나실 것을 거듭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매우 큰 근심에 휩싸였다.

물론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는 제자도 있었고, 죽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제자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염려와 근심이 가득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3,16)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하느님과 당신을 믿으라고 당부하신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대부분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는데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라고 한다. 어쩌면 이 말들에는 인생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절망이 전부 녹아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 마디가 한 번에 모이면 자기의 삶을 놓아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외롭다’는 말은 모든 상황이 자기를 외면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생각 속에 남은 인생길을 고독하게 홀로 가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또한 ‘두렵다’는 말 역시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에 혼자 들어서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힘들다’는 말도 세상살이가 너무 치열해서 이 어려운 인생길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모르기에 너무나 고달프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도 살아가면서 늘 한두 번씩은 해본 말이다. 누구나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똑같이 힘들고 고달프고 외롭긴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해도 그 속성상 혼자일 수밖에 없기에 늘 외롭고 두렵고 힘든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외로울 때 함께 하시겠다고 위로해주시고, 두려울 때 겁내지 말고 안심하라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힘들어 낙심할 때는 언제나 당신께서 편히 쉬게 해주시겠다며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최고로 좋은 선물을 약속하시며 당신을 믿으면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으로 살게 되면 더 이상 외롭고 두렵거나 힘들지 않게 됨을 믿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특권이고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성령을 가슴으로 모실 때 그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새로워지고 치유의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어떤 것 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 후에 우리가 바라는 그 무엇이라도 되어야 그 의미나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님께 어떤 힘든 일이 있거나 필요한 지혜나 능력을 청하면 언제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도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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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2020년 5월 17일 평화신문에서
  |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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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랑과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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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연락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설치 예술가인 남편은 작업의 특성 때문인지 언제나 군화처럼 생긴 작업화를 신었는데, 예술가답게 작업화도 허투루 고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가볍고 편한 운동화를 남편에게 선물했습니다. 20여 년 작업화만 신던 남편은 부인이 선물한 운동화 덕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가던 남편은 진열된 운동화 한 켤레를 보고 맙니다. 그 운동화는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홀린 듯 매장 안으로 들어가 운동화를 집어 든 그는 부인을 떠올렸습니다.

‘운동화를 사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게다가 이거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
‘그래도….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이렇게 마주쳐버렸는데 어떻게 이걸 포기해!’
어떡하면 부인을 설득해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
찰나의 순간 억만 가지 수를 헤아린 남편은 결론을 내립니다.
‘이걸 사달라고 하면 야단은 야단대로 맞고
운동화는 운동화대로 포기해야 할 테니,
차라리 저지르고 야단을 맞자.
그럼 운동화는 남을 거 아냐.’

뿌듯한 마음에 운동화를 사 들고 귀가한 남편은
비장한 얼굴로 기꺼이 부인에게 이실직고했습니다.
이만저만한 이유로 운동화를 샀으니
부인은 저를 벌하고 사하소서. 아멘!

자진신고를 마치고 고개를 든 남편은,
그러나 크게 당황했습니다.
부인의 눈가에 깊은 슬픔이 맺혔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부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운동화를 봤을 때 내 생각이 안 났어?
난 좋은 걸 보면 늘 당신이 먼저 생각났는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사랑은 대상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사랑을 내보이며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일치에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이 사랑을 드러낼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계명을 지키는 것.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우리 삶 가운데 현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계명은 사랑을 구실로 서로를 옭아매는 구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명은 서로가 품고 있는 사랑을 드러내 주고 그것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1요한 5,3)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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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환민 마르첼리노 신부
2020년 5월 17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5.16
460 47.2%
바둑을 두는 사람은 ‘복기(復棋)’을 합니다.
복기하는 과정에서 잘 된 착점은 어디인지,
실수 했던 착점은 어디인지 확인합니다.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잘 하였는지,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실수 했는지를 확인합니다.
전체 판세의 흐름이 어디에서 변하였는지 확인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하지만 기후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수는 전체 바둑의 흐름을 여러 방향에서 복기할 수 있습니다.
복기를 잘 하는 사람은 실수는 줄이고,
흐름을 탈 줄 알기에 실력이 향상 됩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총선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장점은 무엇인지,
나의 단점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다음번 총선에 도움이 됩니다.
정치 평론가들은 총선의 결과를 놓고
냉철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평가에 인색한 사람은
다음번 총선에서도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엄격한 방역 기준을 정하고
미사를 재개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과 주님 부활의 기쁨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합니다. 부
활의 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도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언제가 있을 미래의 삶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를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였던 식사를 재현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고,
어려운 이웃을 기쁘게 도왔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 성야의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분노와 복수가 아닙니다.
부활은 평화와 용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토마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

부활 제3주의 주제는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부활 제5주의 주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쉽고 빠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가시밭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과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고,
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
성인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 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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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460 47.2%
신학생 시절 한 교수 신부님께서 특이한 성경해석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선택하시기 전에 밤 새워 기도하셨는데, 누구를 뽑을까 고민하신 것이 아니라 과연 이 덜떨어진 녀석들을 데리고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웃고 넘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일리가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뽑으신 열 두 사도들의 면모를 보면 그리 잘난 구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들은 유능한 지성인도, 좋은 직업의 소유자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은 당시 평범한 어부였고, 심지어 마태오는 지배국인 로마의 편에서 유다인들의 세금을 착취했던 세리였습니다. 반면 시몬은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세리와는 철천지 원수로 지내던 혁명당원 이었습니다. 물론 직업이나 신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세속적인 시선이니 넘어간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들의 개별적 능력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이 또한 특출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헤매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거듭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더 높냐고 대놓고 다투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어린이들을 눈치 없이 쫒아버리려 했습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이루시려 하자 말도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고, 수난 예고 때에는 아예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능력이 없다면, 의리나 용기, 혹은 우직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던 제자 베드로는 궁지에 몰리자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십자가 수난 때에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립니다. 한 마디로 이 열 두 사도는 엘리트 그룹과는 거리가 먼,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더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하다보면, 사실 우리들의 모습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을 매번 듣고 있지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여러 가지 기적을 청하면서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의심을 품게 되고 결과가 좋으면 주님의 도움보다는 나의 능력으로 이룬 것처럼 금새 주님의 도움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의리와 용기, 혹은 우직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유혹 앞에서 덧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요. 두렵기도 하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이 약속을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중 첫 번째 약속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리라는 약속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더 이상 당신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을지라도 그들을 계속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가 동반됩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랑의 유대를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게 해주실 것이고, 당신의 말씀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제자들이 지금까지는 스승이 하는 일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분의 말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성령을 통해 이런 상태를 극복하여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은 평화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후에 제자 공동체 안에서 긴장과 대립이 있을 것을 예견하시고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가 아닌 사랑의 논리에 의한 평화입니다. 이것은 곧 죄인까지도 내치지 않고 감싸 안는 지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왜 예수님은 이 부족한 제자들을 끊임없이 책임지려 하시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충분히 사랑스럽고 대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부족함과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예수님의 날카로운 가르침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회개하고 돌아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분의 눈에는 더 없이 사랑스럽고 대견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닌 회개 하고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결국 제자들이 당신과의 사랑의 유대 속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도록 성령을 통해 그들을 이끌어주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우리 역시 별로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께 돌아온다면 그분은 이런 우리 각자와 교회 공동체를 결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면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기억하면, 우리의 약함과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다시금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부족함을 성령으로 메꿔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명심할 것은 이러한 은총과 사랑은 거저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계해야 하며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고자 혼신의 힘으로 노력하며 되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사랑에 지치지 않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 우리를 대견해 하시며 다시금 품에 안아주십니다. 이러한 주님은 우리를 결코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우리를 따뜻한 손길로 이끌어 주시는 참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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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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