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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신부님, 사제관에 불 좀 켜 놓고 사이소!
조회수 | 2,849
작성일 | 05.04.29
"하느님, 당신이 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나이다.  당신이 내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신부님, 사제관에 불 좀 켜 놓고 사이소!” 좀 답답하다는 투로 어느 신자분이 충고를 했습니다. 전기세 몇 푼이라도 아껴 보려는 생각에 불필요한 전등은 다 끄고 지낸지 며칠이 지나서였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 보니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동구 밖에서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갈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바로 성당이고 또 사제관 이었습니다. 사제관에 불이 켜져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본당 신부님 잘 계시는구나 생각되고 마음마저 푸근해집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항상 우리 신자들 곁에 계시다는 든든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관에 불이 꺼져있으면 그것도 며칠씩이나 계속되면 신부님 어디 가셨나? 아프신 건 아닌가? 하는 별별 생각에 걱정이 되고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이러다 또 신부님 떠나시고 공소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곧 스승을 잃고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될 제자들의 마음을 미리 헤아리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1-3)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보고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고, 말씀을 들어도 올바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처참한 십자가 죽음을 보고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허무와 좌절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다는, 예수님이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할 때 기쁨은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져 가는 것이고 영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신 주님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무엇인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마음의 공허나 빈자리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다 함께 머물고자 하시니 또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느님, 당신이 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나이다.  당신이 내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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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최태준 필립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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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성령님!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2,1)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14,21)라고 하신다. 협조자이신 성령께 우리를 열고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

1.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형비리가 터지고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현대사 안에는 대통령 아들들의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약을 끊지 못해 다섯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리는 대통령의 아들, 소통령이라고 불리며 권력을 휘두르다 아버지 재임 기간 중에 쇠고랑을 찬 아들, 그 다음엔 세 아들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노벨상을 탄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아들들이 있었다. 입만 열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던 자들이 알고 보면 자기 주변 하나 반듯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개인 치부(致富)와 탈법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때, 국민들의 허탈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게 된다. 누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참 정치인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경건하게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할 때면 모두 열심한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누가 참 신앙인인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엔 성당 공사를 하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공사를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교회가 이웃의 아픔이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참 신앙인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야고2,17) 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신앙은 입술로나 겉모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느냐가 참 신앙의 척도이며, 기준인 것이다.

2. 계명을 지키되 사랑으로 지켜야

열매가 중요하다. 그러나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현대인들은 매사에 그 지향이나 목적의 순수성을 문제삼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실적(實績)만을 전부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속담에는 "모로 가나 기어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목적의 순수함이나 과정과 방법의 올바름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계명을 지키되 참으로 사랑으로 지켜야 한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 분은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1베드3,17)라고 하신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계명을 지키되 할 수 없이 하거나 장사꾼 적인 이해 타산으로 한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주일을 지키고, 교무금과 헌금을 내고, 교회 활동을 하면서도, 이런 일을 소홀히 하면 혹시 벌(罰)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한다면 그것은 자녀다운 자세가 아니라, 노예적인 태도이다. 사랑으로 계명을 지킬 때 모든 일은 구원적인 가치를 지닌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어떤 일의 크고 작음이나 가치는 그 일의 외양(外樣)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지향에 있다고 하겠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으로 할 때, 그것은 크고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제품을 만들고 활동을 할 때도 거기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 사랑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3. 내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기적인 목적이나, 장사꾼 적인 계산이나, 노예적인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일에나 인간적인 계산이나 욕심으로 할 때는 거기에 항상 악(惡)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어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매사에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이 스며들게 되고 하느님의 기운이 넘치게 된다. 우리는 다음 주일 승천 축일을 지내고 그 다음 성령강림 대 축일 맞게 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모님과 사도들이 기도 중에 성령을 기다렸듯이 성령강림 전 9일기도를 해왔다.

성령은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오신다. 예수님은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14,15-16) 고 하셨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오소서 성령님!", "주님 이끌어주십시오" 하며 성체성사로 오시는 주님께 나의 영적 가난을 고백하고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청하자.

유영봉 몬시뇰
  |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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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그 날이 오면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는 늘 두렵고 불안합니다. 갖가지 곤란이 겹쳐 닥쳐오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힘에 버겁습니다. 쓸모없고 가치 없는 인간처럼 여겨지고 성실함이 통하지 않습니다. 가난과 병고 속에서 티끌만한 빛도 찾기 힘들고 소외감과 고독에 휩싸입니다. 주님은 나의 부르짖음에 침묵만 하십니다. 계시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약속과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요 위로자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주님께서 곧 오시어 소생시켜 주시리라고 일깨워주십니다. 용기를 갖고 희망을 가집시다.

그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두렵고 불안해 한 적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친 주님께서 이제 세상을 떠나겠다고 하시니 그럴 수밖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용기와 용기를 주는 약속을 유언으로 주십니다. 아버지께 청하여 다른 보호자이신 진리의 영을 보내어,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하십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박해받는 초대교회 공동체와 함께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제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방으로 흩어지지만 침묵하지 않고 두루 다니며 힘차게 복음을 전합니다. 필리포스 부제는 유다인들이 구원 공동체에서 제외시킨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가서 기도하고 안수하니 그들도 성령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또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하시고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와 사랑과 진리가 우리를 통해 세상에 펼쳐지는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켜 고통과 불의를 당하는 이웃과 동화하는 때입니다.

그날,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 특히 오늘 이 순간이 ‘그날’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 속에서 세상을 이겨냅시다.

▥ 마산교구 강윤철 요한 보스코 신부 : 2017년 5월 21일
  |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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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보호자 파견과 위로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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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또한 낙담하지 않도록 하시오.(요한 14,27)

오늘 복음은 최후만찬에서의 예수님의 고별담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려하니 걱정이 태산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마음에 걸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선 협조자(진리의 영, 성령) 파견과 자신의 귀환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고별담화가 “떠나간다”는 이별의 말로 시작되었다면, 여기서는 “돌아온다”는 위로의 말로 전개됩니다. 예수님은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제자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자신이 과거에 말한 것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 곁에서 직접 청하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오늘 짧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제자들의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계명의 준수를 당부하시며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약속하신 성령은 ‘보호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믿는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갈라 4,6) 하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을 알게 하고 성자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합니다. 또한 진리와 거짓, 옳고 그름을 가리어 진실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기쁨과 환희로 우리의 삶이 채워지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영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면 영을 따라 계속 걸어 갑시다.”(갈라 5,25)

오소서 성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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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대열 신부
2020년 5월 17일 마산교구 주보에서
  |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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