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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진리이신 성령이여, 오십시오
조회수 | 2,304
작성일 | 05.04.30
언젠가 소년원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을 때 일입니다. 오랜 만에 만난 아이들이었기에 너무나 반가워서 서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꽃피는 봄날, 한참 꽃처럼 피어나야 할 아이들이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몹시 아파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녀석들의 모습들, 미사 때도 전혀 협조하지 않고 옆 친구들과 티격태격하는 녀석들, 침까지 흘리며 곤히 자는 녀석들, 여전히 '쫀쫀하게' 간식 때문에 싸우는 녀석들 모습에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습니다.

겨우 겨우 미사를 끝내고 나서 자원봉사자 어머님들께서 정성껏 준비해온 간식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수사님들이 준비한 재미있는 프로그램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작별 순간이 오더군요.

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아이들이기에 아이들 한명 한명을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형편이 못되었기에 집회시간이 끝난 후 저는 출입문 앞에서 섰습니다.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짧게나마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회 시간이 많이 지체된 까닭에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동시에 우르르 출입문 쪽으로 몰려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대다수 아이들과는 눈길도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단지 몇몇 아이들과만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소년원 운동장을 걸어 나오면서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아이들 한명 한명의 얼굴들이 떠올라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일순간에 우르르 몰려나가는 바람에 미처 쓰다듬어주지 못한 많은 아이들의 머릿수, 그러나 중과부적인 두개뿐인 제 손을 생각하며 새삼 '협조자이신 성령'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아이들 한명 한명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그들과 진정한 부자(父子)지간처럼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못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존재가 협조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가 성삼위 안에서도 적용됩니다. 가슴마다에 깊은 상처 하나씩 안고 밀려드는 백성들의 수효를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존재가 바로 협조자이신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가장 첫째가는 협조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두개뿐인 관계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 각자의 지친 인생길을 어루만져주시는 분, 우리 각자의 찢긴 마음을 싸매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첫째가는 협조자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비록 떠나가시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은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입김', '하느님의 바람', '하느님의 힘'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힘은 또한 오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힘이자 예언자들을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또한 성령은 지상에서 예수님 삶 전체를 인도해주신 협조자이자 교회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도 진리의 성령께서는 척박한 우리 안에 회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인간 안에서도 결정적인 '삶의 전환',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과 일심동체이시며 예수님의 또 다른 현존방식이신 성령이여, 오십시오. 오셔서 이 쓰라린 마음들과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협조자이신 성령께 마음을 열어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가치관들, 육의 행실들을 포기하고 보다 본질적 가치들인 성령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성령이여,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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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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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보호해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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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른 보호자를 보내주시어 영원히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함께 있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복이 많습니다. 우리를 잠시도 혼자 놔두지 않고 예수님께서 또는 다른 보호자가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가셨고,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에게 다른 보호자를 하느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다른 보호자와 함께 있습니까?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부터 그리고 십 년이 조금 넘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 인생을 형제들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입회 전 수련회에서, 입회 후 수련원에서, 서원 후 신학원 공동체에서, 제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했었습니다. 동시에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복된 일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께 사랑을 받았고, 또 어떻게 하느님을 멀리했는지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렇고,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은 참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만해도 대학에 진학하면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화학을 전공해서 연구원이 되리라 꿈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가톨릭 사제가 되어 화학 연구 논문이 아니라 주일 강론을 쓰고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잘되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일까요?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 중,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수도회에서 살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우리 인생을 바꿔놓았을까요?
화학 공부하던 사람이 어떻게 수도회에 입회를 했을까요?
화학을 공부한 사람이면 화학회사에 입사해서 일하거나 더 공부를 해서 화학을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일을 해야 맞지 않습니까?
우리 삶을 돌아보면 어디에선가 누가 내 삶에 개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의 어느 만큼이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보호자 때문입니다. 우리의 보호자가 인생에 끼어들어서 우리를 보호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을 늘어놓고 보면 뭔가 순서가 맞지 않는 것처럼 느낍니다. 가나다라 순으로 인생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것은 우리 눈과 귀로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보호자가 개입한 우리의 인생은 우리 눈과 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질서정연할 것입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했던 당신께서 보내주신 보호자의 보호와 사랑이 우리 인생에 녹아있습니다. 기도와 성찰을 통해 우리는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 그 보호자가 그때 거기에 계셨구나! 네, 보호자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오늘 하루도 뭔가 이해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호자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하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과 보호자의 보호 아래 하루를 살았습니다. 행복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슬프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상하지 않고 완전한 것입니다. 슬픔, 고통, 아픔, 절망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게 느낍니다.

보호자께서 예수님께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쁨, 행복, 희망만이 완전함입니까?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절망과 희망 그 모든 것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보호자의 도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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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동일 신부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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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물, 이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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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에서 각별한 관심이 요청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3D업종에서 묵묵히 제몫을 해내고 있는 제 3세계에서 건너온 이주 근로자들입니다. 불안감 반 희망 반을 안고 이 땅으로 건너온 이국 신부(新婦)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얼마나 마음이 저며 오는지 모릅니다. 물론 좋은 기업주를 만난다든지, 사람이 야무져서 꽤 큰돈도 모으고, 우리나라 생활에도 잘 적응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이주 근로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참담한 고통 속에 살아가지요. 너무도 배우기 어려운 한국말, 향수, 암담한 현실이 원인이 되어 갖은 스트레스를 받다가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차별대우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구미대륙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는 지나치게 깍듯하지만 우리보다 경제사정이 열악하다고 생각되는 제3세계 출신 근로자에게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내리누르는 성향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털어놓는 섭섭함 중에 큰 섭섭함은 그들 문화나 생활양식을 은연 중 깔보는 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 나라에는 이런 것 있어?”

“너희는 이런 것 먹기나 해?”

그들 역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전통과 좋은 관습이 있고, 독특한 음식문화도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 문화나 생활양식을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외국인 근로자들 역시 귀향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입니다. 자식들 건강만을 기원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외국인 근로자 가족들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오만한 우리 언행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이민의 날을 맞아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고민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시대 살아 있는 성전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 인간성 회복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고통당하는 이들 상처를 조용히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손길’,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부여받은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교회인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첫 번째 사명의 대상자들이 우리들 바로 곁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주 노동자들입니다.

오늘은 '이민의 날'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는 교황님과 뜻을 같이 하여 오늘을 '이민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급격히 증가한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이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작년 통계로 전체 결혼의 13%가 국제결혼이었고, 농어촌에서 이루어졌던 결혼의 30%이상이 국제결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50만이 넘는 이주 노동자들이 우리 곁에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한국 땅은 이주민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주민들로 인해 우리나라 안에 다양한 문화가 자리 잡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축복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은총입니다.

복음 정신에 따르면 이 땅에 나그네로 찾아온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를 찾아온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니 결국 이주민 한명 한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나그네를 기쁘게 환대하는 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제조업 분야에서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이주 근로자들께 오늘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한 비인격적 대우가 종식되길 기원합니다. 그들 인간성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들이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강구되길 기도합니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관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동사입니다. 결국 사랑한다면 움직여야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독창적인 문화를 기꺼이 수용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우리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그들도 엄연한 우리의 동반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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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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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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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6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활을 보증해주는 ‘성령’의 기쁜 삶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사마리아로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안수하여 성령이 충만하게 하고, 당신 사랑을 사도들에게 체험시켜줍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행하신 <고별담화>의 일부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면서 세 가지로 위로하시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위로는 먼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주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순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성령이 이미 제자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한 14,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이미 우리 안에 머무르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부활의 삶을 보증해줍니다.

<두 번째>
위로는 당신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시지만,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역시 이어서 모순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제자들 안에 현존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곧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가시면서도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부활생명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어긋나는 진술은 우리에게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예수님께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 시간, 두 공간 속에 동시에 있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모순이지만, 부활 예수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따로 없는 언제나 ‘지금’이며, 그분의 장소는 여기와 저기가 따로 없는 ‘모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가셨지만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당신의 영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날마다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순적인 진술 속에 담긴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시면서 사도들에게 남겨주신 선물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의 선물입니다.

<세 번째>

위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표시”가 됩니다. 곧 말씀을 받아 믿고 간직하고 지키고 준수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한다는 표시가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면,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혹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따라 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따라 살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분명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따라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이 바로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 살고 있는지요?
혹 자기 자신을 따라 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혹 세상의 물질이나 명에나 권력이나 힘을 따라 살고 있다면,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진정, 내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다면,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다른 그 무엇을 사랑하는 데는 자신이 스스로 사랑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는 반드시 ‘성령’의 도움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른 보호자”(요한 14,16)인 “진리의 영”(요한 14,17)을 보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 안에 계시게.’(요한 14,17 참조) 하시어, 제자들이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께서 함께 머무르시지 않으면, 결코 우리 스스로는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하는 일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실 때, “사랑”이란 물감으로 그 구원의 초상화를 그리셨습니다. 이 “사랑의 초상화”는 결코 입술로 하는 사랑의 고백이나, 그 어떤 감상이나 감정이나 지성으로는 그릴 수도 그려지지도 않는, 오로지 사랑을 몸소 행함으로만 그려지는 초상화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순명함으로써만 색칠되는 그림이요, 직접 사랑의 삶으로 온갖 색체를 짜내어야만 그려지는 그림입니다. 곧 ‘사랑’은 순명의 실천으로 그려지는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빈 도화지 위해 우리의 사랑의 삶으로 초상화를 그려갑니다. 우리 삶의 빈 도화지 위에 꽉 찬 예수님의 초상화를 베껴 그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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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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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457 97.6%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요한 1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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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내적, 외적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신앙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가시는 성령의 힘이십니다. 신앙의 시간은 우리를 향한 변화의 진리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숨은 것도 드러나게 하시며 우리의 어둠을 정화 시키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를 올바로 보게 하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십니다. 생명을 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진리의 영이시여! 이기심과 거짓으로 얼룩진 우리들을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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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457 97.6%
참 좋은 깨달음의 선물

-성령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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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성모성월 5월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온누리에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방금 참으로 흥겹게 부른 화답송 시편도 참 아름다워 요즘 분위기에 잘 어울립니다.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당신께 드려라,
너희는 주께 아뢰어라.
당신의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고”

놀라움, 새로움, 감사함중에 깨어 살아나는 신앙의 감수성입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시 부른 아름다운 시편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실감나게 고백한 시편입니다.

“주님께 아뢰오니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없나이다. 깨달음을 내게 주신 주님을 기리오니, 밤에도 이 마음이 나를 일깨우나이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아름다운 시편들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어제도 저는 참 좋은 선물에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스승의 날에 맞춰 40년전 초등학교 제자들 셋이 방문한 것입니다. 방문의 선물에 저는 셋의 선물을 요구했고 셋의 시를 선물했습니다.

요구한 셋의 선물은 세 노래였습니다. 어린이날 노래, 어버이 은혜, 스승의 은혜, 세대 상관없이 모두가 부를 수 있는 불멸의 노래를 들으니 참 행복했습니다. 50대 중반인데도 노래 부를 때의 빛나는 얼굴은 그대로 동심의 소년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셋의 시를 선물했습니다. 나눠도 나눠도 새로워 요즘 참 많이 나눈 단숨에 읽혀지는 외워지는 짧은 자작시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늘 피는 꽃이다”-

사람이야 말로 며칠 폈다지는 보통 꽃이 아니라 사랑으로 늘 피어있는 꽃입니다. 이 시가 너무 좋다며 어느 자매는 꽃 액자 사진에 이 시를 넣어 보내줬습니다.

-“아침은 늘 새롭다
나도 늘 새롭다”-

이 시에 대한 어느 자매님의 반응도 저를 많이 기쁘게 했습니다.

“너무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딸 노릇 잘 할게요!”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요즘 참 많이 행복하게 한 시들입니다. 이 또한 참 좋은 깨달음의 선물, 성령의 은총입니다.

이번 주 가톨릭 신문과 서울 주보에서도 주목할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지난 3월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5월16-24일을 ‘찬미받으소서 주간’으로 선포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주간은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기념하는 글로벌 캐페인으로 교황님의 서두 생태적 회개를 호소하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다시금 긴급히 호소합니다.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계속돼서는 안됩니다. 피조물을 돌봅시다. 이는 좋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에 화답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단도 기후 위기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골자 역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기후 위기, 지금 당장 나서야 합니다. 누이이며 어머니 같은 지구 생태계가 울부짖고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항).”

또 하나 교황님은 5월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전세계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묵주기도에 힘쓸 것을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5월 한달동안 모든 이가 가정에서 묵주기도를 드리는 아름다움을 재발견해 나가도록 제안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다 함께 바라보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는 기쁨입니다.

사랑의 기도가 우리를 아름답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응답이 기도요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자발적 기쁨으로 지킬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참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가 이미 받은 참 좋은 선물이, 보호자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를 깨우쳐 알게 함으로 무지에서 해방시켜 주는 진리의 성령 보다 더 좋은 선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진리의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또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깨우쳐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합니다. 주님의 간곡한 말씀이 되풀이 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계명이 답입니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니라 실천 동사입니다. 당장 사랑을 실천함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富益富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고 주님도 함께 계시니 정말 영적 부자의 행복한 삶입니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인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은총과 함께 가는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성령이야 말로 영혼의 영혼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성령의 알맹이가 빠지면 껍데기만 남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헛개비 같은 헛된 삶입니다.

사랑의 성령, 진리의 영이야 말로 우리 마음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치유제임을 깨닫습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의 성령뿐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인한 부단한 깨달음의 선물이요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마음의 끝없는 허기虛氣를 채울 수 있는 분도 오직 진리의 영뿐입니다.

어제 다녀간 한 제자의 감사메시지도 고무적이었습니다. 이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뵈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한결같이 밝은 선생님의 미소를 뵙고 오면 삶의 때를 벗는 느낌이 들어서 참 좋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계셔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성령의 은총으로 인한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의 기쁨, 개안開眼의 기쁨을 노래한 행복기도 다음 연입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이 모두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함께 가는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무지로 인한 몰라서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깨달아 알면 저절로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입니다.

제1독서의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필리포스를 보십시오.

필리포스가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무지의 병은 치유되어 모두 크게 기뻐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큰 기쁨이 넘쳤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필리포스를 통해 일으킨 사랑의 치유, 구마 이적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무지의 인간들입니다. 대부분 질병이나 불행들 거의가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사랑의 성령께 마음을 활짝 개방하는 것이 무지의 병의 치유에 결정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은총이 우리를 희망의 사람으로 온유하고 공손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고난을 꾿꾿이 견뎌내게 하고 버텨내게 합니다.

다음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할 수 있음은 그대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히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성령의 깨달음 만이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자발적 기쁨으로 지키게 합니다.

하여 우리는 무지에서 벗어나 기쁨의 사람, 희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을 몰아 내시고
성령의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언제나 구원과 희망의 표징으로 저희의 길을 밝혀 주소서.
당신의 보호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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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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