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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협조자 성령의 약속
조회수 | 2,687
작성일 | 05.04.30
이 주일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성령강림을 예고해주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주제와 더불어 2독서와 복음에서는 빠스카에 관련된 주제들과 우리의 자세라든지, 또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에 더 크게 나타나는 그분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기쁨’에 관한 내용들이 언급된다.

제2독서: 1베드 3,15-18: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18절).

이 옛 신앙고백에서 빠스카적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령’의 힘에 의한 그분의 부활 사이의 대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주실 것이다(로마 8,11 참조). 이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삶 사이의 고무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변증법적 논리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신 안에서 되풀이하는 체험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설명해 주어야 할 ‘희망’의 신비이다.

그러기에 박해 속에서 박해자들에게까지도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태도”(16절)와 “그리스도를 믿는 착한 행실”(16절)로 참된 승리자는 자신임을 입증하여야 한다. 사랑은 적개심이나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의 삶과 그 삶을 드러내는 모든 외적 표현을 통해 “그가 간직하고 있는 희망”(15절)에 대해서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여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았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부터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의 ‘힘’에 맡길 수 있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 요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위로’의 내용이 계속되지만, 사랑의 주제로 시작하여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것에 대해 ‘걱정 할’(14,1)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위로를 주시고 계시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셨다(21절 참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라야 한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다(15절. 21절). 그분의 계명이 실현됨으로써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나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더 많이 ‘알고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을 즉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하기 때문에, 그분과의 신비로운 만남을 갖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외에 또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16절).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분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7 절).

요한복음에서 ‘보다(theorèin)라는 동사의 의미가 현상을 넘어 하느님의 현존의 표지를 알아보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부활대축일 낮미사 강론 참조). 세상은 이러한 자세를 갖고있지 못하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님과 같다. 빛을 보려면 먼저 눈이 치유를 받아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이려면 ’세상‘이기를 그쳐야 한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 대한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1,5).

여기서 성령은 ‘협조자’(Paraclito)라고 한다. 이는 요한복음사가의 고유의 용어이다(14,16.26; 15,26; 16,7 참조). 본래는 변호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기운을 돋우어 주다’, ‘협조하다’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 위로해주고 보증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그 양떼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사도들 역시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보다 강렬하게 그리스도의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18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을 넘어 여전히 그분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될 것이다”(19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을 통하여 느끼는 것은 실제적 접촉과 같이 강한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 낮미사의 입당송에서 “나 부활하여 지금도 당신과 함께 있나이다. 알렐루야!” 하고 기쁨에 차서 찬미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신적 개입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매일매일’이 모두 ‘그 날’일 수 있으며 또한 ‘그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제 진정, 세상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이 부활을 체험하는 삶이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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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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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거룩한 움직임 - 성령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거룩한 움직임인 ‘성령’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섯 번이나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그리스어 ‘파라클리토(Paracletos)’는 법정에서 의뢰인(또는 피고인)을 도와주고 변호해 주는 ‘협조자’, ‘변호인’, 혹은 ‘보호자’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실 ‘협조자’를 약속하시면서 그 협조자를 “성령(聖靈)”이라고 부르십니다. 성령의 역할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그 특징이 확연해 집니다.

이 진리의 영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

그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그분은 제자들이 고난을 받을 때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며 그들이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입니다(마태 10,20).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하여 밝혀 주실 것입니다(요한 16,8).

제자들을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요한 16,13).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하실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말씀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참뜻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령은 우선 믿음의 길에서 내가 홀로 고독하게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을 거부하는 어둠의 세상에서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순례의 길에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옳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성령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성령은 우리를 온전히 진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성령이 베일을 걷어내고 그 안의 비밀을 알려 주실 때 우리는 온전히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이 나의 구체적인 상황과 일치하고,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말씀임을 성령을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동반자요, 위로자이며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또한 생명의 샘이요, 불이며, 빛이고, 사랑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샘이기에 퍼내고 퍼내도 고갈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주기만 해야 하기에 메마르고, 진 빠지고, 다 타버린 것처럼 공허하고 외로워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샘이 다시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나를 생기있게 채워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박경민(프란치스코) 신부
  |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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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신 ‘성령 강림 대축일’이며, 그 다음 주는 ‘삼위일체 대축일’이고 마지막 주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이렇게 대축일로 가득찬 6월 한 달 동안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세상 모두를 구원하시고, 협조자이신 성령을 통해 교회를 이끌어 가심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을 바라보면, 예수님 은 하늘로 오르시기 전 제자들과 지상의 여정을 마무리하시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짧은 단어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를 나 타내주는 말인 동시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 하는 대상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게 하고, 희생하게 하고, 아픔을 겪게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동안은 절대로 그것이 희생이고 아픔인 줄 모릅니다.

비 오는 길에서 추위에 떨며 그녀를 기다리다가 비를 맞는 그녀에게 우산을 건네주고 뛰어가는 남학생의 이야기라든가, 부당해고를 당하게 된 계약직 동료를 위해 남들의 평가나 자신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함께 항의를 하는 내용의 드라마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서는 아우슈비츠에서 한 사람을 대신해 자신의 몸을 바친 콜베 신부님의 거룩한 생애도 있으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목숨을 내어 바친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모든 두려움을 건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이성 적으로 판단해 봐!’하는 ‘안 될 것’이라고 절망감을 주는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한곳을 바라보며 희망 을 일구고 키워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환한 미소를 보기 위해서 그가 원 하는 모든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2독서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사랑을 하면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해 누군가 물어보면 설명을 아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독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 한다는 것, 그것은 그분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며,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우리 가 체험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젊은 연인들처럼, 예수님으로 내 모든 것을 가득 채우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 노인빈 신부>
  |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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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령님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베풀어진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그분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6,17 참조). 그러한 성령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복된 신앙생활을 위해 주신 ‘안성맞춤 선물’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안내자’이십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시는 ‘지혜’이십니다. 바른 양심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의롭게 살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보호자’이십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안내자요 지혜이며 보호자로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십니다.

그러한 성령님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선과 악을 식별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르고 풍요롭게 묵상함으로써 가는 곳마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 치유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례와 견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받게 된‘소명(召命)’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님을 받아 모신 사람은 자신 안에 갇혀 있을 수 없고 목석(木石)과 같이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필리포스와 같이 성령님께서 자신 안에 맺어주신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성실과 온유와 겸손함으로 형제들과 나누고, 더 나아가 그들을 예수님과 교회로 인도하여 그들도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복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을 모시고사는 이들은 말과 행동으로‘선교사(宣敎師)’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사입니다. 업무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선교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교지는 저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일상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든 사람과 만남과 장소가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과 형제들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활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일러주시는 복음의 기쁨을 기쁨과 자비가 가득한 우리의 음성을 통해 듣고 싶어 합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위로와 격려를 우리의 따듯한 시선과 가슴으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분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를 우리의 친절과 선행과절제로 얻어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이해와 용서를 우리의공감과 온유를 통해 얻고 싶어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님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주님을 증언하는 선교사로 부름과 파견을 받았으니, 오늘도 복음의 기쁨을 품고 우리를 기다리는 선교지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그곳에서 우리가 받은 귀한 선물을 사랑으로 한껏 형제들에게 베풀어 내 안에 계신 주님을 기쁘게 증언해 봅시다.“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 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 : 2017년 5월 21일
  |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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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계명, 사랑,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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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복음 속 ‘계명’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을 지닌 ‘사랑’을 의무적이고 강압적인 느낌을 주는 계명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일반적인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납니다. 계명은, ‘나를 향한 예수님 의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지는,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결국, 계명은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시려는 예수님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첫째로
‘나의 의지가 예수님의 의지에 기꺼이 순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참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의지에 나의 의지를 기꺼이 맞추고, 기꺼이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계명을 향한 나의 의지의 순명이 고통스러울수록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동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사랑은 좋음과 싫음의 정서적 선호나 감성적 느낌, 자신의 취향이나 손익을 넘어서서, 의지로부터 시작하여 행동으로 드러나는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이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를 통해서 묵상해 온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둘째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고, ‘예수님 사랑 안에서 성장할수 있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의지인 계명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의지를 향한 나의 의지의 순명은 곧 은총의 길이며, 영적 생활의 근본이 됩니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지는 예수님의 계명 안에는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있고, 나를 향한 예수님의 능력이 있고, 나의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있고, 나를 향한 예수님의 책임이 있습니다.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면 강물은 더는 강물이 아니라 바닷물이 되고, 사랑하는 이의 의지에 내 의지를 흘려보내면, 사랑하는 이와 내가 하나가 되어 나는 이전의 존재가 아닌 사랑하는 이를 닮은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의지(계명)에 나의 의지를 흘려보내면, 나는 이전의 존재가 아닌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의지(계명)를 향한 나의 의지의 순명이 가져다주는 사랑의 일치는 나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합니다.

계명은, 의무나 책임이나 강압이 아닙니다. 계명은,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시려는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의지’이며, ‘나를 향한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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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형준 안드레아 신부
2020년 5월 17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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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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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와 성령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기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오늘 복음은 사랑의 주제로 시작하여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것에 대해 ‘걱정할’(14,1)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위로를 주시고 계시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셨다(21절 참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어야 한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써이다. 그분의 계명이 실현됨으로써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나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을 즉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해서, 그분과 신비로운 만남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외에 또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6절).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7절).

요한복음에서 ‘보다(theorèin)’라는 동사의 의미가 현상을 넘어 하느님의 현존 표지를 알아보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이러한 자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같다. 빛을 보려면 먼저 눈이 치유를 받아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이려면 ‘세상’이기를 그쳐야 한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 대한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5).

여기서 성령은 ‘협조자’(Paraclito)라고 한다.
이는 요한복음 사가 고유의 용어이다(14,16.26; 15,26; 16,7 참조). 본래는 변호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기운을 돋우어 주다’, ‘협조하다’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위로해주고 보증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그 양떼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사도들 역시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이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보다 강렬하게 그리스도의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절)고 하신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느끼는 것은 실제적 접촉과 같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신적 개입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매일매일’이 모두 ‘그날’일 수 있으며 또한 ‘그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제 진정, 세상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이 부활을 체험하는 삶이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제2독서 : 1베드 3,15-18 :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8절).

이 옛 신앙고백에서 파스카의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로마 8,11 참조).

이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삶 사이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신 안에서 되풀이하는 부활 체험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설명해 주어야 할 ‘희망’의 신비이다. 사랑은 적개심이나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의 삶과 그 삶을 드러내는 모든 외적 표현을 통해 신앙인들이 지닌 “희망”(15절)에 대해서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여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았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부터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의 ‘힘’에 맡길 수 있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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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460 44%
하루를 기분 좋게 끝내려면 음(음) 이탈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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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피정을 들어가는 날인 지난 월요일에 평화방송에서 녹화를 잠시 하였습니다. ‘오다주’(오늘 다시 주님께)란 프로그램인데 두 진행자가 있고 한 생활 성가 가수, 그리고 제가 초대손님으로 출연하는 것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두 주 분량을 녹화하였습니다.

녹화를 잘하였을까요, 아니면 후회스러운 게 많을까요? 녹화가 만족스러웠다면 제가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평화방송에 출연한 지 벌써 3년이 되어가서 또 출연하고 싶었는지, 물론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너무 저 자신을 튀어 보이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녹화 끝나고 피정 기간 내내 조금 후회스러웠습니다.

저는 함께 녹화하는 분들과 그것을 보실 분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 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도를 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지나치게 저를 드러내려다 보니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녹화된 것들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보시는 분들이 ‘사제가 너무 튀어 보이려고 한다.’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에게는 제가 한 말들이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본래 말하는 사람이 기분이 좋게 보여야 그 말도 잘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려고 했는데, 후회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저는 분명 그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계명을 내 힘으로 지키려다 보면 자기 자신이 드러나려고 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행위임에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끝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영’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말 그대로 ‘진리’를 계속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행동하고 저럴 땐 저렇게 말하라고 끊임없이 코치하십니다. 마치 우리는 가수이고 예수님은 지휘자이시며 성령님은 악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크게는 예수님의 지휘에 따라야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은 악보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녹화하면서 지휘자만 보고 악보는 제 맘대로 불렀던 것입니다.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자만 보면 음을 잘못 내기 십상입니다. 보통 ‘음 이탈’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이런 것을 ‘삑사리’라고도 부릅니다. 노래를 잘하다가 한 번 삑사리 나면 그 노래 전체는 망치고 맙니다. 만약 내가 가수라면 그 삑사리 하나 때문에 며칠, 혹은 몇 달의 행복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하루도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살기를 바라시고
각자에게 맞는 악보를 주셨습니다.
그 악보대로 예수님의 지휘에 맞추어
잘 연주하면 모든 것이 잘 끝나서
잠잘 때는 참으로 기쁘고 보람될 것입니다.
그 악보를 받는 시간은
전날 저녁 잠자기 전이나
아침 일찍 기도할 때입니다.
그때 그날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악보를 잘 연주하는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보대로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챌 수 있을까요?
지휘자께서 신호를 주실 것입니다.

그 신호가 바로 우리 ‘기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밭에서 일하시다가
저에게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돈과 주전자를 건네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이 걸음으로는 1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습니다.
저는 빨리 뛰어가서 막걸리를 받아서 다시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그러다 주전자 뚜껑에 막걸리를 흘려 받아 마시던 어른들 흉내를 내보겠다고 저도 좀 마셨습니다.
한 번으로는 성에 안 차서 몇 번을 그러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주전자의 막걸리 양이 줄어감에 따라 왠지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아버지께 혼날 생각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에 적어도 반은 가져다드렸고,
물론 그래도 혼이 났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분명히 ‘사랑’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지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사랑뿐이 아닙니다.
‘기쁨과 평화’도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워진다면
분명 그것이 지휘자로부터 받는 지적입니다.
기쁘게 하루를 마치고 싶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잘 살피며 삑사리 나기 전에
내 안에서 매 순간 성령께서 찍어주시는
음표를 잘 따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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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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