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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두려워하지 마라
조회수 | 2,085
작성일 | 05.06.16
오늘의 복음성서 내용은 하찮은 참새까지도 보살펴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참새보다도 더 귀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으니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전해들은 복음을 사람들에게 대담하게 선포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이시다.

비신자인 애인과 관면혼인을 하고 몇년째 살고 있다는 어느 자매가 찾아와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너무 힘이 드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라는 문의를 해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그가 그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온 다음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고 시아버지는 빚쟁이들이 무서워 피해다니고 남편은 교통사고를 내서 구치소에 들어갔는데 시어머니가 무당에게 가서 물었더니 불교집안에 천주교 며느리가 들어와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천주교를 버리고 불교를 믿든지 하라며 매일 들볶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위로하면서, 이혼도 어렵고 배교도 어려우니 박해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하셨던 것 처럼 드러나지 않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며 돌려보냈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되면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100여년간이나 겪어야 했던 혹독한 박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한 형벌과 제도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잔인했던가!

나라는 나라대로 단지 가톨릭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직과 신분과 재산을 몰수하고 고문을 하고 옥에 가두고 유배를 보내 죽였으며, 문중에서는 문중대로 천주학쟁이가 문중을 더렵혔다고 족보에서 제적시켰다.

또한 가족들은 가족대로 날마다 갇힌 옥으로 찾아와 호통도 치고 울며 불며 애원도 하는 모습을 겪어야만 했으니 그 정신적인 고통이 오죽했으랴!

우리 가톨릭교의 지난 2000년 역사를 거슬러 볼 때 강한 저항을 받지 않고 신앙을 전파할 수 있었던 나라가 과연 몇 나라나 되었던가?

예수님의 12사도들 마저 박해를 받아 사도 요한은 파모스섬으로 유배를 가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 11명은 복음을 선포하다가 모두 순교하였다.

우리 가톨릭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님마저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을 가서 유아시절을 보내야만 했고 공생활 때에는 가시는 곳 마다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으시더니 마침내 사랑하는 제자에게 인신매매까지 당하셨다.

그토록 하느님을 사랑했건만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종교적으로 가장 큰 죄를 언도받고, 모든 사람들에게 남김없는 사랑을 베풀고 봉사를 했건만 가이사르 황제를 거역하여 스스로 유다인들의 왕이 되었다는 정치적으로도 가장 큰 죄인 역적죄를 뒤집어 쓰시고, 폭도로 변해버린 동족들의 온갖 학대와 야유와 수모속에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언덕 위로 몇번씩이나 넘어지면서 올라가 비참하게 처형되어 죽지 않으셨던가!

일찍이 예수님은 사도들이 장차 받게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너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했겠으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선택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이고 우리 그리스도교는 순교자들의 피로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할 수 있겠다.

그 숱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서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베드로라는 반석위에 세우시면서 지옥의 힘이 감히 이기지 못하리라고 보증하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킴으로써 자기네들이 승리한줄로만 여겼던 것이 예수께서 영광스러이 부활하심으로써 도리어 승리와 영광과 통치권은 예수님께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두셨으니 너희의 육신을 죽이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순교하여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머리털 하나 잃는 손실만도 못한 것으로 여기고 매일 매일 자아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이 장엄한 행렬을 이 세상 어느 권력이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스도의 왕국. 그리스도의 다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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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허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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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

지루한 장마와 더위가 기다리는 시간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 찾아오게 될 이 두 가지 사실을 두고도 우리는 걱정이 앞섭니다. 언젠가 새 본당에 발령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는데 청소년 미사 후에 모두 일어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환영곡으로 노래해 주었습니다. 그 때 처음 대하는 이 노래가 얼마나 징~ 한 감동을 주었는지…. 그 이후로 저는 이 노래를 애창하게 되었는데, 교우들이 "무슨 곡을 원하세요?" 하면 줄곧 이 노래를 신청하곤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흥얼거리며 불러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큰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잎에 팔리지 않느냐? …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두셨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행하신 설교 가운데 한 부분인 오늘 말씀을 가슴에 받아들이노라면 얼마나 용기가 생기는지요? 말씀 가운데 "두려워하지 마라"고 세 번씩 반복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고 열심히 그것을 쫓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삶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성장을 갈망하는 가운데 자신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대할 때마다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 가운데 삶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우리 삶의 여정은 걱정과 두려움을 극복하여 행복을 찾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대하며,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참으로 두렵고 힘들게 느껴진다면 다시금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인식한다면 나는 진실로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지닐 때 삶의 모든 두려움과 걱정도 그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얼룩진 과거의 시간들과 죄스런 나의 모습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하며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내용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참새 한 마리도 귀하게 여기는 내가 너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데, 부질없는 것들에 불안해 하며 걱정하느냐?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아!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다. 이제 너의 삶으로 나를 안다고 세상에 전하여라.”

오창일 신부
  |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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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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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 아줌마들의
억척스러운 삶의 현장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자판에 말린 생선들과 고등어를 손질하는 아줌마들, 고생한 세월로 이쁜 손이 거칠고 까칠한 손으로 바뀌고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장사가 낯설고
두렵지만 삶의 현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사랑, 엄마의 강한 힘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적극적으로 장사를 하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가난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고독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에서 이겨 낼 수 있는 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도 부담스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려움마저 듭니다. 거기다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선포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더욱더 고민스럽습니다.

복음 선포를 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처럼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신다”는 말처럼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두려움을 이겨내게 됩니다. 세상은 두려움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는 그 자체가 복음 선포의 큰 무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당하더라도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시며, 가장 큰 두려움을 통하여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

곧 육신을 죽이는
박해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지옥에서 영혼과 육신을 다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순교자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부어 주시어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체험케 하십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곳에 박해가 따를 것인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의 생명이 하느님 안에 있고 고난과 박해를 이기는 힘도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신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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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성한 안드레아 신부
2020년 6월 21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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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선교로써 천국 잔치를 선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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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유월도 막바지,
달라붙는 더위에 선풍기를 켰습니다. 그러다 지난 봄, 길에서 본 현수막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몸은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서 찬란한 봄을 앗아간 것이라 싶었습니다. 막막했고 기막힌 상황을 겪어야 했던 세상이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참으로 짧고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지요. 그 때, 주님께서는 여전히 나무눈을 틔워 새싹을 돋워주셨고 고운 봄꽃들로 세상을 치장해주셨으니 말입니다. 늘 그러하듯 약속에 충실하신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흥건하여 이 세상이 유지되도록 열심히 일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저 그런 주일로 여겨지던 연중 시기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물론 대축일의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중하고 깊으며 그 은혜 또한 으뜸일 터이지만 대축일이 아닌 연중 주일이라 해서 땅의 감사와 찬미가 줄어들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달까요? 그저 그런 우리의 매일에 온 힘을 쏟아 꾸려주고 계신 주님의 수고에 온 마음으로 화답해드리는 게 마땅하다는 걸 느꼈달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꿈꾸시는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정말로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꼽으실 일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가 빚어내고 있는 교회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어떠할지 살피고 싶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복장 터지고 열 받는 상황을 숱하게 만나게 되는데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신약에서는 그런 감정이 더 북받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수군거림, 소위 존경받던 종교인들마저 오직 주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려고 모략을 펼치기 일쑤이니 그렇지요. 그 때문일까요?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오직 제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들려주셨다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적어도 불필요한 감정싸움은 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오늘 복음말씀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우리 모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 이 사실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하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솔직히 이러한 주님의 뜻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줄 압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이신
주님의 뜻을 분명히 파악하고 살아가니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사실마저 전혀 자랑할 것 없는 하느님의 은혜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이리 살피니
죄인과 세리들과 몸소 ‘함께’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신 예수님과 한참 동떨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우리의 생각과 말이 정말 예수님을 닮아있는지…, 고민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을 꼽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쓸데없는 벽을 부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조직에 갇혀 신음하는 당신의 나라를 풀어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살기 위해서 고민합니다. 더더욱 사제는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 고심합니다. 주

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다울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숙고하며 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계획을 밀어 놓은 채 교회의 ‘운영’에만 마음이 쏠렸던 적이 허다합니다.

주님의 뜻은 뒷전에 두고
눈에 보이는 것만 정리 정돈하느라 열을 냈던 셈입니다. 이야말로 주님께서 선물하신 천국의 기쁨을 치워버리는 못된 짓이니, 마음이 얼얼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며 예수님을 배우는 곳은 더욱 아닌데 말입니다. 오롯이 사랑밖에 모르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고 그 사랑을 살아내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무수한 계획에 함몰하여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지워버리고 ‘사람 냄새’만 풍겨댔던 것이라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은 채 사랑도 온유도 희생도 봉사도 입으로 가르치려고만 들었던 것입니다. 절로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머릿돌로 삼아 세상에 없던 새로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해서 몸소 세상의 교회가 되셨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교회이기에 교회의 마음은 주님과 동일해야 옳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누누이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언제나 ‘잔치’가 벌어지는 기쁜 곳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이라 듣습니다. 나아가 교회인 우리의 삶도 늘 천국을 맛보는 기쁨으로 채우라는 당부라 믿습니다. 당신의 교회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심정을 온전히 살아낼 때에 천국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고백이라 새깁니다.

연중 제12주일입니다.
대축일이 아니라서 그저 그런 주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을 완전하게 하시려, 최선을 다해서 우주를 꾸리고 계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숨 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지난 시간에 마음을 묶어두는 어리석음을 털어냅시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계획한답시고 오늘을 팽개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마음이 제일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감사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처럼 하늘에 기쁨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를 “지붕 위에서 선포”함으로 하늘에 기쁨의 잔치를 선물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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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2020년 6월 21일 가톨릭신문에서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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