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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박해 : 신앙에서 필연적인 것
조회수 | 2,113
작성일 | 05.06.17
오늘의 주제는 그리스도 신자가 신앙 때문에 또 주님을 증거해야 하기에 자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 내지 ‘박해’이다. 그러나 그 ‘박해’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대 받는 표적’이 됨을 말하며,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예레 20,10-13: 가난한 사람을 구해주시는 주님

이스라엘 백성을 설교를 통해 비난했다는 이유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위협을 받는 예레미아의 절망감을 제1독서는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거센 반감이 있으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신뢰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 백성에게 원수를 갚아주십시오”(12절). 그 원수를 갚는 행위는 “뱃속을 아시고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12절)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이다. 그것은 복수의 행위가 아니라 정의의 행위이다! 예레미아는 그러나 고통을 당하고 두려움에 싸이면서도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감이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예레미아는 무한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상징적 형상’이 되었다.

복음 : 마태 10,26-33: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에서도 ‘박해’가 주제이다. 그 박해는 예언적이고 사도적인 선교사명에 따르는 박해임을 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 박해는 사도들과 복음과 구원을 선포하는 사명을 띤 사람들을 동요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격려하신다(26.28.31절). 두려워한다는 것은 혼신을 다하여 고백하여야 할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첫 번째 이유는
“감추인 것은 드러나기 마련”(26절)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있게 될 마지막 ‘심판’의 근거가 될 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32-33절).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대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참 생명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28절). 하느님께서는 육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의 폭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혼’을 당신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힘이 솟아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미 죽게끔 되어있는 육신 생명의 죽음이 필요하다. ‘승리’는 외적으로 목숨을 잃은 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10,39) 그 목숨을 “되찾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가 항상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단 돈 한 닢”(29절)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의 운명도 그분의 보살핌에 있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보다도 당신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경우처럼 구원과 증거의 힘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 복음을 전파하는데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인간법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변호사가 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고발자가 될 수도 있는 하느님의 마지막 법정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32-33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복음의 주인공이요, 대상이고 그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기준’이 된다. 이제 교회는 적대감이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붕 위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교회가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잠재우고 그들의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는 무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제2독서: 로마 5,12-15: 은총의 경우와 죄의 경우는 비교가 안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죄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은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에 대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잘 표현하고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12.15절).

이러한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해 교회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구원의 선물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온 세상에 용기 있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섭리해 주시며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도와주심을 믿으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구원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구원받은 자의 체험적인 삶을 전할 수 있을 때 올바로 복음을,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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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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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훨씬 귀하다.”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 신자가 신앙 때문에 또 주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 내지는 박해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은총의 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보증보다는 위험이 닥칠지라도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너희는.... 귀하다”(마태 10, 30). 사실 우리는 생각을 할수록 창조 이래 하느님께서 각자 자기를 염두에 두시고 일을 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 봄날에 갑자기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음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작년, 재작년에도 그 진달래는 그 자리에 화려한 자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다. 진달래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이 흘려보냈다. 이러한 실상을 어느 철학자는 ‘존재의 구멍’이라 칭했다고 한다. 있기는 있되 없는 것과 다름없는 존재, 그래서 구멍이 난 존재라 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진달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이웃을 새롭게 발견하는 때가 있다. 몇 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으면서도 어느 순간 불현듯 아, 이 친구가 내 옆에 있구나 하며 그 사실을 신기하게 여길 때가 있다.

무슨 말인가? 그만큼 무관심한 채 살았다는 얘기다. 왜 그러한 일이 생기는가? 사랑이 없을 때 그러하다.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 구멍이 난 세상을, 서로 구멍을 내면서 살 뿐이다.

이 구멍을 메우는 것은 사랑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에는 수억의 인구가 있지만 그들을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고 지구촌 어디에선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지만, 그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우리 삶은 그다지 큰 상처 없이 지속된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을 나누던 가족이나 연인이 있다면 그 사건 자체는 절대 다른 것이 된다.

평소 별 관계도 없이 지내던 이의 신상에 일어나는 사고는 대수롭지 않다. ‘구멍난 존재’의 현장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모르던 이를 사귀고 이윽고 사랑하게 되면 그 상대방은 더 이상 있으나 마나한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 앓거나 죽은 존재가 아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존재해야 할 사람, 오히려 내 생명과 맞바꾸어서라도 지속되어야 할 사람으로 바뀐다.

존재의 의미가 충만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다. 사랑에 빠지면 평소 유치하게 생각되던 유행가 가사 마저도 구구절절 의미 깊은 것으로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된 만사가 의미를 갖는다. 사랑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고통마저 감수할 용기를 준다. 사랑은 그렇게 만사를 뒤바꾸어 놓는다. 앓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사랑이다.

이 사랑을 확인하고 실천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들이 앓고 죽어가는 현장에 보내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의 의지를 되살려 놓는 그 사랑의 현장에 파견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러한 의미에서 성소의 완성이자 실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귀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인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다. 우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 쓸 데 없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그리고 꼭 있어야 하는 존재, 기뻐 도약 하며 지붕 위에서 사랑을 외쳐도 되는 존재들이다.

배영호 베드로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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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하느님의 사랑

오늘은 연중 제12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신앙 때문에, 또 주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활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 내지는 ‘박해’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러한 박해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원하지 않는 예언자의 길을 걸으며 고국이 망하고 동족이 포로생활을 통해 겪게 될 쓰라린 미래를 예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지만, 욕만 실컷 먹고 감옥에도 갇히고 끝내는 사형선고를 받아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예레미아 예언자는 오늘과 같은 탄식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 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이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단지 인간적인 보복이라기보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도 역시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의 ‘파견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여러 가지 능력을 주시고 또한 박해에 대한 말씀도 해 주십니다. 하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를 죽일 수 없으며, 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 박해’와 ‘시련’이라는 문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유혹도 받게 됩니다. 이는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마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신앙을 선택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세상적인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지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시며 ‘신앙’에 있어 ‘박해’는 필요없거나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꼭 필요한 부분임을 말씀하십니다. 곧 우리가 진정한 신앙의 길을 가게 될 때 반드시 박해를 이겨내야 함을, 십자가를 지고 가야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박해나 십자가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올바르게 갈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일찍이 대 데레사 성녀는 ‘나에게 고통이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셨다고 합니다. 곧 박해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 성인들의 삶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셨기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맡기셨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도 인간으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의 아픔을 겪으시고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에서 천상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이미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십자가 때문에 세상의 유혹과 싸우게 됩니다. 당장 내 눈앞의 이익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또 당장의 육신적 편함과 즐거움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 앞에서 신앙을 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하느님의 참 사랑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간직하고 용감히 신앙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전창훈 (스테파노)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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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 독서(예레 20,10-13)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문의 일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라시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명령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하는(예레 1,7)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그분의 약속을(예레 1,8) 잠시 잊은 듯합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데 마치 하느님께서 자기를 유혹하셔서 예언자의 일을 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언자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을 떠나간다는 절규를 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예레 20,7-9).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의 임금들과 백성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라고 하신 말씀에 대단한 희망을 걸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고통을 가져다주는 공포 덩어리(마고르 미싸빕)라고 놀리고, 가까운 친구들마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쓰러지기를 바랍니다. 원래 예언자란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면서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외치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예언자 자신이 백성들의 협박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죽어간다고 하소연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투정을 부린 뒤에 다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주신다는 시편 저자의 말(38,4.8-9.27)을 인용하면서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봅니다(예레 20,11-13).

오늘 제2 독서(로마 5,12-15)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죄와 은총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화해를 자랑하는 우리는(로마 5,11) 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이 죽는 것은 죄의 결과이며,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죽음을 죄의 결과로 이해하면서 구원의 은총이 필요함을 전제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빗나간 행동을 했던 아담부터 모세에 의해 율법이 생기기 전에는 두려움도 없었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나 모세 이후부터 율법에 의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 안에서 은총과 죄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느님을 떠난 결과로 인간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가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준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결과로 인간에게 거저 베풀어지는 은총의 권세는 인간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왔습니다.”(1코린 15,21)라고 한 바오로 사도는 죄의 결과인 죽음과 부활의 결과인 구원을 대조하면서 아담을 그리스도의 예형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지만 죄를 지은 아담(창세 1,26)을 첫째 인간으로,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2코린 4,4)를 둘째 인간으로 표현하지만 은총을 가져다준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로마 5,11).

오늘 복음(마태 10,26-33)은 초기교회의 선교체험에 바탕을 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증언하라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말씀하신(마태 10,16-25) 뒤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제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감추려고 할지라도 드러날 것이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지붕에 올라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널리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육신과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은 악마도 인간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뿐이시므로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믿음의 바탕이라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척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마지막 날에 심판을 예고하는 것과 같은 당신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권능을 가지신 분은 임금이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하십니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가장 가난한 이들이 먹던 고기가 바로 참새구이였으며, 구운 참새 두 마리 값인, 한 닢이면 하루 먹을 빵 값이었다고 합니다. “씨를 뿌지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마태 6,26) 아무런 권능이 없는 참새 두 마리도 한 닢을 벌어들인다면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보호하시고 아버지께로 거두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주인이신 분께서 헤아리시며 심어주신 머리카락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으므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마음껏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과 모른다고 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수용과 도전이며,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 할지라도 그분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을 일삼는 자들”로 선고받을 것이며(마태 7,21-23),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은 아버지께 복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마태 25,34).

오늘 복음 독서도 역시 지난 주 말씀처럼 선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뇌와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모두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보다는 남이 나보고 뭐라고 할까봐 두려워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일시적인 부끄러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아니 하느님을 믿는다고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당신 곁에 불러들이실 때까지
늘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아들을 죽음에 내놓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분이십니다.

어떻게 이런 분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분을 널리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런 분의 가르침을 소홀히 다룰 수가 있습니까?

방효익 신부
  |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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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과의 영적 일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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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순간순간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수없이 많은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두려움은 ‘기댈 곳이나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느낍니다. 재물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그 재물이 부족해지면 두려움을 느끼고, 권력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권력을 잃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고, 건강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그 건강이 약해지면 두려움을 느끼며, 지적 능력이나 육체적 능력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그 능력이 흔들릴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 직면하게 되는 두려움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거나, 사라지지 않을 곳에 기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기댈만한 분,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분,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즉, 참으로 나를 잘 아시는 분, 참으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 참으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 그렇기에 내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 일체감’입니다.
내적 일체감이란, ‘관계 속에 존재하는 서로 하나 되는 느낌이며 믿음’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힘이 세고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와 매
우 가까운 사람이라는 내적 일체감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슈퍼맨처럼 힘이 세고 거인처럼 키가 크고 몸이 거대해도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이와 아빠의 관계에는 내적 일체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이는 아빠의 힘과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빠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위협 앞에서도 두려움 없는 안전함을 느낍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도
‘내적 일체감’이라는 것이있습니다. 이것을 ‘영적 일체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영적 일체감이란,
‘하느님과 내가 하나라는 느낌이며 믿음’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를 향해 지니고 계신 당신의 사랑과 자비, 당신의 힘과 능력, 당신의 의지와 섭리, 당신의 뜻과 이끄심이 나를 돕고 있으며,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신다는 느낌이며 믿음입니다.

이 영적 일체감을 통해서
우리는 율법과 죄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삶에서 나를 두렵게 하는 여러 위협 앞에서도 안전함과 평온함을 느낍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영적 일체감’은,
하느님께서 가지신 힘과 능력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느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세상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불안, 세상에서 받는 여러 아픔과 상처, 세상의 오해와 공격에서도 내 영혼에 안전함과 평온함을 전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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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형주 안드레아 신부
2020년 6월 21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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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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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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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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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6월 21일
  |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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