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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
조회수 | 2,080
작성일 | 05.06.17
하느님은 사랑해야 할 분인가? 두려워해야 할 분인가? 물론 하느님은 사랑해야 할 분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죄스러운 인간에게 하느님은 항상 두려운 분이시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삶만이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줄 안다.

1.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두려워함

요즘 사람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암(癌), 직장에서의 퇴출, 고독, 이혼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도 많은 관련이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무병장수를 최대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암이라는 진단이 가장 두려운 것일 테지만, 나름대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는 사람에게는 연구소에서의 퇴출은 바로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리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으로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사람에게는 이혼 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 할 때 슬기, 통달함, 의견, 굳셈, 지식, 효성, 두려워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두려워함이란 어떤 뜻인가?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두려워 함'이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사랑해야 할 분이지 두려워해야 할 분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허물 투성이 인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매순간 모든 사건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은 두려운 하느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지만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거나 탈선하고 싶을 때, 우리 앞에 떠오르는 아버지는 잘못을 꾸중하시고 야단을 치실 아버지의 모습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죄스러운 것이 많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느님은 항상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함은 "하느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긴다." 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함' '하느님을 어려워함'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 없다.

2.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바빌로니아로 귀양가게 될 것임을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했다.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로 낙인찍으려 했다. 예레미아는 자신이 전해야하는 메시지 때문에 곤경에 처하여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위기를 맞는다. 그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기에 하느님께 하소연한다. "이제 이 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주십시오."(예레20,12) 하며 위기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의지함으로 힘을 얻는다.

우리도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불의에 동조하거나 그냥 묵인만 하여도 큰 이익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선(善)을 선으로 갚아주시고, 악(惡)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느님 때문에 손해 볼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다. 이것이 하느님을 안다"하느님이 어디 있어! 내 맘대로 하면 그만이야!" 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며,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며,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3.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일깨워주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 대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 후에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지나친 걱정이나, 억울함을 참지 못하는 울분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심한 불안 등은 모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증거이다."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마태10,29-31)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참 믿음이 있는 자에겐,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나의 삶 속에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가? 아니면 나는 내 맘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께 대한 경외심,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집회서의 말씀을 묵상해보자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과 희열을 맛보며 수(壽)를 누린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삶의 끝이 좋으리니 죽는 날에 축복을 받으리라.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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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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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하느님 모르는 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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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오 26,33)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태오 26,35)

주님께서 떼어 주신 빵을 먹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던 베드로가 대사제 집 안뜰 바깥쪽에서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오 26,72) 하고 부인합니다. 그 무겁고 어두운 밤에 닭이 울고 베드로도 슬피 웁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 근심이 베드로를 막다른 길로 몰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씀을 듣기까지 얼마나 많은 회한과 자책으로 밤을 보냈는지는 베드로 사도만이 알 수 있겠지요.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한
정부의 방역 지침에 우리 교회는 적극 동참하였고 다시 공동체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그동안 서로에 대한 염려와 함께 영성체의 간절함의 말씀도 들었고,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레지오를 안 해서 우선 편안하다든지, 미사에 안 가도 괜찮네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열심히 본당에 잘 오시는 교우분들입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지만, 모르는 척하고 싶은 생각이 들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안해하는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어떠한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증언해야 할 그 근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오 10,28-33)

모든 교우들과 함께 크게 성가를 부르며, 활기찬 미사를 봉헌할 날이 어서 오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모두들 평안,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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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조정제 오딜론 신부
2020년 6월 21일 마산교구 주보에서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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