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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고통받는 예언자
조회수 | 1,668
작성일 | 05.06.17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참으로 모순적인 사명을 가지고 불우한 생애를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하지도 않은 예언자의 길을 걸으면서 고국이 망하고 동족이 포로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쓰라린 미래를 예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욕만 실컷 얻어먹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끝내 사형선고를 받아 죽을 고생만 안타깝게 했습니다. 아마 순교의 월계관을 썼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짐작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그런 소리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세상에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특히 신앙인 자신이 겪고 있는 시련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체념도 합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해가 갑니다. 실은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으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불평도 했습니다(예레미아서 20,14∼18참조).

신앙의 갈등은
여러 곳에 있지만 특히 이유없는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모순된 현실 앞에 큰 고민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은혜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벗어나자고 믿음을 찾는데 그 고통이 믿음 안에서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벽에 부딪혀 냉담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주체이시고 핵심이시며 그 목적이십니다.
또한 은총과 축복 자체이시며 그 모든 것의 샘이십니다. 주님에게서 나오지 못하는 축복과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 자체는 세속적으로 엄청난 비극이요 불행이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는 표현도 쓰셨으며 "하실 수만 있다면 쓴잔을 거두어 달라."는 간청도 하셨습니다(마태26,36∼46참조).

맞습니다.
고난은 인간을 약하게 만듭니다. 존재의 근본부터 뒤 흔들어서 세상을 거꾸로 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하느님의 참 사랑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 믿음의 존재 발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바로 여기 서 중심을 잃어 하느님을 내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순을 타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특별히 고난이 많습니다.
일 잘하는 자녀에게 일이 많듯이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점지하신 사람은 십자가도 많으며 눈물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사셨고 성모님의 일생도 그러하셨으며 모든 성인 성녀들의 생애가 비슷했습니다. 좌우간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막말로 주무르실 때까지 주무르십니다. 그래서 열심한 자는 고난 속에서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지만 못난이들은 엎어져서 다 도망갑니다.

신앙을 떠나서도 선택받은 자의 길은 험난합니다.
외롭고 쓸쓸하며 황량한 벌판을 혼자서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독한 투쟁을 했는지 모릅니다. 목숨을 잃거나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많으며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혀서 생의 소중한 시기를 애처롭게 바쳤습니다. 그들이 단 한마디만이라도 권력과 타협에 응했더라면 더 편하고 부유한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받고 핍박받는 쓰라린 길을 사명감을 가지고 용기있게 걸어갔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쩌니 해도 우리는 사실 이 시대의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음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밀알이 얼마나 오랫동안 썩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신앙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러하며 행복이나 평화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길에서고 고통을 감수하고 뚫고 지나가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만일에 시련을 외면하고 배척한다면 그는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육신이 팔팔하게 살아 있어도 그는 결코 살아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박해가 와서
끌려가고 법정에 넘겨져서 혹 죽게 된다 해도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안심하여라.'라는 말씀들은 성서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호소하시는 당부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오늘을 통해서 내일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수고하고 땀 흘려서 천국에서 열매를 맺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 있고 가치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굴속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영생에 대한 희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면 믿음으로 인해 오는 고난은 그 무엇이든지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소망이 담겨진 분들입니다.
박해와 시련을 절대로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거기에서 여러분을 영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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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문 2000년 6월 17일
459 0.4%
[대구]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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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민주주의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21조 1항) 말하자면 나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뜻을 자유롭게 표현할 때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자기 검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어느 정도 자기 검열을 합니다. 적당한 자기 검열은 말의 수위를 조절하게 하고 말실수를 줄여줄 수 있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면
말의 열정과 표현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과도하게 계산하여, 남에게 스스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확신의 부족과 자신감의 결여가 생기게 됩니다.

신자들을 보면
직장에서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과도한 자기 검열을 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흔히 ‘나 자신도 잘 살지 못하면서 신앙적인 이야기나 신앙적인 표현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착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자기 검열은 내 신앙을 숨기게 되고 신앙에 확신이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

복음의 결말은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복음을 증언하는 삶은 말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활태도에
있어서 신앙 안에서 늘 감사하는 생활, 겸손한 생활, 어렵고 힘든 일을 솔선수범하는 생활, 그리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마음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그 모습대로 따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과도한 자기 검열로 자신을 숨기는 신앙의 삶이 아니라, 복음이 내 삶에 생활화되고 체득되어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자유로운 신앙인입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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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
2020년 6월 21일 대구대교구 주보에서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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