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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는 하느님
조회수 | 1,938
작성일 | 05.06.17
그들을 겁내지 마시오.
가려진 것치고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치고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겁내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 주님은 폭력으로 육체의 생명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외적 폭력 앞에서도 그들을 구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마태오 공동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박해와 온갖 어려움으로 배교 또는 교회 공동체를 이탈하는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권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분은 그대들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아주 겁납니까?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기억하신다면 좋은 데 우리를 안내하시는데 선용하시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인정하면 하느님 앞에서 주님은 그를 인정하신 답니다.

허나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실 거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주님은 전 생애가 끊임없이 거절당하시는 삶의 연속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제자, 부모, 유다스, 베드로까지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오늘도 가정에서
어쩌면 교회에서 조차도 주님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가 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단죄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없습니다.
주님은 무한하신 자비로 그들을 단죄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항상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증거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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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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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켄트 M. 키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을 베풀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에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하다 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이상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전 포고 없는 불법적인 남한 침공으로 남북한 합쳐 250만 명이나 죽었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과부와 고아가 무수히 생겨났으며 나라가 황폐해졌습니다. 그리고 휴전선이 그어졌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고 지금까지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해마다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여, 북한 교회를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해 오고 있고 모든 본당들은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남북 간에 화해가 가능할까요? 화해하기 전에 우선 밝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북한이 느닷없이 남한으로 쳐내려와 엄청난 사람을 죽였으니 북한이 가해자이고 남한은 피해자입니다. 고로 북한은 남한에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김일성씨도 죽을 때 잘못했다는 말 없었습니다. 그 뒤로도 줄기차게 남쪽을 괴롭혔습니다. 지금도 백성들을 굶겨죽이면서까지 미사일 쏘고 핵실험을 하여 남한을 겁주고 있습니다. 겁먹지도 않지만 북한은 회개를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용서 빌기는커녕 돈 달라고 계속 뗑깡만 부리면 안 됩니다. 용서를 빌고 회개했다는 신뢰할만한 증표를 계속 보여야만 합니다.

피해자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서를 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계명을 지키며 말씀에 충실하면 주님께서는 축복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면 운명을 바꾸어 주신다. 흩어진 민족을 모아 주시고 약속하신 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나쁜 말은 은총을 방해한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분노와 폭언은 삼가야 한다. 중상과 악의에 찬 말들은 피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이요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려면 일치해야 한다. 두 단체나 세 단체가 한마음이 되려면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려면 서로 용서하며 화해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끝없는 용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만이 아닙니다. 신자 개인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을 닫게 됩니다. 닫힌 마음으로는 함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남과 북이 함께 기도하는 날이 화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북측도 종교를 말살하지 말고 하느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북 간에 같은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공통분모가 생겨 통일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1천만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나고,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통일의 날이 빨리 오도록 이 미사 중에 기도드립시다. 아멘. 감사합니다.

방윤석 신부
  |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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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중 제12주일의 복음말씀은 지난주일 복음의 연속으로, 지난주일, 길 잃은 양들에게, 그리고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곳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은 파견 받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용기와 각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주시는 주님은 말씀은 한 마디로 ‘두려워하지 마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치 후렴처럼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는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다시 한 번 반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워두셨으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 잡는 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과학문명의 혜택을 많이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걱정에 휩싸여 있기는 예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걱정꺼리가 없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평생을 사제관에서 봉사해온 한 여인이 일생소원이던 성지순례를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충분히 모이자 드디어 이스라엘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기에 극도의 공포감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네 명의 주교님이 같이 탔음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비행기가 고도에 오르고 바다를 가로지르며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비로소 그는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며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비행기 엔진 중 하나가 풀려서 떨어져나갔습니다. 여인은 “이제 우리 다 죽어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승무원은 기내 승객들을 진정시키고자 애썼고, 특히 이 공포에 질린 여성을 다독이며 모든 것이 잘 통제되고 있다고 안심시켰습니다. 또 기장이 비행기를 다시 뉴욕으로 회항시키고 있으며, 세 개의 엔진으로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해서 “이제 우리 다 죽어요!!”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승무원은 “걱정 마세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잖아요.” 하며 여인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우리 엔진은 지금 세 개에요. 하지만 보세요. 네 분의 주교님들이 함께 계시잖아요!”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짧게 응수했습니다. “저는 세 분 주교님보다 네 개의 엔진을 원해요.”

이 이야기는 코믹하기는 하지만 ‘두려움’이라고 하는 인간 경험의 아주 중요한 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두려움’이 우리 삶을 지배하곤 합니다. 우리 인간 삶의 여정은 두려움과 그것을 극복하여 행복을 찾고자하는 시간의 연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머니 태중을 벗어날 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젖을 떼면서 어머니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느끼는 두려움, 청년 시절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중년이 되어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자신만을 믿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잠 못 이루는 나날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젊어서는 남편에게, 그리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온갖 마음의 상처와 애환을 겪으며 살아온 여인에게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생에 대한 공허감과 불안, 우울감, 이제는 늙고 병들어 자신의 얼룩진 생을 돌아볼 때마다 엄습해 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느님 앞에, 사람들 앞에 지은 죄 때문에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자신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암이나 에이즈, 인종차별, 전쟁과 폭력, 지구온난화와 자연재해 등에 대한 공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처럼 숱한 두려움과 공포의 종류들이 존재하며, 다만 개인이나 집단이 느끼는 정도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크고 작은 걱정과 두려움들, 또 이성적인 것이든 비이성적인 것이든 그 모든 두려움들에 대해 그저 간단하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날을 걱정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제자였기에, 그리고 그분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에 그들은 탄압받고 고통 받을 것을 미리 내다 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독서에서 표현되듯이 죄로 가득한 세상에는 진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려는 사람들이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선 바로 이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겪을 그 위험들과 두려움을 달콤한 말로 포장할 마음도, 제거해줄 마음도 없으셨습니다.

그 옛날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예수님 자신,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서약한 것 때문에 고발당하고 박해받고 위험에 처해질 것입니다. 첫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이 당당하게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다.”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런 신념과 확신은 예레미야가 지속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하루는 자신이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저주하다가도 그 다음 날엔 다시금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낼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도 타락하고 악의에 찬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간직하였던 그였기에 그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진 못했던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두려움과 함께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사실 인간으로선 다 파악하기 힘든 방식으로 하느님께선 매 순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선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선 제자들이 괜히 두려움을 키우지 않도록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대신에 믿음을 키우고 그 믿음이 두려움을 반드시 다스릴 수 있음을,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게 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30절) 계시며, 우리를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의 영혼을 멸망시킬 수 없는데, 그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니,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면, 세상의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두려움의 반대말을 ‘희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나의 보호자이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들을 손수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주님의 사랑에서 벗어날까를 두려워하며 그분과 우리를 연결하고 하고 있는 믿음의 줄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파가니니’라고 하는 한 음악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태리가 낳은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습니다. 어느 날, 음악 애호가들이 모인 연주회장에서 연주회를 가졌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주 도중에 줄이 하나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이 파가니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세 줄을 가지고 계속 연주를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니까 또 한 줄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조금 가니까 또 한 줄이 끊어졌습니다. 이젠 줄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이 대단히 미안해하고 당혹해 하면서 ‘오늘 이 연주야 말로 파가니니에게 있어 최고의 불행한 연주회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청중들을 바라보고 잠시 음악을 멈추더니 그 남은 한 줄을 가지고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그 사건이 지금까지도 그 사람을 그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이올린에는 4줄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줄은 G선 입니다. 때론 G선만 가지고도 아주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낼 수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어느 때에,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줄이 끊어져 나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물질의 줄, 명예의 줄, 가정의 줄, 사랑의 줄...... 내가 가지고 있는, 내가 의지 할 수 있었던 모든 줄들이 끊어지고 가장 낮은 G선만 남았을지라도, 우리는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 삶 속에서 G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연결된 줄이 있는 한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하며 앞으로 우리들의 삶이 주님을 떠나 이상한 곳을 기웃거리거나 뒤적거리며 남들의 말에 좌우되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과 확고하게 연결하는 믿음과 희망의 줄을 놓치지 않도록 굳게 결심하여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민병섭 신부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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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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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천해수욕장 신부'입니다.
올해 1월, 대전 둔산동성당에서 봉헌된 새 사제의 첫 미사에서, 주인공이셨던 김모 신부님이 저를 이렇게 소개해주셨습니다.

“대천해수욕장 주임으로 가시게 된 정병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이십니다.”

비록 보령시에서
그것을 허락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렇게 5개월 전부터 대천해수욕장 주임이 되었고, 제 관할구역을 관리하느라 지금도 해수욕장을 거닐고 있습니다.

이름이 알리진 휴가지이다보니
주말이면 많은 외지분들이 대천해수욕장을 찾아주시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교우들도 꽤 많이 계십니다. 그 덕에 저는 매 주일마다 새로운 얼굴들과 신선한 감동으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렇게 외지에서 오시는 분들을 만나면서, 처음 한 달 동안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성당에 오시는 거지?"

신부가 되어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에 저는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바쁘고 치열한 몸부림을 하다가 큰 결심을 하고 떠나온 휴가이니 일분일초가 아쉬울 사람들인데, 성당에 와서 미사를 봉헌하겠다는 마음이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큰 맘 먹고 놀러 와서 회랑 조개를 안주 삼아 얼큰하게 술 한 잔 기울이고 나면, 늘어지게 늦잠도 자고 싶을 텐데도 성당에 와서 의젓하게 자리를 채워 주십니다. 일행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자기 한 사람이라, 일행들과의 일정에서 떨어져 나와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꽤나 눈치도 보였을 텐데도 홀로 앉은 그 모습이 참으로 대견합니다.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성당에 오시는 거지?'라는 머릿속 생각은 궁금증이 아니라, 사실 교우들이 참으로 대견해 보였기 때문에 생긴 묵상꺼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띠를 두르고 전단지를 돌리고
확성기를 크게 키우면서 거리를 누비는 것만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드러낼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다면, 하느님께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작은 실천을 할 수 있다면, 이 작은 수고들은 아주 위대한 복음 선포가 됩니다.

'왜, 굳이’
휴가까지 와서 성당을 찾는가의 질문은,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기 위한 필연적인 복음 선포라고 답을 내려봅니다. 그러한 작은 마음과 몸짓으로 우리 교우들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분명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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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정병선 F.하비에르 신부
2020년 6월 21일 대전교구 주보에서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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