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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 0.4%
[수도회] 주님으로 가치있고 존귀한 우리
조회수 | 1,664
작성일 | 05.06.17
지하철을 기다리던 제가 습관처럼 간이서점에 진열된 책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눈에 확 띄는 책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충동구매를 하게 됐습니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괜찮았을텐데, 책값을 지불하려다 보니 또 다른 시집-전부터 꼭 읽고 싶었던-이 눈에 띄길래, '에이 모르겠다'며 그 시집까지 사게 됐습니다.

파리만 날리고 있다가 순식간에 두권씩이나 책을 팔게 된 주인 아주머니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면서 갑자기 친절해졌습니다. 그리고 괜히 말을 거는 겁니다. "선생님, 정말 책 고르실 줄 아시네요." 갑자기 머쓱해진 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험험! 아, 그러세요? 뭐, 제가 원래 그래요"하면서 책을 받고 돌아서는데, 아주머니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잠깐만요! 이 요리책 덤으로 드릴테니, 사모님 갖다드리세요."

「JESUS CEO, 최고 경영자 예수」(로리 베스 존스 지음, 한언 출판사),
제가 고른 책 제목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과 도덕성, 지혜, 영감 등을
효율적 경영을 위한 리더십에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자신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늘 긍정적으로 바라보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결코 자기비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말할 때 언제나 사랑스럽고,
강력하며 확신에 찬 단어들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 어느 구절에도 예수님이 자신을 비하시킨 내용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인식과 자기애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확신에 찬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한 생명의 통로라고 믿었고,
자신을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철저히 믿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은 리더십의 핵심적 특성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철저하게도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이었으며 자신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였으며, 한평생 자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했던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과는 반대로 철저하게 자신을 냉대하고 거부해왔던 제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습관처럼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하지? 왜 이 정도밖에 안 되지? 언제쯤이나 좀 변화가 되려나?"라는 넋두리를 반복하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좀더 자신을 존중하고 긍정하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지닐 것을 요청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앞에 진정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진정 우리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넘치도록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분 손길 아래 숨 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한 평화의 사도로 존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오늘 복음의 권고말씀처럼 육신보다는 영혼에 우위성을 두는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자주, 그리고 많이 버리는 일입니다. 더욱 자주 떠나는 일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욕망도 버리고, 슬픔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그 마음조차 버릴 때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진정한 평화의 기반을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버리고 버려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어지는 그 순간,
그 버린 공간에 주님의 참 평화가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만물, 모든 존재, 매순간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 은혜로움과 감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이 극복된 진정한 평화의 원천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고통과 절망, 두려움과 의혹 그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도 오직 주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할 때, 그분께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맡길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딜 가도
서정적 영화나 배경이 아름다운 드라마를 보는 듯한 완벽한 평화란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굳건히 자리잡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평화입니다. 그분이 계심으로 인해, 그분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됨으로 인해 누리게 되는 위로, 그것이 참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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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459 0.4%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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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12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예레 20,11)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기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오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오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서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서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두려워하지 말라”(마태오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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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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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6월 21일
  | 06.21
459 0.4%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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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하느님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사람을 향한 두려움은 결코 영원하신 하느님을 뛰어넘어 덮칠 순 없습니다. 사람을 향한 두려움을 어김없이 부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통해 우리 사람이 더 귀해지고 더 아름다워집니다. 비로소 사람은 하느님을 통해 편안하여집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댈 수밖에 없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사람의 길은 사람을 더 귀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향하는 길입니다. 서로를 귀하게 함과 소중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시어 행복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소중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진심으로 압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간이 우리 영혼을 되살리는 은총의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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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6월 21일
  | 06.21
459 0.4%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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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섯 곳에 모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파견설교’로 마태오 복음 10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를 발탁하심,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시 말씀,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말씀, 예수님 추종에 따른 보상.

연중 제12주일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파견 설교 가운데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승의 생명은 죽일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만은 죽일 수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가지 생명을 다 앗아가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찮은 미물인 참새의 생명도 아끼고 돌보시는데,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작업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골적인 박해자들과 냉랭한 반대자들,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주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때로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오 복음 10장 26~27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당당한 대세 종교이지, 캥기는 것이 많아 은밀히 집회를 여는 밀교(密敎)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메시지는 태양처럼 밝은 빛, 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생명이 약동하는 빛 안에서 전해집니다. 우리 집회는 비밀집회도 아니고 지하 운동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자신들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하거나 은폐시켜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포되어야 하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는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손길 한번 닿지 않는 교회 도서관 먼지 낀 영성 서적 안에 잠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거리에서 울려퍼져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자신의 뒤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절대 그게 아니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0~31절)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나 같은 인간, 하느님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만큼
하느님께서 내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허물투성이뿐인 내 일생일지라도 그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일상생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분의 큰 관심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라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생활 전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고 암담해보일지라도 더 이상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보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영양가 있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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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0년 6월 21일
  | 06.21
459 0.4%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戰士

-두려워하지 마라, 함께하라,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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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당신의 넓으신 자비로 나를 도우소서”

방금 부른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화답송 후렴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온갖 불행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환한 두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늘 미소짓는 교황님 얼굴에 후덕해 보이는 중년 후반부의 여성이 함께 찍은 참 행복해 보이는 아름다운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그 유명한 인권 운동가였다 살해된 마르틴 루터 킹의 따님이었습니다. 머릿 기사의 제목은 그녀의 고백이었습니다.

“교황님과 내 아버지는 똑같은 꿈에서 일치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마르틴 루터 킹,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들이자 성인들입니다. 늘 하느님을 꿈꿨던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했던 분들이며 이런 성인같은 분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서서히 실현되어 갑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 세상일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행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습니다. 모든 불행과 혼란은 하느님 중심을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요 참행복의 원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가 54장, ‘주님은 나의 목자’는 언제 불러도 감미롭고 위로와 힘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
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하느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의 묘비명 부탁에 지체없이 추천했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성구도 생각납니다. “잘 놀다 간다”라는 묘비명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안정과 평화가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요즘 같은 불확실한 삶은 더욱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합니다. 흡사 두려움에 포위되어 불안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같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바로 믿음 부족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믿음의 빛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박해 상황중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만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지 마련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요 믿음의 기초입니다.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두려움, 즉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경건敬虔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할 때, 올바로 두려워할 때 세상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하느님 두려운줄 모르는 믿음 부재의 사람들이기에 생각없이 함부로 본능의 욕망대로 막 살기에 불행한 삶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참으로 하나하나 귀하게 살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사람들은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귀히 여깁니다. 참으로 주님께 청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고통의 깊이는 믿음의 깊이입니다. 두려움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버텨낼 수 있는 깊은 믿음을 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넓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보십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두려움의 고통의 깊이 없이는 믿음의 깊이도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을 믿음을 깊이하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하여 더욱 견고해 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둘째,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 가까이 있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치유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이보다 더 좋은 말씀도 없습니다.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저절로 힐링이요 안정과 평화의 행복한 삶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돌판에 세겨진 주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제 여섯째 숙부가 임종전 일주간 붙잡고 사신 말씀이요, 제가 고백성사때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두려움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면초가 상황중에 들려오는 “저기 마고로 비싸빔이 지나간다!”며 수군대른 말소리입니다. 마고로 비싸빔은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이요 적대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흡사 수난중인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깊어지는 하느님 믿음의 크기와 깊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이렇게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온통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처분에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이런 고통의 심연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순경順境중에 찬미는 누구나 합니다. 이런 역경逆境중에도 불구하고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가 그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역경을 순경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참으로 불운을 행운으로, 운명을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예레미야의 찬양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견고히 하며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더불어 영원한 동반자이자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지고 튼튼해 집니다.

셋째, “복음을 선포하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과의 관상은 복음 선포의 활동으로, 주님과의 친교는 선교활동으로 향할 때 더욱 견고해지는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끊임없이 바다향해 흐를 때 살아 있는 맑은 강이듯 끊임없이 복음 선포의 활동이 있을 때 더욱 깊어지는 관상의 친교요 더욱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우리 삶자체가 복음이, 복음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사라지는 무지의 두려움, 무지의 어둠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이 투명히 드러날수록 저절로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의 삶은 그대로 말과 글과 행동으로, 아니 우리 삶 전부로 주님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알 때 증언합니다. 과연 나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주님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지요.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영원한 도반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인지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당대의 제자들도 모두 훌륭한 하느님의 전사들이었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영원한 현역의 죽어야 제대인 우리들입니다. 강론을 써가면서 새롭게 바뀐 강론 제목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모르지만 세월 흘러 나이들어갈수록 한결같은 삶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습니다. 절대 저절로 한결같은 삶이 아니라 갈수록 치열한 분투奮鬪의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확고한 믿음의 삶과 더불어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1.두려워하지 마라.
2.나와 함께 있어라.
3.복음을 선포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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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6월 21일
  |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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