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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 있는 그리스도인
조회수 | 2,971
작성일 | 05.07.23
니에커크라는 사람이 아프리카의 오렌지 강가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친구와 대화하던 중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이 예사로운 돌이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니에커크는 그 돌을 장난감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한 후 다아아몬드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후 니에커크의 집에 토인 마법사가 찾아 왔습니다.
니에커크는 토인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크고 빛나는 돌을 보고 그것을 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 돌이 마법용으로 쓰는 것이라며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니에커크는 자기의 전 재산을 건네주면서 힘겹게 그 돌을 살 수 있었습니다.
감정하여 보니 그 돌도 세계에서 보기 드문 귀한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보석 상인에게 11만 파운드에 팔았고,
그 상인은 다시 어느 귀족에게 20만 파운드에 팔았습니다.
이것이 ‘남아프리카 스타’라고 불려지는 유명한 다아아몬드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며,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보화와 진주는 모두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는 것을 서두에서 말씀드린 예화에서 보았습니다.

천국도 이와 같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하고, 세상이 주는 기쁨과 재물 그리고 나의 욕망과 영광을 포기해야합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을 포기할 때 소유할 수 있는 그것이 천국입니다.

진정 인생의 최고 가치,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서 3장 8절부터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예수회 소속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은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이아몬드를 장난감과 바꾼 어린이와 같지 않습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천국의 가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포기 없는 천국의 복을 누리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영원하고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고 소비하는 복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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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시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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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값진 진주에 비유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보물과 진주, 두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보물 혹은 진주가 사람을 현혹시키듯이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도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소유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가진 것을 버리면서 추구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을 자기 안에 영접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살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잘 믿고, 그분의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의 마음에 들어서, 그분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교섭해서 환심을 사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지혜일 수는 있어도 신앙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복을 비는 신앙이나, 기적을 찾아다니는 신앙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몇몇 사람에게 기적하는 힘을 주고, 다른 사람들은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철저히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 혹은 좋은 진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야 하는 보물 혹은 진주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고 그 함께 있음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한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부가 함께 있고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그것은 그 함께 있음이 좋아서 자유로이 택해서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많은 것을 버리고 함께 있음을 얻어서 더 자유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이런 함께 있음은 인간이 자유를 잃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는 자유를 잃고 주인과 함께 있습니다.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은 자유를 잃고 교도관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된 사람은 한 인간 개체로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누리는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사람도 많은 것을 버렸지만, 부부로서 누리는 새로운 자유가 있고 삶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충실한 사람도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렸지만, 친구와 함께 있어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맛봅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많은 것을 버리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 주고 우리의 이기심을 벗어나서 더 큰 자유를 누리게 해 줍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고, 우리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갈라 5,1). 이 자유는 하느님이 베푸심이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세상이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을 때,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십자가가 발생하였습니다. 내어주고 쏟는 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베푸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베풀면서 행복합니다. 우리가 이 베품의 가치를 부인하면, 이 세상은 동물의 세계가 되고 맙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베푸심을 알아듣지 못하면, 세상에는 감사할 것도, 용서할 것도, 희생할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경쟁만 있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 잘 살고, 나 한 사람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도로상에서 빨리 가면 되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인간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베품은 하나의 암호와 같이 우리 삶 깊은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내고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물 혹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 욕심, 허영, 속물근성 등을 버릴 때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암호입니다.

이 베푸심의 발견과 영접은 나의 계획, 나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푸심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일해야 합니다. 이 숨결은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보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이 숨결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삶의 깊은 곳에 흐르는 베품의 숨결입니다. 내가 이 숨결을 찾아 돛을 달면, 나도 이 숨결과 함께 흐를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베품의 이야기이지만, 나도 그 흐름에 합류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물이나 진주와 같이 숨겨져서 혹은 암호와 같이 해독(解讀)을 필요로 하는 양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숨결에 돛을 달고 함께 흐르는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확인 되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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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려라”

오늘의 복음말씀 내용 역시 「하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의 예들이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고, 또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고, 또 바다에 그물을 쳐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첫번째로 밭에 묻힌 보물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역사가 오래된 옛 도시인 경주에서 누가 굴착기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에 문화재 관리규정이 있어서 발견한 사람은 국가에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한 문화재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지만 그런 규정이 없다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그 보물들을 발굴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묻힌 모든 보물들을 발굴한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

옛날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중동지방에서는 민족들 간에 전쟁도 잦았고 때로는 홍수나 가뭄같은 천재도 심해서 생활터전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가거나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에 미처 운반할 수 없는 보물이나 살림도구 등은 땅을 파고 감추어 두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찾겠다고 하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몇년 후에 돌아와 보니, 사막이 대부분인 그 지역이 그동안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어디에 자기의 보물을 묻었는지 몰라 끝내 못찾은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옛 보물들을 발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두번째로 장사꾼이 좋은 진주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던 진주를 만났을 때 기뻐하며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서부영화에서 금을 캐서 부자가 되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목선으로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에 와서 인디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면서까지 험한 산속에서 금맥을 찾다가, 마침내 큰 금맥을 발견했을 때엔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재산이건, 몸이건, 모험이건, 폭력이건, 권력들을 총 동원하여 그 광산을 개발하여 금을 캐는 모습을 종종 본다.

낚시꾼들은 월척의 고기를 낚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낚시터로 떠나지만 작은 고기만 잡힐 경우엔, 그 작은 고기도 소중히 낚시 바구니에 보관하다가 마침내 월척의 큰 고기를 낚게 되면 소중히 간직하던 작은 고기들은 그것이 얼마가 되든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어 버리고 큰 고기만을 챙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르시자 즉시 자기들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왔던 가정, 재산,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도 바울로는 신도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코로 가다가 예수님을 체험하고는, 그가 그때까지 소중히 여기던 자기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 같이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그리스도가 내 생애의 전부』라고 까지 고백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무나 반한 나머지, 비 그리스도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자기의 몫으로 챙겼다. 아무도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번째로 하늘 나라가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려 좋은 고기는 그릇에 가리어 담고, 못먹을 고기는 밖에 집어 던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서 공존하듯 이 세상도, 이 교회도, 이 사회도, 심지어는 내 자신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때로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고 체험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 서로 가장 걸작품이고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피조물인 우리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무절제한 욕심과 교만심을 자극한 악마의 작전에 넘어감으로써, 가치관의 혼돈과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어두움의 세력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 죽음의 나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인류를 구원하셨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어서 종말에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성령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전구하심을 구하며 용감히 싸워야 하겠다.

허성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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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늘나라의 보물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은 깨달음을, 파는 것은 결단을, 사는 것은 실천에 옮기는 행동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은 이 세 단계를 거치는데, 사람에 따라서 그 속도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발견하여 깨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생의 마지막에야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첫 번째,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세속적인 지식이나 지혜에 의해 깨달아지기보다는 어느 날 우연히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세속에 묻혀 살게 되면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생을 보낼 수 있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참된 삶을 추구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과 부귀영화 가운데서도 참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실패와 좌절과 역경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하느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농부가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파는 단계는 결단의 시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 3장에서“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 8)라고 말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요, 해방된 마음이며, 모든 것을 초월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포기할 수 있는 자유의 마음인 것입니다.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이에 얽매일 때 인간은 추해지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깨달음과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동의 단계입니다. 칼로 잘라 버리듯이 세속적인 인연이나 미련, 애착을 끊어 버리고 밭을 사는 실천의 단계입니다. 이제 농부는 완전한 기쁨 속에 머무르게 되고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행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다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랑의 신비이며 환희의 신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고 이 신비 속에 온전히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완전히 자유로워진 해방의 삶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이수락 신부 : 2017년 7월 30일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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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쁨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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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인들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성숙 되고 바른길을 가고 있는지, 하느님 뜻 안에 머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지내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들 안에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자신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그분 보시기에 부족한 모습들도 발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 안에 묶여 있는 많은 습관적인모습 때문에 후회하기도, 아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다짐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부족한 우리 신앙의 삶에 대하여 다시 한번 더 돌아보게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며 보물을 발견하고 그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먼저 우리는 보물을 발견했을 때 어떤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요?

하늘 나라는 귀한 보물을 발견한 나 자신의 삶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귀한 보물을 발견한 기쁨은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세상 안에 다른 것들에 파묻혀 그 기쁨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요?

혹 보물임을 알면서도 그 귀한 보물이 드러내는 무게에 부담감을 가지고 지내는 것이 아닌지요?

그러기에 보물을 발견하고도 기쁨의 삶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둘째는 보물을 사기 위하여 나의것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물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정작 그것을 나의 것으로 하려고 하니 내 것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다 버려야 얻을 수 있고 포기해야 내 것이 된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정작 버리고 포기하는 것 앞에서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가 살면서 보물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힘든 것은, 채우고 모으는 것보다 비우고 버리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더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기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또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하여 얼마나 나의 것을 포기하고 비우고 살아가는지?

우리 서로 부족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지만 보물을 얻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는 신앙의 삶이 되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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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욱 바오로 신부
2020년 7월 26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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